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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전화를 끊었다. 난생처음 해 보는 치사하고, 나쁜 짓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영업용 휴대폰 중 하나였다는 것이었다. 재이는 아직 그 문제의 여자와 깊은 관계가 아닐 거라고 추측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해준은 통화를 계속하다 전화를 끊고 차에 탔다. 재이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다시 회사 가야 돼요?”
“그래야 될 듯싶은데.”
“이번 주만 집에서 자면 안 돼요?”
“이번 주 내내?”
“네.”
하지만 재이는 이미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무슨 중요한 용건이길래 여러 차례 전화를 남긴 걸까. 게다가 선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면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무리한 부탁에 해준이 조금 어리둥절한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힘써 볼게.”
이 말은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YES’의 뜻이었다. 해준은 늘 그래 왔다. 왕자님 같은 그는 세상 모든 걸 끌어다 재이에게 선물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움은 없었고 불가능은 돈으로 해결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건 능력으로 커버해 왔다.
여전한 그의 태도에 재이는 안심하면서도, 조금 전에 걸려 왔던 전화를 떠올렸다. 선을 봤던 그날 이후로 여자와 계속 연락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준과 자신은 ‘가족’이었으니까.
* * *
재이는 휴대폰을 앞에 두고 어두운 서재 안을 지켰다. 작은 전등 하나 켜지 않고 컴컴한 10평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에서 턱을 괸 채 도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손톱으로 책상을 건드리는 탁, 탁 하는 짤막하고 규칙적인 소리와 씩씩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서재 안은 폭풍 전야처럼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
빛 대신 번뜩이는 재이의 눈빛은 살쾡이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인기척도 없는 방에서 안광은 존재감이 형형했다. 허공을 노려보며 마음을 가라앉혀도 마음엔 이끼가 낀 듯 산뜻해지지 못했다.
20분, 30분이 지나도 재이는 여전히 저기압이었다. 심호흡으로 가슴팍이 들썩이던 중, 번쩍이는 휴대폰 빛이 그녀 얼굴에 드리웠다.
[정가윤]
무음으로 바꿔 놓은 휴대폰은 소리 없이 재차 번쩍이며 통화 수신을 알렸다. 이름 석 자 단출한 저장명이었지만 기다렸던 연락을 보자마자 온몸의 피가 식는 듯했다.
여자는 요 며칠 비슷한 시간에 전화를 걸고 있다. 통화는 길게 이어지진 않았지만 벌써 닷새째다. 분명히 며칠 전 선을 봤다는 상대일 것이다. 굳이 오빠에게 묻지 않았지만 재이의 직감은 틀리는 적이 없었다.
“어이가 없네.”
재이가 입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감히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전화를 해? 차라리 실수로 눌렀길 바랐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비웃기라도 하는 건지 휴대폰은 수신을 간절히 바라듯 오랫동안 끊기지 않았다.
“…….”
자신의 목소리에 어떻게 반응할까. 재이는 의미심장한 말로 여자를 끊어 낼 셈이었다. 본인을 그가 숨겨 놓은 애인쯤으로 오해하게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야말로 그의 옆을 지키고 있고, 불청객이야말로 쉬쉬되어야 하지만 억지로 나간 선 자리이니 그 정도는 감안하기로 했다. 완벽한 남자의 옆에 있는 고충이 이런 거라면 기꺼이 감안해야겠지. 대신 이런 가당찮은 감정을 겪어야 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상대는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야심 차고, 실패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재이는 아무 말도 없이 싸늘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최대한 해준을 따라 한 말투였다. 건조하고, 세상에 무감해하는 듯한 목소리. 그게 재이에겐 어른의 모습이었고 그녀가 아는 세상이었다.
-아.
전화를 건 사람은 생각지 못한 목소리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재이는 기세를 몰아 까칠하게 몰아붙였다. 상대방은 조금 혼란스럽게 대꾸했다.
“전화했으면 말을 하세요.”
-해준 씨 전화 아닌가요?
“맞는데요.”
-지금 누구…… 아.
“해준 씨 지금.”
샤워하러 갔어요, 라고 말할 참이었다.
-설마 네가 재이니?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재이의 입이 쑥 들어갔다.
그녀가 나를 알고 있다.
“예?”
재이가 시선을 산만하게 돌리며 버벅였다.
-난 또 깜짝이야. 이야기 많이 들었어. 해준 씨한테 전화했다고 전해 줄 수 있니?
“…….”
여자는 어딘지 모르게 재이의 정체를 눈치채자마자 안심한 눈치였다. 순간 자존심이 와르르 박살 나는 듯한 느낌에 재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기분이 상했다.
왜? 왜 내가 받으니 오히려 목소리가 편안해진 걸까. 날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길래.
-그럼 부탁할게.
용건이 끝난 전화는 지체되지 않고 끊겼다. 재이는 짧은 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화를 곱씹었다. 맥이 탁 풀리는 느낌에 진이 빠지는 듯했다.
“어이가…….”
재이가 허탈하게 웃었다. 날 알고 있어? 설명할 수 없는 괘씸함과 혼란스러움에 속에 누가 불을 지른 듯 열이 올랐다. 아마 남이 보면 자신의 머리 위로 뜨거운 김이 스멀스멀 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똑똑.
“안 자고 거기서 뭐 해.”
가벼운 노크 후 서재의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빛이 재이의 얼굴을 비스듬히 가르듯 드리웠다. 노랗고 따뜻한 무드 등의 빛에 해준의 검은 동공이 짐승처럼 번뜩였다.
“…….”
홈웨어의 용도가 무색할 정도로 멋들어지게 태가 나는 남자. 188cm에 늘씬한 팔다리의 모델 같은 골격. 머리카락 한 올도 세팅하지 않았지만 그것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수려한 이목구비. 대원 그룹의 외아들이자 본부장.
그리고 나와 함께 사는 남자. 나의 보호자. 내 거.
재이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남자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이건 일종의 배신감이었다. 지금 도대체 그 여자가 날 왜 알고 있냐고, 그렇게까지 깊어진 사이냐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다.
눈에는 그 모습이 선명하게 드리웠지만 영특한 재이는 안간힘을 쓰며 자신을 억눌렀다. 자신에게 한참 큰 의자에서 내려와 조곤조곤 말했다.
“우유 데워 주세요.”
보란 듯 눈을 깜빡였다. 해준은 서재에서 나오는 재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 * *
“뜨거워.”
“감사합니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결국 재이와 해준은 10인용 식탁에 단둘이 앉게 되었다. 그는 태블릿 피시로 업무를 확인하고 있었다. 재이는 남자의 휴대폰으로 코를 박듯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요란한 게임 사운드가 층고 높은 넓은 집을 울렸지만 해준은 한마디 꾸중이나 눈치를 주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로 시선은 태블릿 피시에 고정된 채 스크롤을 내릴 뿐이었다. 그 옆에서 재이가 다 식어 버린 우유는 안중에 없이 분풀이 하듯 거침없이 공격을 이어 나갔다.
죽어, 죽어, 죽어. 게임은 공격과 방어가 적절히 섞여야만 하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앞선 탓인지 플레이가 꼬였다. 결국 연타의 공격 중에 방어할 타이밍을 놓친 캐릭터는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그건 오래 하네. 그게 제일 재미있어?”
“네. 이게 재미있어요.”
해준이 넌지시 물었지만 재이는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대답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너무 오래 하면 안 돼.”
해준의 말도 꾸중과 염려보다는 고지에 가까웠다. 곧 잘 때가 되었잖니. 재이가 다시 시작하기를 누르며 말했다.
“이번 판만 하구요.”
재이가 다시 부산스럽게 게임을 하며 생각했다. 사실은 어떤 게임도 큰 흥미를 못 느낀다는 걸 죽었다 깨도 모르겠지.
재이가 게임을 하겠답시고 해준의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건 둘 사이에 흔한 일이었다. 재이는 주로 고사양의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해준의 휴대폰을 자주 빌렸다. 자신의 영역에 예민한 해준도 그녀의 손길에는 무뎠다.
재이는 그 틈을 노렸다. 그걸 이용해 종종 나쁜 짓을 했으니까. 그게 재이가 공부에 매진하겠다며 사양이 낮은 휴대폰을 고집하는 이유기도 했다.
“그때 선본 거 잘됐어요?”
재이가 여전히 게임에 열중하며 넌지시 물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화제에 도표를 유심히 바라보던 해준이 잠깐 멈춘 채 되물었다.
“뭐?”
“지난주 주말에 간 거요.”
내내 휴대폰 액정에 코를 박고 있던 재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작은 흔들림이라도 알아차리겠다는 듯한 눈치였다. 해준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냥 별일 없이 끝났어.”
“…….”
거짓말.
재이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자신이 평소보다 묘하게 냉랭하다는 걸 그는 알아챘을 것이다. 이렇게나 나를 잘 알면서. 분명히 내가 기분 나쁠 거란 걸 알면서 왜 그런 건지 묻고 싶었다.
말 없는 둘 사이에 요란한 기합 소리와 무기가 부딪치는 효과음이 쩌렁쩌렁했다. 재이가 게임 볼륨을 조금 줄이고는 정신없이 작은 액정 위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아까 전화 왔었어요.”
“그랬군.”
김이 샌다고 해야 하나 얄밉다고 해야 하나. 예상보다 별다른 반응 없이 싱거운 대답이 괜스레 자신을 의식한 거 같아 신경 쓰였다. 속마음을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한 건 자신뿐이었다. 재이가 입매를 억지로 늘어트리다 자신의 마음을 툭, 던졌다.
“……그 여자 싫어요.”
“왜 싫어?”
“그럼 좋아요?”
“그 말이 왜 그런 뜻으로 유추되는 거지.”
“…….”
해준이 태블릿 피시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재이가 그 소리에 눈알을 굴리며 움찔거렸다. 이쯤에서 넘어가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자신임을 알자 안심하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꿍얼거렸다.
“절 알고 있던데요.”
“알지.”
그때까지 액정에 눈을 떼지 않던 재이가 고개를 들어 해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해준은 재이의 예상보다 더 덤덤히, 당연스레 대꾸했다.
“설마 널 모를까 봐.”
“…….”
심장이 쿵. 재이는 잘못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해준의 말이 속에는 어떤 걸 내포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아무 뜻도 없는 건데 찔리는 마음에 이렇게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거 같은지 종잡을 수 없었다. 당황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라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채 어물거리자 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유 잔을 도로 개수대에 비웠다. 이제 일어나자는 신호였다. 재이는 잠자코 그를 따랐다. 해준이 침실로 들어가기 전 집 안의 조명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