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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서울 도심가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난 현장입니다. 경찰의 마약 단속을 피해 승합차를 타고 달아나다 일어난 사고로, 중앙선을 넘어간 차는 일가족이 탄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운전자 a씨와 조수석에 타고 있던 b씨가 현장에서 즉사했고 뒷좌석에 타고 있던 장남 c군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재이가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사고 발생 직후 닷새 만이었고, 가족들의 장례가 모두 끝난 차였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한 아픔을 느끼며 재이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머리맡에는 각종 의료 기기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
2인 병실 안의 옆 침대는 해준의 것으로 보였다. 해준이 줄곧 쓰던 물건들이 협탁에 올려져 있었으니까. 그걸로 재이는 남은 가족들이 무사하지 못했다는 걸 알아챘다. 재준이 살아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함께 있으려 했을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지 사고 직전의 장면으로 유추하면서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을 뿐. 정맥 주사를 마음대로 뜯어 버렸다. 피가 흘러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이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창문으로 다가갔다.
“재이야.”
등 뒤로 문이 열렸다. 해준의 목소리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재이가 난간에 다리를 올렸을 때 해준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 내렸다.
“놔, 놓으라고!”
아까는 나지 않던 눈물이 주룩주룩 비 오듯 흘렀다. 볼을 타고, 턱에 고여 뚝뚝 떨어졌다.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많은 것들이 사라져 있었다.
탄탄대로의 IT 사업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다정하고 많이 배운 어머니, 장난기 많지만 동생에게 끔찍한 오빠는 이제 없었다. 부잣집의 막둥이 외동딸은 천애고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놓으라고, 죽어야 돼. 죽을 거야!”
재이가 안간힘을 쓰며 몸부림쳤지만 해준은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작은 몸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해준은 위로하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소리를 듣고 쫓아온 의료진이 재이에게 진정제를 투여했다. 아이가 울다 지쳐 탈진하듯 잠들었다.
“……괜찮으세요?”
한바탕 난리통이 진정되고, 스테이션으로 나온 해준에게 간호사가 물었다. 재이만큼은 아니지만 해준도 이 현실을 견디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네. 괜찮습니다.”
거짓말이었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람들을 잃었다. 그는 처음으로 유학을 가지 않은 것에 대해서 후회했다. 진작에 재준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까.
차갑고 계산적인 유 회장 집안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화목이란 어떤 건지 재준을 만나고 진짜 가족을 깨닫게 됐다. 말수 없고 무뚝뚝한 자신을 아들처럼 여겨 주신 재준의 부모님, 그리고 형제 같던 자신의 친구를 잃은 상실감은 아주 컸다.
Rrrrrrr-
독자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에 유 회장도 발칵 뒤집혔다. 매일 병문안을 오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오기 일쑤였다.
“여보세요.”
-해준아. 아줌마야. 회장님이 뭐 먹고 싶은 건 없냐고 하시는데.
“괜찮아요. 병원 밥 먹어야죠.”
-회장님은 통원 치료를 하고 집에서 요양했으면 하시던데.
“아니요. 괜찮아요.”
-……지금도 탐탁지 않아 하셔.
해준이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유 회장은 독자가 더 이상 그런 ‘불결한’ 곳에 남아 있길 원하지 않았다. 병원에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긴다는 생각과 떠들썩한 일가족 참변에 엮이지 않길 바라서였다.
오른쪽 뒷좌석의 위치와 간발의 차로 해준은 중상을 면했다. 오히려 사고에 비해 지나치게 양호한 컨디션이었다. 만약 재준과 자리가 바뀌었다면, 자신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준은 입원을 선택했다. 재이 때문이었다. 이제 어린아이티를 갓 벗어난 재이가 혼자서 견딜 리가 없었다. 큰 어려움 없이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자란 탓에 더할 것이다.
해준은 가족의 연락과 비서들의 병문안을 회피하며 버텼다.
똑똑.
“도련님.”
다음 날,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 회장의 수행 비서였다. 무언가를 예감한 해준이 문을 열었다.
“김 실장님.”
“회장님 밑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다 못한 유 회장이 병원으로 직접 행차했다. 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 손을 올렸다. 울다 지쳐 잠든 재이가 있으니 목소리를 낮추라는 뜻이었다.
내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해준은 겸허히 회장을 만나러 병원 내 카페로 갔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
유 회장은 해준을 보자마자 몰아세웠다.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나약한 손자를 못마땅해하는 게 선명히 보였다. 해준은 덤덤히 대꾸했다.
“회복할 때까지요.”
“다 팔자대로 가는 거다. 너는 빨리 회복해서, 유학 준비나 해라.”
유 회장의 성격상 야멸찬 태도를 예상했지만 이런 건 아니었다. 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이라면 그러려니 하며 넘겼겠지만 친구와 그 가족을 잃은 해준은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세 명이나 죽었다.
팔자대로 가는 거라니. 그렇게 여길 수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 그 말을 위로로 하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그게 지금 저에게 하실 말씀이세요?”
“뭐?”
불쑥 튀어나온 원망 같은 말에 유 회장이 벌컥 화를 냈다. 감히 말을 받아치는 해준이 괘씸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는 사내자식이 땍땍거리는 것밖에 못 하냐! 지금도 내 돈으로 먹고살고 누워 있으면서? 뭐가 그리 잘났다고!”
유 회장의 걱정은 그런 것이었다. 가족보다 더 붙어 다니던 친구 놈이 죽고, 그 어린 계집애를 거두겠다고 나설까 봐. 그런 광경이 우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vip 1인실을 쓰라고 해도 굳이 2인실을 고집하질 않나, 통원 치료를 거부하지 않나. 유 회장의 눈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팔자. 팔자 좋네요. 저는 그럴 팔자인가 보죠. 회장님 덕 보며 사는 그런 거요.”
“…….”
꼿꼿하게 대가 곧았지만 이렇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해준의 기세에 유 회장이 말문을 잃었다. 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히 통보했다.
“그리고 재이는 제가 데리고 있을 겁니다. 그게 재이 팔자입니다.”
재이의 거취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재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치료 받으며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해준은 통원 치료를 해도 무리가 없었으나 재이를 위해 더 머물렀다. 낮에는 간병인이, 밤에는 해준이 병실을 지켰다.
“오빠.”
“응.”
“유학 가요?”
“…….”
재이는 해준에게 점점 더 의지하게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도 중심을 지키기 어려웠다. 유 회장이 그에게 유학을 재촉하고 있다는 건 알아챈 지 오래였다. 직원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병원을 오가며 그를 괴롭혀 댔으니까.
해준은 말없이 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해준은 아주 신중히 결정할 문제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거짓말로 안심시킬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학……. 저 때문에 그러는 거면 가도 돼요.”
그리고 어느 날 결연한 목소리에 해준은 재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해준이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덧붙였다.
“정말이에요.”
재이의 눈빛이 산만하게 흔들렸다. 그는 재이를 아주 잘 알았고 그 말은 거짓임이 분명했다. 자신이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재이는 동시에 막막함으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순간 그가 결심했다. 가지 않겠다고.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문제가 아주 쉽게 결정되었다. 죽은 친구를 빼닮은 이 작은 아이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 순간부터 같은 문제에서 해준은 더 이상 긴가민가하지 않았다. 유 회장의 수행 비서를 통해 유학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뜻을 전달했다.
“유학 안 갑니다. 그러니까 기대 말라고 전해 주세요. 한국에서 지내겠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그렇게 해 주세요.”
-혹시 남겨진 친구분의 동생이 맘에 걸리시면 저희가 금전적으로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비서의 예측은 정확했다. 전만 해도 본인이 내키지 않는 게 문제였다면 이제는 도저히 재이를 두고 갈 수 없었다. 돈만 쥐여 주고 떠나기에 아이는 겨우 중학생이었다.
교복을 입은 재이를 보고 이제 다 컸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재이를 봐 왔던 자신에게는 여전히 아이로 보였다.
소식을 들은 유 회장은 해준의 예상대로 가만있지 않았다. 몇 차례 회유에도 먹히지 않는 상황을 지켜보며 유 회장은 점점 심각성을 느꼈다. 결국엔 최종 거절을 했을 때, 유 회장은 손자가 자신의 말을 어기고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란 걸 인정했다.
“안 간다고?”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한번 연락드려 볼까요?”
회장의 서재에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의 눈동자에 참담함과 괘씸함, 분노가 들끓었다.
“……아니. 집이고 차고 한국에 있는 거 죄다 뺏어라. 그게 아직 안 굶어 봐서 그런다.”
“회장님.”
“허허, 내 돈으로 배짱을 부리시겠다는 거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겐 안 통해.”
해준의 결연한 태도에 유 회장이 코웃음 쳤다. 해준과 유 회장의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유 회장은 자신의 결정을 지체하지 않았다. 그간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신이 해준을 얼마나 봐주고 너그럽게 안았는지 절실히 느끼게 해 줄 기회였다.
그 시각 해준은 재이를 위해 병원 내 카페에서 음료를 포장하는 중이었다. 결제하려 카드를 내밀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생전 듣지 못한 말이었다.
“고객님. 카드가 정지됐다고…….”
카드 정지. 해준은 당황하지 않고 다른 카드를 꺼냈다.
“아. 이걸로 해 주세요.”
“네에.”
예상하고 있던 터라 당황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득달같이 손쓰다니. 웬만큼 화가 난 게 아니시군. 그가 유 회장의 속내를 짐작하며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 도련님. 윤 비서입니다.
“말씀하세요.”
-소지하고 계시는 카드 정지됐을 겁니다. 회장님께서 지금 집이랑 자동차 정리하고 계십니다. 차 키는 거주하시는 오피스텔에서 찾았고, 짐은 이삿짐센터에 맡겨 두겠습니다. 원하시면 회장님댁 창고로 넣을까요?
“아닙니다. 모두 센터에 넣어 주세요.”
예상외로 덤덤한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건 윤 비서였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혹시 따로 머무를 곳을 마련하셔야 한다면 저희가 알아볼까요?
윤 비서가 조용히 물었다. 회장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있지만 이제 모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뒤를 이을 해준도 중요했다.
“아닙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지만 해준은 유 회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매달렸다간 영영 옭아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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