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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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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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도 무섭지 않다는 대원 그룹. 재계 서열 1위의 이곳은 대한민국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다방면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타 기업에 비해 비교적 청렴한 기업 경영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곳 중의 하나였다. 그런 곳에서도 내부 사정을 파헤쳐 보면 흠은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해준이 오랜만에 시골을 찾았다. 부친의 집이었다.

“어. 이게 누구냐. 우리 해준이 아니야.”

밀짚모자를 쓰고 어깨엔 수건을 걸친 부친은 농사에 여념이 없었다. 겨울 햇살이 만만찮게 따가웠다. 아버지의 얼굴엔 땀이 맺혀 있었다. 해준은 손으로 뜨겁게 쬐는 햇볕을 가리며 웃었다.

“집에 안 계시길래 밭에 와 봤어요. 심은 것도 없는데 왜 나오셨어요.”

“밭 정리 좀 했다. 어휴. 들어가자. 미리 전화를 하지.”

아버지는 어려운 발걸음을 한 외동아들의 등장에 허둥지둥 짐을 챙겼다. 하던 것도 내버리고 올 만큼 귀한 손님이었다.

해준은 도시를 등지고 내려와 이젠 완벽한 시골 사람처럼 보이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본가에서도 잊힌 곳에서 아버지는 서운함이란 없다는 듯 나름대로의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좀 괜찮으세요?”

“괜찮고말고. 그나저나 비가 많이 올 거라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온 둘은 간단히 끼니를 때우며 대화했다. 아버지의 목소리엔 여상스러운 근심이 묻어났다. 아마 아버지는 자신이 사고가 났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너는 별일 없고?”

아버지가 넌지시 물었다. 서울에서 지낼 아들이 기척도 없이 내려온 걸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 해준은 머뭇거리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 서울 집 좀 내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뜬금없는 말에도 자신만큼 유 회장을 잘 아는 아버지는 굳이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자신은 말도 안 되는 짓으로 집안에서 쫓겨났지만 해준은 그럴 놈이 아니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목표를 좇는 대가 곧고 맑은 눈동자. 꼿꼿한 허리와 어깨. 이제 사뭇 성인 남자의 태가 났다.

정권이 바뀔 때가 된 것이다.

시기가 조금 빠를 뿐이다. 아들은 훌륭한 씨앗이지만 아직은 꽃피지 못했다. 누군가 힘을 실어 줘야 했다.

“넌 어릴 때도 뭐 해 달라는 법이 없었지.”

“…….”

“네 엄마가 살아 있을 땐, 우리 둘이서 네 안에 영감 하나 들어 있다고 농담했어.”

부친은 아들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추억을 떠올렸다. 해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유학 중 마약 오남용으로 부인은 죽고, 자신만 살아남았다. 간신히 언론 보도는 막았지만 집안에서 퇴출되었다. 해준이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애만 놓고 가거라. 너 같은 하자는 내 뒤를 이을 수 없어.”

해준은 유 회장의 본가에서 키워졌다. 부친은 서울 땅을 밟을 생각 말라는 유 회장의 엄포와 사별의 슬픔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방황했다. 그렇게 한적한 시골 땅에서 자리 잡은 지는 10여 년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해준은 아버지에 대한 옅은 원망과 큰 연민이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등 떠밀리듯이 올린 결혼과 유학이었다. 아버지는 그의 여리고 소박한 성향에 비해 과격하고 호탕한 조부에게 늘 짓눌려 왔다.

결국 삐뚤어져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지만 그 대가로 아내와 창창한 미래를 잃게 되었다. 아버지의 의견이 존중되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쳐진 아버지를 보며 자라 온 해준은 조부의 권력에 대한 막연한 경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유 회장의 강압적인 명령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회장은 그를 짓누르고 휘두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멀리서부터 지금까지 그를 응원하는 분이었다.

“집 열쇠 챙겨 줄 테니, 해 지기 전에 올라가거라.”

식사가 얼추 끝남과 동시에 부자가 수저를 놓았다. 그의 아버지는 지체하지 않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해준이 말없이 마르고 약해진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재이는 행선지를 알려 주지 않고 외출한 해준을 기다렸다.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되어 버린 거 같았다. 문득문득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가족들의 모습이 생각났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똑똑.

빈 병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재이는 외출을 다녀온 해준인 줄 알고 누웠던 몸을 뒤척였다.

“안녕하세요. 대원에서 나왔습니다. 윤기우 비서입니다.”

“예?”

재이가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정장을 말쑥하게 빼입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유 회장님 아시죠. 제가 모시고 있는 분입니다.”

대원이면 해준의 집안이었다. 당황하여 머리를 정리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소식 들었습니다. 마음고생 많으셨겠어요. 회복은 좀…….”

“오빠가 많이 도와줘서요.”

재이가 두서없이 대답을 하는 와중에 남자는 자연스레 보호자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회장님의 고등학교 동창분이 지금 병원장으로 계셔서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흔쾌히 알겠다고 하시더군요.”

“아예…….”

“씁…….”

비서라는 남자는 공기를 쓰게 마시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비서의 안색을 살피며 긴장했다. 잠시간의 정적을 깨고 비서가 먼저 입을 뗐다.

“아실지도 모르지만, 해준 도련님이 미국에 경영 수업을 들으러 가셔야 합니다.”

“네에…….”

“한국도 좋지만 더 좋은 기회가 있는 거니까요.”

길지 않은 말이었지만 재이는 비서의 용무를 단박에 눈치챘다. 후계자는 할 일이 많으니 적당히 떨어지란 소리였다. 재이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빤 안 간다고 하던데요.”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이 있겠죠.”

“…….”

그게 자신이라는 말이었다. 지금 자신이 해준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놓아달라는 게 그들의 용건이었다. 재이가 조금 막막한 심정으로 침상의 이불을 꽉 쥐었다.

이기적이지만 일가족을 잃은 재이에게 그는 유일한 동아줄 같은 사람이었다. 원래 제 것임이 아닌 걸 알지만 놓기란 쉽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저희 도련님과 돈독한 사이란 걸 압니다. 거두절미하고 한 번만 도와주세요.”

“오빠가…… 원하지 않으면요?”

“원하십니다. 아주 많이.”

비서의 안경 너머 차가운 눈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너 같은 건 감히 넘볼 수 없다는 듯한 엄포가 서린 단호함이었다. 재이는 가만히 듣고 있다 자신이 본 그대로를 말했다.

“그런 말은 안 하던데요.”

“하기 어렵겠죠.”

비서의 단호한 말에 재이는 더 이상 받아치지 못했다.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해준은 여태 가고 싶지 않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으니까. 사고가 나기 전에도 그는 확답을 피하며 고민 중인 것으로 보였다.

비서는 재이를 보며 초조한 속내를 감췄다. 명백한 거짓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원을 끊어 버려도 끄떡도 하지 않는 걸 보며 유 회장은 더욱 분개했다. 이 이상 상황을 악화시킬 수는 없었다.

“도와주세요. 대원을 물려받을 분입니다. 회장님도 무척이나 아끼고 계십니다. 미국에 가지 않는다면 모든 지원이 끊길 겁니다.”

“네?”

재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지원이 끊긴다니. 비서는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진위가 궁금하시다면 직접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어제부로 모든 카드가 중지됐을 거고 혼자 머물고 있는 오피스텔도 정리 중입니다.”

“…….”

재이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리가 새하얘지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내가 오빠를 곤란하게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재이는 해준을 아주 오랫동안 깊이 좋아해 왔다. 남자로서 좋아했고 인간적으로 선망해 왔다. 자신 때문에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빈손으로 홀연히 들어온 줄 알았던 남자는 정장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종이봉투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어른이 준 돈.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얼결에 그걸 건네받았다. 뒤늦게 이걸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건네주려 했으나 비서는 빠르게 병실을 나갔다.

“아니. 저기.”

재이가 뒤늦게 침상에서 내려와 폴대를 끌고 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비서는 해준과 마주칠까 전전긍긍하는 듯 보였다. 손에 든 봉투를 벌려 보자 10만 원권 수표가 두툼했다.

“…….”

재이가 입술을 깨물며 들고 있기도 떨리는 금액의 봉투를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금액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이 문제였을 뿐.

* * *

재이가 홀로 고민하는 중 해준은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사람이 오가지 않던 아버지의 서울 집에 새 단장을 할 생각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자금 흐름과 종잣돈을 계산했다. 여태 모아 왔던 용돈, 어릴 적부터 일찍이 시작해 왔던 투자금, 어마어마한 돈은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근로 소득, 아버지가 챙겨 주신 통장.

“후우.”

다행히 그것만 해도 몇 년을 버틸 수 있을 거란 계산이 나왔다. 그 결론에 도달하자 그는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여태 내내 조부의 권력을 경계하고 거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홀로 선 기분이었다. 지나온 자신이 조금 우습게 여겨지기도 했다.

[정신 차리고 이제 건너갈 준비 해라]

간밤에 조부에게 온 짤막하고 고압적인 문자를 내려다보며 그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절대로 남의 뜻대로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어떤 길이든 자신의 힘과 결론으로 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가 한결 정리된 마음으로 병실에 도착했을 때, 재이가 진지하게 서두를 꺼냈다.

“오빠. 퇴원은 언제 해요?”

“너랑 비슷하게 해야지.”

해준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며 대답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살이 좀 빠진 것 같았지만 오히려 날카로워진 눈초리는 생기를 얻은 듯 생생했다. 촘촘한 속눈썹과 가지런한 눈썹은 그의 눈매를 더욱 드라마틱하고 깊어 보이게 했다.

환자복 소매는 그의 긴 팔다리 덕에 허전하게 올라왔다. 재이는 뒤돌아선 그의 선명한 아킬레스건을 빤히 바라봤다. 작은 부분까지 흠 하나 없이 완벽했다.

어딜 가도 멋있는 사람이다. 저런 옷을 입어도 잘생겼다고 병동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알면 알수록 아까운 사람. 그런 해준의 발목을 붙잡을 수 없었다. 재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하세요.”

“왜?”

“굳이 저 때문에 병원에 있어서 뭐 해요.”

“…….”

해준은 갑자기 달라진 재이의 말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듯 차분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조금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지만 재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예상되었다.

“그리고 전에 했던 말, 취소예요.”

“어떤 거.”

“유학이요. 가는 게 맞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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