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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이래서 한국에 오기 싫었다.

해준은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카페로 들어섰다. 이 지독한 노친네는 자신이 들어오기 무섭게 선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두 자릿수로. 주말, 평일 할 것 없이 빽빽한 일정이었다.

자신의 비서는 업무뿐 아니라 선 자리 상대측과 일정을 조율하느라 골머리를 썩일 정도였다. 일방적으로 퇴짜 놓기에는 다들 평범한 집의 딸들이 아니었다. 빵빵한 집안에 교사와 같이 결혼 시장에서 선호되는 직업부터 의사, 아나운서, 연예인, 자영업자까지 다양했다.

“저희 아버지와 집안을 무시하시는 건가요?”

“저도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약속을 무르다니요?”

“지금 이러시는 거 회장님도 아시나요?”

그들은 대부분 바빴고, 아무리 대원의 손주라고 하더라도 아쉬운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기선 제압에 밀리는 것이라 생각해서 까다롭게 굴었다.

정 일정이 맞지 않는 날엔 오늘처럼 퇴근 후 만나기도 했다. 해준은 당장이라도 집에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눕고 싶었지만 견뎌야 했다.

“안녕하세요. 유해준입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정가윤이에요.”

“아, 네.”

해준이 정중하게 악수하며 명함을 건넸지만 속은 텅 빈 상태였다. 당신이 내 말을 많이 듣든 말든. 그의 머릿속엔 자신이 앉아 있을 수 있는 리밋의 시간과 침대뿐이었다.

오늘의 상대는 방송국에 종사하고 있는 자신보다 두 살 어린 여성이었다. 비서는 그녀의 아버지가 방송국 보도 국장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해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보도 국장 할아비가 와도 쏟아지는 피로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많이 바쁘신가 봐요. 약속 잡기가 어렵더라구요. 이제 퇴근하신 건가요?”

“그렇죠. 뭐. 정 국장님 잘 계시죠?”

“아…… 아버지요? 네. 잘 계시죠. 요즘 필드 나가시느라 정신없어요.”

“필드. 필드 좋죠. 날이 좋아서.”

묘하게 자신을 빗겨 난 해준의 초점을 느꼈지만 가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결혼 시장에 유해준이란 매물이 드디어 나왔다니. 쉽게 놓칠 수 없었다.

대원의 외아들 유해준.

좀 산다 싶은 집안의 여성들은 그를 강렬하게 원했다. 가윤도 마찬가지였다. 열한 시가 다 된 시각, 자연스레 술 한잔 걸치고 그와 잠자리를 하는 것. 그게 가윤의 계획이자 남은 일과였다.

다행히 이 백마 탄 조건의 왕자님은 외모까지 완벽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까만 머리칼과 눈동자, 선이 잘 정돈된 얼굴형, 퍼펙트 바디에 가만히 있어도 풍기는 남성미까지. 세세하게 꼽아 보아도 재벌이 아닌 모델로도 손색없을 만큼 완벽한 남자였다. 티브이 광고 속에 나오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근사했으니 누가 그를 싫어할까.

가윤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해준이 무신경하게 눈을 마주쳤다. 가윤이 감히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관심 가지 않았다.

“식사는 하셨을 거 같고. 술 좋아하세요?”

“죄송합니다.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그의 말에 가윤이 멈칫거렸다. 이런. 이건 사전에 없던 정보인데. 마담뚜가 이런 실수를 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가윤이 잠시 궁리하다 다시 물었다.

“그럼. 심야 영화 보는 건 좋아하세요?”

“아니요. 죄송합니다. 어둡고 좁은 곳도 즐기지 않아서요.”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해준은 재이와 왕왕 심야 영화를 즐겼다. 그의 거절에 오기가 생긴 가윤이 대뜸 물었다.

“그럼 저희 집으로 가실래요?”

“네?”

“저희 집이요. 밝고 넓고 이 근처예요. 술 말고 다른 것도 많구요.”

해준은 조금 놀라고 황당한 마음에 몽롱하던 잠기운까지 가실 정도였다. 가윤은 도발적인 말을 해 놓고도 맹랑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해준이 멋쩍은 표정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골치 아픈 상대를 만났다.

선을 봤던 이들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자기 어필을 해 왔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초장부터 강수를 두다니. 그가 난감하게 웃으며 최후의 거절 카드를 빼 들었다.

“죄송해요. 집에 애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애요?”

‘애’는 다름 아닌 재이의 존재였다.

유 회장은 비서를 통해 상대방의 프로필을 넘겨주며 재이의 존재를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해준은 전혀 지시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예. 아직 어려서 밤에 잠투정을 좀 하거든요.”

그가 덤덤하게 못 박았다. 딸린 애가 있었던가?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에 가윤은 떨떠름하게 웃으면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애인이 없는 게 어디란 말인가. 가윤은 이 황금 알을 낳는 왕자를 어떻게 꾀어낼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 * *

“미친…….”

재이는 해준의 시선을 피해 다급히 카페를 뛰쳐나왔다.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나왔다. 봐선 안 될 장면을 본 거처럼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아직 상황을 모르는 친구가 재이에게 끌려 나오며 물었다.

“너 왜 그래? 괜찮아?”

“……아니. 아. 괜찮아.”

당황한 목소리의 재이는 경황이 없었다. 불안해 보이고, 들뜬 모습에 친구가 재차 물었지만 재이는 그냥 괜찮다고만 했다. 재이가 친구와 대로변으로 가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척 카페에 돌아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여자와 대화 중이었다.

해준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원래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지 간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재이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유심히 살폈지만 중단발의 잘 세팅된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예뻤던가? 기억을 곱씹어 봐도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1분이 10분처럼 느껴졌다. 재이는 휴대폰을 두드리다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급한 용건부터 튀어나왔다.

“김 비서님. 늦은 시간에 죄송한데요. 혹시 오빠 어딨는지 아시나요?”

-아 네. 안녕하세요, 아가씨. 본부장님 아까 퇴근하셔서 지금쯤 집에 도착하실 텐데요.

“아까요?”

재이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빌어먹을 집은 무슨 집이야. 지금 웬 엉뚱한 여자랑 심야에 카페에서 이야기꽃이 피었다고.

의미심장한 재이의 대꾸에 그제야 불현듯 비서의 머릿속에 해준의 선 자리 약속이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지만 미처 발신자도 확인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하필 재이라니. 타이밍이 좋지 않다. 뭔가 눈치챈 듯한 낌새에 말을 돌렸다.

-아니. 그건 그런데요. 아가씨.

“…….”

재이는 침묵을 고수했다. 비서가 속으로 진땀을 흘리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물론 부분적으로.

-아니. 그러니까. 오늘 약속이 있으세요.

“무슨 약속이요? 선이죠?”

-어… 여성분 부친이 방송국 보도 국장이신데, 지금 거기 저희 광고만 황금 시간대로 여러 개 들어가고 있거든요?

“선이잖아요.”

-겸사겸사 업무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는 거고. 뭐,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만. 일단 두 분이.

“선이잖아요……!”

재이가 소리 지르려다 급하게 말을 줄였다. 심호흡을 하는 사이 비서도 진땀을 흘리긴 마찬가지였다. 해준이 동거인과 매끄러운 사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여러 일을 조율하는 것, 그것이 유해준 본부장 비서의 역할이기도 했다.

-아가씨. 어떤 걱정을 하고 계실지는 알지만.

“아니. 됐구요. 저는 모르는 일로 해 주세요. 저랑 전화했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건 할 수 있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일촉즉발의 터질 거 같은 통화는 급하게 끊어졌다. 마땅한 이유 없이 큰 신경질이 났다. 스트레스가 몰려오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보고는 아직도 밤늦게 다니지 말라면서 본인은 숨기고 여자나 만나고 있다니.

재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 전에 집에 도착하려면 지금 출발해야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여보세요? 미안해. 나 가는 길에 전화해 봤는데, 늦게 들어가도 될 거 같아. 어디쯤이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재이가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걸며 택시를 잡았다.

* * *

해준은 은근한 호감이 깔린 추파를 몇 번이나 거절하여 겨우 빠져나왔다. 차에 타자마자 해준이 부재중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비서에게서 전화 한 통 온 것이 다였다.

해준은 일상용 전화의 메시지도 확인했으나 재이의 연락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먼저 들어가 씻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먼저 잠들었을 수도 있겠지. 해준은 블루투스로 연결된 카오디오로 비서에게 통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까 재이 아가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본부장님 선 자리 이야길 꺼내는 걸로 봐서는 아마 같은 곳에 있던 거 같은데 혹시 못 보셨나요?

“날 봤다고?”

비서가 전한 말은 그리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서울 시내에 카페가 얼마나 많은데 자신의 회사 근처도 아니고, 집 근처도 아닌 엉뚱한 곳에서 자신을 발견할 줄이야. 일부러 재이가 자주 노는 동네도 피해서 잡은 약속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어이가 없군.”

-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눈치채신 거 같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재이가 알면 싫어할 게 뻔하니 비밀리에 진행해 왔던 일인데 이런 우연이 생기다니. 해준은 차분하게 통화를 이어 갔다.

“그리고 또.”

-예. 음. 그리고 끊을 때 통화한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하셨고요.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

해준이 얼굴을 굳히고 비서의 말을 곱씹었다. 알리지 말라고? 재이가 뭘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건지 의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재이는 보지 못했다. 해준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편두통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른 건?”

-그냥. 상당히 목소리가 좋지 않았던 점 정도…….

“그래요. 고마워요.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모두 말해 줘요.”

해준은 집으로 가는 내내 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금세 평정을 찾고 덤덤한 얼굴로 둘이 함께 사는 집에 귀가했다.

“재이.”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평소 재이는 자신이 들어오는 소리에 쫓아 나오는 게 보통이었다. 물소리도 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자고 있구나. 해준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한 건 내일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하려 그런 걸까.

“…….”

원래대로라면 그냥 서재로 들어갔을 테지만 비서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가 재이의 자는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재이야?”

그의 예상과 달리 침대 위가 텅 비어 있었다. 해준이 곧장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한 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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