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재이는 두 시가 다 되어서야 귀가했다. 아마 그는 서재에서 남은 일을 하느라 자신의 귀가 여부도 모를 것이다. 재이가 집에 오기도 전에 일에 파묻혀 과로사할 확률이 아주 높았으니까. 재이가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기척 없이 조용히 들어갈 생각이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기 전까진.
“엄마야!”
재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꽥 소리 질렀다.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가슴을 부여잡고 가방을 떨어트렸지만 그는 덤덤히 고개를 돌리고 재이를 쳐다봤다.
“늦었네.”
“제가요? 아. 예. 어 조금. 그렇네요.”
재이가 황급히 그리고 어설프게 대답했다. 그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심기가 불편한 게 분명했다. 호기롭게 늦은 귀가를 자처했지만 재이는 뒤늦게 눈치가 보였다. 새로 산 화장품이 든 가방이 발등에 찍혀 괴로웠지만 아파할 새도 없이 허둥지둥 제 방으로 걸어갔다.
해준은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서늘한 눈빛으로 재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얼굴을 마주하면 잔뜩 짜증스럽게 대할 생각이었던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들어가자.”
그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애석하게도 해준은 자신을 여태 쭉 기다린 듯했다. 특별히 평소에 통금 시간을 정해 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한 말을 처음으로 어겼다. 재이 스스로도 ‘왜 이런 걸로 눈치를 주는데?’와 ‘하, 죽었다.’라는 양가감정이 혼란스레 뒤섞였다.
“자고 있을 줄 알았어요.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재이가 던진 회심의 화살이었다. 난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알고 있다고 던진 시그널이었다. 양심에 찔리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호수 같은 잔잔한 마음에 요동이라도 일으키고 싶었다.
“볼일 보러 어디 좀 들르고 오는 참이야.”
하지만 해준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되레 당황한 건 재이였다. 캐묻지 않고 은은하게 시그널을 던지며 그를 괴롭힐 작정이었지만 보란 듯이 대답하는 모습에 욱하고 성질이 치솟았다. 결국 재이는 자신의 남은 공격 카드를 계획보다 빨리 써 버렸다.
“무슨 볼일이요?”
“선보고 왔어.”
“…….”
도리어 당당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재이는 말문이 막혔다. 해준은 표정 변화 없이 재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태연한 시선에 재이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날 듯 저려 왔다.
“아니 지금…….”
장난하는 거냐고. 재이가 이를 악물었다.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되레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거 같았다. 그가 ‘내가 선보는 걸 네가 왜 문제 삼느냐.’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제 발 저리듯 불쾌했다.
둘의 대화에는 그런 가정이 깔려 있었다. 재이가 그를 의지하고 좋아하는 걸 알고도 선을 보아도 되는 것인가. 10년을 넘게 가족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는데, 재이를 두고 둘이 함께 이룬 가정을 이탈해도 되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오.
적어도 재이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몹시 당당한 해준의 태도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해준은 쉽게도 판을 바꾸었고 승기를 거머쥐었다. 재이 혼자 개짓거리를 한 꼴이 된 것이다.
“잘됐네요.”
닭 쫓던 개의 심정이 이런 걸까. 재이는 결국 속에도 없는 말을 쏘아붙이고서 거실을 떠났다.
* * *
남자친구 바람.
바람 잡는 법.
사실혼 부부 바람.
재이의 머릿속엔 그런 키워드들이 떠올랐지만 어디다 섣불리 조언을 구하지 못했다. 사실상 남들이 보기에도, 둘 사이에서도 해준과 재이는 명목상 연인이 아니었으니까.
“아, 열 받아.”
재이가 노트북으로 자소서를 적다 말고 머리를 움켜쥐었다. 며칠 내내 그것도 눈 떠 있는 시간이라면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었고 가슴은 돌을 얹은 듯 답답했다. 시시때때로 오르내리는 기분에 속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게 다 그 선 때문이다.
“아…….”
차마 집이라 소리는 못 지르겠고, 없던 일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재이는 끙끙거리며 방을 나가 물컵에 얼음을 가득 따랐다.
“선보고 왔어.”
단숨에 들이켜는 와중에도 무슨 문제라도 되냐는 눈빛을 하고서 태평한 목소리로 말한 게 끊임없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자신도 거의 처음으로 새벽에 귀가했겠다 찔리는 구석이 있어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었다.
“어디서 개짓거리야 지금…….”
새초롬한 재이의 눈초리 속 동공이 반짝거렸다.
“아, 이걸 어떡하지?”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당당하게 말하면 나는 그냥 그렇냐고 넘어가야 하는 거냐고. 어디 털어놓을 데도 없어 더 답답했다.
친오빠처럼 단둘이 의지하며 함께 살던 남자를 사실은 내가 몹시 사랑해 마지않으며, 그도 얼추 알고 있는 눈치고, 남자의 집에선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고 있다고. 그 와중에 남자는 나이가 차서 이제 결혼 적령기를 맞았고 나 혼자 버림받을 위기라는 걸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불편한 심기의 재이는 해준을 떠올렸다. 벌써 그런 다툼 후에 또 이틀째 얼굴을 못 보는 중이었다. 이렇게는 안 된다. 어디서 어떤 여자와 선을 보고 있을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러다간 제명에 못 살지도 모른다. 결판을 내야 했다.
“여보세요?”
-어, 재이야.
평소엔 전화 통화가 어렵던 남자가 속에 찔리는 건 있는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재이는 조금 뜸 들이다 떨떠름하게 말했다.
“오늘 밖에서 저녁 먹을래요?”
-오늘?
“되도록 오늘인데요, 혹시 바쁘면 내일 먹어도 돼요.”
-아니 이따 보자. 양갈비 좋아하잖아. 회사 앞에 맛있는 곳 있어.
해준은 개의치 않은 듯 이야기했으나 그의 스케줄상 분명히 무리일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를 위해 거절했겠지만 이번엔 그의 마음을 시험하고 싶었다.
“……제가 좋아하는 그거도 나와요?”
-물론이지.
재이가 말하는 ‘그거’는 민트 젤리였다. 설명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아들을 만큼 자신을 잘 알면서, 도대체 왜 그랬냐는 말이 목 끝에서 달랑였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전화를 끊고 재이는 조금 멍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같은 목소리에 안심되는 자신이 몹시 바보처럼 느껴졌다. 보통 때와 다를 바 없는 해준을 자신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등신, 등신…….”
둘이 힘겹게 지내 왔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타향만리에서 입에도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며 미국 생활을 버텼다. ‘버텼다.’라는 표현은 실로 정확했다. 잊을 만하면 당하는 인종 차별, 외로움과 싸웠고 대학원생이었던 해준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대학을 병행했다.
둘만큼 서로에게 애틋할 수 없었다. 그랬었는데. 한국 땅을 밟으며 이제 좀 살 만한가 싶었더니 이런 ‘빅 엿’을 먹다니.
해준의 수행 기사가 약속 시간에 맞춰 재이를 집 앞까지 데리러 왔다. 재이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재이는 혼자 뒷좌석에서 눈을 굴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오빠 요즘도 바쁘죠?”
“본부장님은 항상 바쁘시죠.”
수행 비서가 재이보다는 해준의 편이라면, 수행 기사는 좀 더 그녀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다. 재이가 큰 의미 없는 스몰톡을 주고받으며 친근함을 쌓아 갔다. 재이가 조심스레 진짜 용건을 꺼냈다.
“요새 집에도 못 와서……. 선 자리도 많이 다닌다고 정신없죠?”
“선이요?”
나름대로 확인 사살 겸 던진 질문이었는데 되레 떨떠름한 반응이 오자 재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행 기사는 룸미러로 흙빛 안색이 된 재이를 보며 조금 긴장한 채 대답했다.
“선……. 보고 중에 이야기는 나왔는데 구체적으로 반응하시진 않으셨습니다.”
“……집에서 강하게 그러세요?”
“본부장님께 개인적으로 연락 온 건 듣지 못했습니다.”
재이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이건 진짜 반응이 아니다.
“그렇군요…….”
그와 직원들 간에 짜 맞춰진 각본이 분명했다. 유 회장의 성격에 안팎으로 해준을 들볶아도 모자랄 것이다. 재이는 더 이상 알아낼 정보가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입을 다물었다.
차는 부드럽게 식당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앞에 해준이 마중 나와 있었다. 차가 정차하자 그가 다가와 차 문을 열어 줬다.
“재이야.”
꽁한 마음은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그를 보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다. 재이는 안간힘을 쓰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모델 같은 실루엣의 긴 팔다리, 떡 벌어진 어깨, 훌륭한 신체 비율. 그리고 가까이서 보면 더 잘나고 수려한 이목구비와 서늘한 분위기까지. 쉽게 대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위압감과 그에 걸맞은 행동 양식은 어떤 여자도 흔들릴 정도였다.
“잡아 줄까.”
그가 덤덤히 물으면서 손을 건넸다. 재이는 그 손을 넙죽 잡고 차에서 내렸다. 크고 따뜻한 손은 언제 맞잡아도 가슴이 떨렸다.
마음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되레 자신이 괜한 짜증을 부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미국에서도 툭하면 아이 취급을 받지 않나 수시로 동양인 차별을 당했던 자신과 달리 그는 어딜 가나 적극적인 대시를 받았다.
외국인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는 키와 탄탄한 몸매,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절제되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섹시함이 흐르는 성격까지. 따르는 여자만 해도 인종과 나이를 불문하고 한 트럭이었다. 수시로 받아 오는 선물에는 콘돔이나 성적인 뉘앙스가 풍기는 것도 허다했다.
“그 넥타이. 잘 어울려요.”
재이가 떨리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해준은 말없이 재이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식사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재이를 위해 특별히 오버하지도 않았고 소홀하지도 않았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재이는 맞은편에 앉아 기다렸고, 그는 집어 먹기만 하면 될 수 있게 챙겨 주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응석을 부릴까 싶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재이는 무척 오랜만에 외식하며 해준과 데이트했다.
함께 화기애애하게 나온 재이는 해준의 차에 먼저 탔다. 그는 업무적인 통화를 하느라 차 앞에 서 있는 참이었다. 잠시 기다리라며 손을 올려 보이는 그에게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ZZZZZ-
운전석에 놓인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그가 사업차 휴대폰을 여러 개 쓰는 데 익숙한 재이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ZZZZZ-
끊어지지 않는 진동을 별스럽지 않게 듣다 머릿속에 번뜩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재이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뒤집었다.
[부재중 통화 정가윤]
재이는 싸늘한 표정으로 발신자를 내려다보았다. 해준이 등을 돌린 틈을 타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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