10
“……그 여자 싫어요.”
“왜 싫어?”
“그럼 좋아요?”
“그 말이 왜 그런 뜻으로 유추되는 거지.”
재이는 침대에 누워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해준과 했던 대화들이 둥둥 떠다녔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좋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본인에게 호감을 표한 것도 아니었지만 기분이 풀린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걱정, 우려, 배신감, 슬픔으로 차갑게 동여매었던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비실비실 싱거운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재이는 해준을 잘 알고 있다. 분명히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면 ‘그래’가 아니라도 ‘그럴 수도’쯤에는 도달했을 것이다.
내내 해준의 쪽에서 쥐고 있었던 승기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해준을 떠올리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며칠 내내 신경과민에 시달리던 시간들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어딜 감히.”
재이는 피식 웃으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며칠 뒤 재이는 첫 출근을 맞았다. 비록 인턴이었지만 불경기로 인한 인원 감축의 바늘구멍을 뚫은 결과였다. 몇 달간의 맘고생과 책상 앞에서 버텨 낸 치열한 노력의 결과였다.
전날 잠을 설쳤지만 긴장해서인지 졸리지도 않았다. 마치 각성을 한 것처럼 조금 몽롱한 상태로 비척비척 거실로 나오는 중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재이가 발걸음을 멈추고 놀라 반색했다. 천하의 유해준이 앞치마를 입은 채 자신을 돌아보았다.
“오늘 첫 출근이니까.”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몰래카메라인가 싶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해준이 저런 꼴이라니.
“저 사진 찍어도 돼요?”
“안 돼. 앉아.”
해준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재이는 잠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들어 얼른 그의 모습을 찍었다. 살아생전 앞치마를 입은 모습을 보다니. 베실베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씁.”
“괜찮아요, 잘생겨서. 주방 브랜드 모델 같아요.”
재이가 어설프게 웃으며 그를 감쌌다. 정말로 유해준은 이 시대의 왕자님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재이는 아직도 해준만큼 귀한 취급을 받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집안에서는 그를 금덩이로 여겼다.
미국 유학 중에도 혹여 외아들이 배를 곯을까 우려했던 유 회장은 고급 아파트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한 것은 해준이었다.
그 밖에도 그가 뭘 한다고 나서면 집안에서는 온 지연과 학연을 동원해 최고의 팀을 꾸려 주었다. 해준은 대부분 거절했지만 언제든지 화수분 같은 자금 지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과 사이가 틀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유복하게 자랐다. 고생을 모른다는 건 어릴 적 그를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살면서 식칼을 잡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왜냐면 세상이 그에게 그런 일이 생길 여지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아까워서 못 먹겠는데요.”
재이가 여전히 실감이 안 나는 채로 식탁 의자에 앉았다.
“뜨거워.”
그가 식탁에 올려놓은 건 간단한 야채죽이었지만 둘에게는 남다른 의미였다. 평소에는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아 더욱 놀랐다. 재이가 죽을 저으며 호호 불어 김을 식혔다. 해준은 맞은편에 앉아 재이를 바라봤다.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의아함을 느낀 재이가 물었다.
“그런데 회사에 늦게 가도 괜찮아요?”
“상관없어.”
상관없다니. 재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또한 해준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에는 이미 회사에 도착해 업무를 보는 인간이었으니까. 재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막막해 가만히 생각하다 조심스레 물었다.
“……사춘기예요?”
해준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다 간략하게 말했다.
“오늘 첫 출근이잖아.”
“그걸 알고 있었어요?”
“네 일인데 모를 리가.”
재이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알고 있었다니. 많은 일에 치여 본인도 돌보지 못하면서 왜 그런 걸 기억하고 있었을까.
“고마워요.”
믿고 싶은 답이 있었으나 과도한 기대를 하게 될까 애써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재이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주차장으로 그와 함께 내려왔다. 해준이 재이의 가방을 들어 주며 걸었다.
“인턴 중에는 기사님이 출근을 도와주실 거야.”
“기사님이요? 지하철 타면 환승 없이 갈 수 있는데…….”
“차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 원래 처음이 고달파.”
해준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량의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재이는 익숙하게 뒷자리에 탔다. 해준은 뒤로 빙 돌아 그녀의 옆에 탔다. 재이가 조금 놀라서 물었다.
“회사 안 가요?”
“괜찮아. 일단 타.”
“오늘 연차예요? 정말 안 가도 돼요?”
“오늘은 너 가는 거 봐야지.”
아마 유해준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업무 외에 지극정성인 인물이 있다고 이야기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회사 근처에 도착했을 때, 재이는 자신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며 말했다.
“내일은 지하철 타고 갈게요.”
“차 타고 가.”
“누가 태워 준다 그러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재이가 단호한 해준 못지않게 또박또박 대꾸했다. 수행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다니라니. 왕자님은 일개 인턴사원이 고급 세단을 타고 뒷좌석에서 내린다고 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끝나고 집에서 보자.”
해준은 알겠다, 모르겠다 대답을 뛰어넘어 재이와 인사했다. 이럴 때는 해준도 독선적인 경향이 있다. 차에서 내린 재이는 작게 한숨을 쉬며 해준이 앉은 편의 차창에 가까이 갔다.
“……얼굴 만져 주면 안 돼요?”
별말 없이 뒷좌석 창문이 내려갔다. 해준이 팔을 뻗어 재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격려했다.
“축하해. 사회인 안재이.”
재이의 입꼬리가 간질간질했다. 벅찬 마음이 볼로 옮겨 간 건지 불에 덴 듯이 뜨거웠다. 보지 않아도 붉을 게 분명했다.
* * *
재이는 오랫동안 이날을 기대했다.
첫 사회생활.
설렘 같은 낭만적인 감정보다는 걱정과 우려가 더 컸지만 사회인이 되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유는 순전히 해준 때문이었다. 여전히 자신을 애 취급하는 게 답답했지만 감정에 호소할 일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더 이상 애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른이 되면 된다.
[일은 할 만해?]
회사만 출근하면 일에 파묻혀 감감무소식이던 해준에게 메시지가 왔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지 실감 났다. 재이가 주위를 돌아보며 조심스레 답장했다.
[첫날이라 딱히 시키는 건 없는데 좀 눈치 보여요.]
[우리 회사로 오지 그랬어.]
표정에 큰 변화는 없지만 눈동자에서 못마땅함이 일렁이는 해준 특유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취업을 원하는 재이를 해준은 자신의 회사에 데려오려고 했으나 이미 재이가 한사코 거절한 바 있었다.
재이는 그가 자신을 크게 걱정하는 게 느껴져 일부러 씩씩하게 답장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모르는 이런 상태로 갈 수는 없어요. 잘해야죠. 제가 그 회사에 가면 민폐라구요.]
[그런 거 아니야.]
짤막한 메시지였지만 그의 마음이 와닿았다. 오가는 메시지에 뭉클한 마음이 들어 잠시 감상에 젖었다.
“안재이 씨?”
순간 재이가 일하는 팀의 대리가 그녀를 불렀다. 재이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인사부에서 찾는데. 올라가 봐.”
“아, 아 네. 알겠습니다.”
인사부에서 왜 나를 찾는다는 걸까. 재이가 크게 당황해 인사부로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인턴 안재이인데…….”
“아. 저 따라오세요.”
인사부 직원은 재이를 보고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직원은 먼저 앞서가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재이는 혹시 자신이 실수라도 한 걸까 싶어 조마조마해 견딜 수 없었다.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혹시 무슨 일인가요?”
“국장님이 잠깐 뵙자고 하시거든요.”
“국장님이요?”
“네. 국장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재이가 말문이 막혀 떨떠름하게 서 있었다. 국장이 왜 자신을 찾는단 말인가. 이유를 들어도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국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모르는 여자가 뒤돌아보며 크게 웃었다.
“어머. 네가 재이니?”
“누구…….”
누구지? 해준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턱 끝에 오는 칼 단발에 도회적인 이미지. 말끔하고 포멀한 차림 탓인지 냉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면 목소리는 애교가 설탕 코팅된 듯 사글사글했다.
혹시 유학 시절 해준의 지인이었던가? 하지만 해준은 저런 류의 말투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재이는 말을 얼버무리며 어린 고양이가 경계하듯 그녀를 유심히 바라봤다. 여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정가윤 과장이에요. 내가 말실수했네.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정가윤.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재이의 안색이 변했다. 반면 가윤은 여유 있는 태도로 그녀를 반겼다. 아니 오히려 알던 사람을 만난 듯 편해 보였다.
“말 놓는 거 불편해요?”
“아, 아뇨. 아니에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재이가 당황하여 대꾸했다. 가윤은 연신 재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말했다.
“해준 씨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이번에 인턴 리스트 보는데 네 이름이 있길래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네.”
“오빠한테요?”
“그럼. 오빠한테 들었지. 나 모르니?”
재이는 그 말이 굉장히 거슬렸다. 가윤은 해준과 돈독한 사이라는 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 스며든 뉘앙스는 ‘그것도 몰랐냐.’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어렴풋 재이는 자신뿐 아니라 가윤도 본인을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시 아니면 견제.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재이는 자신의 생각이 착각이길 바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오빠한테 들은 게 없어서.”
재이의 말에 가윤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예쁘게 올라간 입매가 이도 저도 아니게 일그러졌다. 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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