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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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쉽게 말했지만 그 시점 이후로 재이는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엔 온통 해준의 유학뿐이었다. 재준에게 터놓고 물어보지 못하니 더욱 답답했다.

재준이 재이의 옆에 따라 서며 계속 말을 걸었다.

“이야. 재이 수지맞았네.”

“…….”

살뜰하고 친근한 오빠인 재준은 재이의 단짝이기도 했다. 오빠와 단둘이 놀이공원이나 교외 카페에 가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왕왕 해준이 함께 놀러 갈 때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떨림을 느껴야 했다.

“오늘 오랜만에 셋이 논다. 야, 이런 건 애인이랑 와야 하는데.”

가장 아끼는 가족과 가장 아끼는 친구의 조합이라니. 기분이 상기된 재준이 입장권을 끊는 내내 너스레 떨며 분위기를 띄웠다. 재이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뚝딱이며 내내 해준을 의식했다.

재준은 그 광경이 그저 우습고 재미있었다. 동생이 해준을 보고 쩔쩔매는 걸 볼 때마다 이해가 되면서도 귀여웠다. 특히나 까불거리는 자신과 달리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며 차분한 해준이 특별해 보일 것이다.

“재이야, 그렇게 좋아?”

“응. 예뻐.”

재준이 어느새 정신없이 아쿠아리움을 구경하는 재이를 따라가며 물었다. 재이의 작은 얼굴에 아쿠아리움의 푸른 불빛과 물결이 어른거렸다.

이번 주도 성공적으로 오빠 노릇을 한 거 같아 뿌듯함을 느끼는 중, 자신과 함께 걷던 해준이 재이를 불렀다.

“재이. 이리 와.”

깊은 심해와 같은 잔잔하지만 깊은 목소리였다. 앞서가던 재이가 놀라 퍼뜩 고개를 돌렸다. 조금 경직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고장 난 로봇처럼 벌떡 멈춰 섰다.

오라는 말과 달리 꼼짝도 못 하는 재이를 보고 해준이 덤덤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무뚝뚝한 말투로 재이에게 손을 뻗었다.

“가만히.”

그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볼 옆쯤에 있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재이는 그대로 심장이 얼어 버릴 거 같았다. 희미하게 좋은 냄새가 났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자신의 입술과 그의 손이 닿을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쉬고서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

셋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얼어 있는 재이도, 신중하게 머리카락을 만지는 해준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재준도 곤두섰다. 셋을 스쳐 가는 다른 사람은 존재감을 잃은 흑백 영화처럼 느껴졌다.

“됐어.”

해준이 항상 그랬듯 짤막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재이는 해준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고맙다고 말했다간 이유 없이 가빠진 자신의 숨을 들킬 거 같았다. 그때 재준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두 사람을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재이야, 저기 가오리 지나간다. 얼른 서 봐!”

재준의 취미 중 하나는 재이의 사진을 예쁘게 찍어 주는 것이었다. 재이가 반사적으로 자세를 고쳐 섰다.

“둘이 같이 서 봐. 찍어 줄 테니까.”

재준이 사진기를 들어 초점을 맞추며 말했다. 해준이 거절의 뜻으로 손을 올리고 물러나려는 참이었다. 어정쩡하게 선 채로 눈치 보고 있던 재이의 머릿속에 기회라는 생각이 스쳤다.

“……오빠.”

이번엔 재이가 대뜸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항상 수줍음을 타서 자신을 붙잡을 거라 예상 못 한 해준은 순간 흠칫했다. 해준이 재이를 내려다보자 찰칵거리며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다.

“이야. 배경이 멋지니까.”

“그만해.”

재준은 해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냅다 한 장 더 찍었다. 재이는 속으로 얄밉기만 하던 재준을 응원하며 이번엔 옷깃이 아니라 손을 잡았다. 당연하지만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너무 완벽해 가끔 같은 사람이 아닌 거 같은 해준도 피가 흐르고 있다니.

“그러니까 똑바로 서라고.”

해준은 재이와 재준을 번갈아 바라보다 할 수 없다는 듯 재이의 옆에 나란히 섰다. 재이는 해준이 그대로 손을 놓을 줄 알았지만 해준은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에겐 친동생 같은 애착이었지만 재이는 아니었다.

“…….”

첫사랑과 손을 잡았다. 재이는 일부러 앞만 보며 어설프게 웃었다. 찰칵, 다시 사진이 찍혔다.

* * *

재이는 아쿠아리움에서 많은 사진을 남기고, 마지막 코스인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별생각 없이 따라 들어가려던 해준을 재준이 붙잡았다.

“너. 오늘은 진짜 돈 쓰지 마라.”

“내가 뭘.”

시큰둥한 대꾸에 재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뭘’이라니. 돈을 그렇게 써 놓고 안 썼다며 발뺌하는 건 무슨 그림인가 싶었다.

재이에게 살갑게 구는 인간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무슨 선물이다 뭐다 바리바리 사 오기 일쑤였다. 이런저런 구실로 작년에만 열 번을 넘게 받았다.

“돈 쓰지 마. 진짜로. 내가 사 주면 돼. 돈 가져왔다 형아.”

재준이 신신당부했지만 해준은 별다른 대꾸 없이 재이를 따라 휙 들어가 버렸다. 재준이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재이는 비즈로 만들어진 키링이 늘어진 가판대에 있었다. 놀러 간다고 용돈까지 받았으니 신나게 고를 일만 남았다. 막내의 특권이란 이런 거다. 어떤 게 좋을까 고심하던 중이었다.

“재이.”

해준이 재이의 옆에 다가왔다. 인기척을 느낀 재이가 시선을 조금 떨구었다. 눈짓으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재준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물어볼까? 말까?

마음은 굴뚝같았고,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몰아세우던 재이가 어렵게 입을 뗐다.

“오빠.”

하. 안 궁금한 척 물어보려 했던 재이의 의도는 필요 이상으로 결연한 목소리에 실패했다. 해준이 여상스럽게 대꾸했지만 재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낭패감을 느껴야 했다.

“왜?”

재이는 괜스레 플라스틱 비즈 키링을 만지작거렸다. 비즈가 부딪쳐 짤깍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재이는 자신이 과하게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지만 좀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없었다. 어렵게 입을 뗐다.

“……정말 유학 가세요?”

“그럴 수도 있어.”

무거운 질문에 비해 그는 쉽고 가볍게 대답했다. 아이의 가슴에 누가 벽돌을 던진 듯 심장이 쿵 하고 아프게 내려앉았다. 놀란 재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간담이 서늘하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언제요?”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건 없어.”

안 가면 안 돼요?

그 말이 재이의 목 끝에서 달랑였다. 갔다가 돌아온다면 모르지만 재이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가 미국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가면 얼마나 있다가 와요?”

“그것도 모르지.”

재이는 해준이 남인 걸 감사히 여겨 왔다. 해준과 결혼할 가능성이란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처음으로 후회가 되었다. 친오빠였다면 가지 말라고 생떼를 쓰고 응석을 부릴 수 있었을 텐데. 손끝이 떨렸고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제가 귀찮게 굴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만약에 유학 가면 저희 잘 못 보겠죠?”

“…….”

재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자 해준의 기분은 심해로 서서히 가라앉는 듯 답답했다. 재이를 기쁘게는 하지 못해도 울리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왔으니까. 재이는 얼굴이 벌게진 채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하지만 굳이 위로하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 중요한 존재였기에 쓸데없는 희망 고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유학, 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왔지만 언젠간 가게 되리라는 걸 안다. 유 회장은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아이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잘 어울리겠다.”

해준은 안간힘을 쓰며 눈물을 참고 있는 재이를 보고 적당한 키링을 하나 골랐다. 재이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계산대로 먼저 떠났다.

아쿠아리움에서 나왔을 때도 재이는 멍한 기분이었다. 드라마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캐릭터가 넋을 빼놓은 게 이제야 이해가 됐다. 중학생의 재이에겐 일생일대의 위기였고 해준은 그녀의 전부였다.

재준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을 눈치채고 분위기를 띄우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셋을 데리러 온 차가 앞에 섰다. 조수석의 창문이 내려가고, 재이의 어머니가 함박웃음 지으며 물었다.

“우리 강아지들 재미있게 놀았니?”

“엄마. 이따 집에 가서 재이 사진 찍은 거 봐봐. 내가 또 기똥차게 찍어 놨어.”

재준이 대꾸하며 차에 탔고, 재이와 해준도 뒤이어 탔다. 재이의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며 연신 해준을 칭찬했다.

“해준이는 어쩜 셔츠가 그렇게 잘 어울리니?”

“아, 아들도 셔츠 입었잖아 엄마.”

“해준이도 우리 외식하는 데 같이 가서 먹자. 괜찮지?”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녁에 과외 수업이 있어서요. 다음에 괜찮을까요?”

재이가 해준을 눈으로 흘겼다. 그러게 돈도 많으면서 왜 과외를 한다고 고생하는 거야. 해준은 방학 내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노는 것도 질려서 시작했다는 과외는 입소문을 타서 예약을 받을 정도였다.

“방학이 아까울 텐데 기특하구나. 어디로 태워 줄까 그럼.”

재이의 아버지가 해준에게 물었다.

“역 앞에 내려 주시면 바로 옆에 아파트가 있어요.”

재이네 집에서 해준은 아들과 다름없었다. 오히려 묵묵한 성격에 장남처럼 굴 때도 많았다. 차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담소가 오고 갔다. 해준이 제 옆에 앉은 재이를 보며 귀띔했다.

“재이야. 벨트 매.”

재이가 창밖을 보고 있다 해준의 말에 주섬주섬 벨트를 챙겼다. 재준이 그랬다면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해준이라면 다르다.

“그래서 저녁 뭐 먹으러 가는데?”

재준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였다. 반대편 차선에서 승합차가 튀어나왔다. 전혀 제어가 안 되는 듯 역주행하며 질주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어, 어억!”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재이의 아버지가 급커브했지만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이미 늦었다. 해준은 그 순간 가운데 앉은 재이의 머리를 제 팔로 감쌌다.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차가 부딪치는 굉음이 서울 시내 도로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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