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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유학이요. 가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재이의 생각보다 해준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재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거짓말이 많이 늘었네.”

제대로 말도 걸지 못할 정도로 부끄럼을 타면서 이런 말을 하다니. 애지중지 커 왔던 재이가 혼자서 이 상황을 겪겠다고 결심했을 리 없었다.

“거짓말 아니에요. 갈 수 있으면 가야 하잖아요. 갔으면 좋겠어요.”

해준은 한 번도 유학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뜻이 아니기도 했었고, 사고가 나기 전에는 부모님 때문에 생긴 거부감 때문이었다.

함께 등 떠밀려 유학길에 올랐던 부부는 비극을 겪었지만 조부는 아버지의 잘못을 탓하며 전혀 돌봐 주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밀려 버렸고, 실패자로 낙인찍혔다. 그런 부모님을 보고도 어떻게 흔쾌히 갈 수 있단 말인가.

“…….”

재이와 해준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해준은 어딜 가나 존재감을 뿜어낼 정도로 기세가 강했지만 재이는 애써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단순히 응석을 부리는 게 아님을 알려야 했다.

하지만 재이의 생각과 달리 해준의 속내는 난감하고 허탈했다. 이번에도 이 작은 아이에게 맥없이 흔들렸다. 자신의 뜻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조부도 움직이지 못한 마음을 재이는 가능케 한다.

작은 얼굴, 익숙한 눈매, 아직 솜털이 가시지도 않은 볼. 그려 놓은 듯 발그레한 홍조까지. 재이의 아주 어릴 적 모습과 사고 당시까지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는 재이를 처음 봤을 때 어렴풋 느꼈던 생각을 상기시켰다.

너 하나만큼은 끝까지 지킬 거라는 다짐.

“…….”

그는 재이를 잘 알았다. 오빠를 닮은 아이의 밝은 갈색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같이 가자고 하면, 갈래?”

유 회장도 꺾지 못했던 고집은 돌변한 재이 때문에 너무나 쉽게 변했다.

* * *

유 회장은 재이를 데리고 가겠다는 해준의 말을 듣자마자 분개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를 한국에서 썩힐 수 없었다.

유 회장은 얼굴도 모르는 재이가 괘씸해 견딜 수 없었다. 몇 번 넌지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흘려듣기만 했지 걸림돌이 될 줄이야. 곧장 뒷조사를 지시하자 하루도 안 되어 서류 봉투가 대령되었다.

“걔 이름이 뭐라고?”

유 회장이 서류 봉투 속 재이의 사진을 마땅찮은 얼굴로 넘겼다. 부모님의 이력, 사는 곳의 등기부 등본, 유치원 졸업 사진부터 학교 성적까지 아주 세세한 것도 모여진 것이었다. 수행 비서는 덤덤하게 재이를 설명했다.

“안재이라고, 아버지가 IT 기업 창업 멤버로 나름대로 유복한 집 자제였습니다.”

“그래?”

“남매 중 오빠인 안재준 군이 해준 도련님과 절친한 친구 사이셨고, 그 동생이 안재이 양인데 자주 어울려 다녔습니다. 도련님이 외동이다 보니 친동생같이 여기십니다.”

유 회장이 보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 치며 사진을 책상 앞에 내던졌다.

“…어디서 고얀 게 나와 가지고.”

성질 같으면 재이를 인천 바다에라도 던져 버리고 싶었다. 유 회장의 낯빛이 분한 마음에 벌게졌다.

“나가 봐.”

그의 짤막한 명령에 수행 비서는 깍듯한 인사를 남기고 서재를 나갔다. 유 회장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손자에 대한 실망과 우려가 만연했다. 서운함 또한 없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대원의 회장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녀석이었다. 고작 어린 여자애 하나 때문에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는 게 쉬이 납득되지 않았다.

“해준이 어떤 앤데.”

짜증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같잖은 그 아이가 괘씸해 견딜 수 없었다.

하나뿐인 손자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남다른 아이였다. 귀한 외아들이란 허울보다 알맹이가 더욱 금 같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소리는 해준의 이야기였다. 좀처럼 아이 같지 않고 차분한 성정마저 유 회장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아들은 실패작이지만 손자는 달랐다.

“유학을 가신다고 합니다. 단, 함께 사고 난 재이라는 여자애가 있는데…….”

심란한 표정으로 보고하던 비서의 얼굴이 선했다. 마땅찮았지만 별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유 회장은 이런 금쪽같은 자식을 한국에서 썩힐 수 없다는 생각이 여전했다.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유 회장이 턱을 괸 채 심란하게 중얼거렸다. 성정이 곱고 맘이 약해 연민을 느껴 생긴 일이려니 여겨야 했다.

해준과 재이 둘은 결국 나란히 유학길에 올랐다. 비행 소요 시간 열세 시간 남짓. 해준은 옆 좌석에 앉아 잠든 재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앳된 티가 역력한 얼굴. 어릴 때부터 봐 와서 눈, 코, 입 모두 익숙했지만 언제 이렇게 자라 버린 건지 새삼스럽기도 했다. 애틋함에 가까운 이 감정을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

분명한 건 마냥 기쁘진 않았다는 거였다. 그는 한잠에 든 재이를 보며 책임감과 하루아침에 타향만리로 떨어지게 만든 부채감을 느끼기도 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재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아주 어릴 적 아이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내 동생이야. 웃기지!”

새로 태어난 동생을 보여 주겠다며 무작정 자신을 집으로 데리고 간 재준은 마냥 해맑았다. 재준의 부친이 아기 침대에 눕혀져 있던 재이를 안아 들어 꼬마 둘에게 보였다.

“해준이 눈이 동그래졌구나.”

해준은 벼락같이 뇌리에 꽂히던 그때의 기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저씨가 자신을 보고 하는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재이를 보는 순간 느꼈던 건, 전율 같은 긴장과 도무지 듣도 보도 못한 걸 발견한 것 같은 경외감이었다.

속싸개에 싸여 꼬물거리는 생명체가 한잠을 자고 있었다. 해준은 묘한 벅참에 시달렸다. 심장이 파도치듯 울렁이다 못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곱지도 않고 근사하지도 않은 이 작은 것은 순식간에 너무나 특별해졌다.

“……너무 예뻐요.”

그는 운명을 믿지 않는 매정한 소년이었다. 핏덩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허허. 재준이 이놈 자식은 웃기게 생겼다고 난리다.”

“아니요 예뻐요.”

해준은 굳게 결심했다. 아이가 자라 고단한 일에 시달리지 않게 자신이 책임지고 말겠다고. 거대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중압감을 느끼며 해준이 혼잣말하듯 대답했다. 사람보단 짐승에 가까워 보이는 이 작은 생명체를 보는 순간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 자신도 모를 일었다.

* * *

현재.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조용한 세단 안, 멀리서 신발 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곧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리며 주인보다 가방이 먼저 내던져졌다. 명품 로고가 음각으로 은은하게 디자인된 남색의 서류 가방. 가방 안의 여러 파일이 쏟아졌다.

해준은 피곤한 눈을 연신 깜빡이며 운전석에 탔다. 사무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였더라? 대략 계산해 보니 서른두 시간째 깨어 있는 중이었다.

“푸흐.”

한숨인지 푸념인지 모를 것을 뱉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업무용, 일상용 투 폰을 유지 중이지만 어쩐지 업무용 휴대폰만 붙잡고 사는 중이다. 이제야 개인적인 연락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부재중 전화 5통.

메시지 300+

그가 쏟아지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전화를 연결했다. 통화 연결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재이야.”

-어, 어…… 오빠.

여전히 앳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재이였다.

“메시지 이제 봤어. 어디야.”

자동차 시동이 걸리며 짐승 소릴 닮은 배기음이 울렸다. 그러나 그의 신경은 휴대폰 건너편에서 들리는 요란한 음악 소리에 쏠렸다.

-…….

재이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해준이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리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재이를 불렀다.

“재이?”

-아, 나…… 사실 알바 잘렸어요. 아니, 잘렸다기보다는 그만두겠다고 하긴 했는데…… 아무튼 그래서 놀러 나왔어요.

재이는 잠시 뜸 들이다 사실대로 고백했다. 목소리에는 멋쩍음이 가득했다. 부끄러웠지만 해준에게는 어떤 것이든 숨길 수 없다.

“음, 그래?”

해준은 재이의 예상과 달리 전혀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계획한 예정된 결과였으니까. 아이는 집에서 편히 쉬다 자신이 준비한 길을 순탄히 걸어가면 그만이었다. 계획이 생각대로 잘 진행됐군. 그가 다시 물었다.

“친구랑 있어?”

-네. 은지랑 있어요.

“좋아. 언제 들어올 거야.”

-어……. 자정 안으로 들어갈 거 같아요. 아니. 그때는 들어가려구요.

“좋아. 그렇게 해.”

해준은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조수석에 던졌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재이의 긴장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며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커브를 돌자 주차장에서 바닥과 바퀴의 찢어질 듯한 마찰음이 울렸다.

그는 약속 장소에서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후우…….”

그 순간 재이는 한숨을 몰아쉬며 전화를 끊고 돌아섰다. 친구가 자신의 안색을 살피자 조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입가를 끌어당겨 웃어 보였다. 재이가 자리에 앉자 친구가 물었다.

“누구야. 오빠?”

“응. 오빠.”

“야, 난 아줌마 아저씨들보다 오빠가 더 무서워.”

“……나도 쉽진 않아.”

재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함께 산 세월이 웬만한 가족만큼 긴데도 항상 긴장감을 가지게 된다. 정말 친가족이 아니라서 그럴까, 아님 아직도 오빠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걸까.

“이번에 보면 며칠 만에 보는 거야?”

“한 3일 됐나.”

재이가 머릿속으로 혼자 지낸 날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미국에서도 한창 논문으로 고군분투하더니 한국에 온 이후로 이제 집에 들어오지도 못할 만큼 바빴다. 일주일에 한두 번 보는 주도 허다했다.

“거의 너 혼자 사는 거네.”

“그렇지. 괜찮아. 나는 편해.”

재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외롭긴 하지만 3일 만에 들어와 두 시간을 자고는 벌떡 일어나 샤워하러 쫓아가는 남자를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대강의 사정을 아는 친구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재이는 큰 불만이 없었다. 맘은 그렇지 못해도 이해해야 했다. 해준은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미국에서 최선을 다했고 자신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옆에서 지켜봤다. 드디어 한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출근하는 사람에게 응석 부릴 수 있을 리가.

그간의 고생에 보답이라도 받듯 새로운 시작과 함께 해준은 서서히 자리 잡아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재이도 안정감을 얻어 갔다. 이제 둘에게 바쁘지만 탄탄하고 안정감 있는 미래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보기 전까진 그렇게 믿었다.

“야. 저 사람 네 오빠 아니야?”

친구가 뜨악한 목소리로 재이를 다급하게 불렀다. 재이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

자신이 있는 카페의 출입문으로 해준이 들어왔다. 그는 누굴 찾듯 두리번거리다 여자 손님이 혼자 앉은 테이블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반갑습니다.”

재이가 반사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 몸을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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