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2/70)

02

오늘은 1년 중에서도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한 해를 정리하고 신년을 기념하기 위한 가족 모임이 있으니까. 매년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다. 세월이 지나도 공고한 집안의 규칙 중 하나였다.

복도를 지나 식탁까지 당도할 때까지 그의 조모는 해준을 연신 걱정했다. 두서없는 이야기가 넘나들었으나 결론은 하나였다.

유 회장의 눈 밖에 나지 말라.

“안녕하십니까.”

유 회장이 없는 식탁에는 이미 일가친척까지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상석은 비어 있었지만 벌써부터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회장이 가장 아끼는 해준이 등장하자마자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표정 변화 없이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

해준은 급하게 오느라 갈증이 났지만 참았다. 잔에 든 물을 단숨에 들이켤 수 있지만 식사가 시작될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맘처럼 행동했다간 자신이 긴장했다고 생각해 얕보기 십상이다.

이곳은 그런 자리였다.

고상한 생화로 꾸며진 식탁, 그 위에 돈 주고도 못 구하는 디너웨어 컬렉션이 오직 이 식사 한 끼 때문에 놓여 있었다. 위에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이 올라와 있고, 덕담과 칭찬이 오고 가지만 막상 밑에서는 칼부림이 나는 곳. 언제 어디서 날카로운 것에 찔릴지 모르니 맘 편하게 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켤 수 없다.

“해준이는 날이 갈수록 잘생겨지는구나.”

“아닙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작은 아버지가 해준을 보고 칭찬했다.

“우리 윤재도 이런 데도 와서 형 좀 본받고 그럼 좋을 텐데.”

작은 아버지의 말에 해준이 멋쩍게 웃었다. 사고뭉치인 사촌들과 달리 그는 적통의 자질이 훌륭했다. 해준이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사촌 동생을 언급했다.

“윤재는 바쁜 모양이네요.”

해준의 말에 작은 어머니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말도 마라…… 어휴.”

모두 가벼운 대화만 이어 나갈 뿐 선뜻 물 잔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긴장감과 무거운 마음 사이로 회의감이 솟을 즘, 유 회장이 다가왔다.

“회장님.”

마당에서부터 허리 숙여 인사받으며 들어온 가족들은 이번엔 식탁 의자에서 일어나 유 회장을 맞이했다. 해준도 일어나 그의 조부를 맞이했다.

“올해도 빠짐없이 모였구나.”

안 본 사이 더 나이 들어 버린 힘없는 노인이었지만 눈빛 하나는 여전히 형형했다. 오히려 삶의 관록이 쌓여 날 서고 노련해진 눈빛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 같은 압박감이 들곤 했다.

“들자.”

짤막한 두 글자는 시작을 알렸지만 명령과 다름없었다. 거실에서부터 부드러운 재즈 음악이 들려왔다.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은 그제야 애피타이저를 맛볼 수 있었다.

유 회장의 취향과 속도에 맞춘 메뉴들이 식탁을 빼곡히 메웠다. 식구들은 요령껏 식사하며 유 회장의 질문에 따라 자신의 근황을 밝혔다. 당장 사람을 다그칠 것 같은 유 회장도 너그러이 새해 덕담을 건네며 지나온 한 해를 위로했다. 마지막으로 해준의 차례가 다가왔다.

“해준이는. 유학을 가야지.”

유 회장의 말에 해준의 나이프가 멈췄다. 무슨 말에도 수긍하기 바빴던 식구들과 달리,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식탁 위에는 불길한 정적이 흘렀다. 유 회장은 해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내 해준은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유학도 좋지만 한국에서도 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못 박은 대답이었다. 거절보다 거역과도 같은 무모한 언행에 유 회장은 놀라지 않고 의미심장한 한숨을 내쉬었다. 해준의 조모는 사색이 되어 맞은편에서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굳이 수습하지 않았다.

“저번부터 주저하는 거 같던데.”

“…….”

“이유가 뭐냐? 계집애라도 숨겨 뒀어?”

유 회장이 느릿하게 따졌다. 해준은 문득 자신도 모르게 작고 하얀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얼른 머릿속을 가다듬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회장의 선택은 곧 그룹의 운명이었다. 평생 유 회장이 일궈 온 일부분을 이어받고 싶다면 전적으로 그 뜻을 따라야 했다.

“항상 누누이 말하지만 뒤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든 조용히 끝난다면 관심 없다.”

단순하고 정직한 해준의 의중과 달리 유 회장은 전에 없던 돌발 행동을 하는 특별한 이유를 찾았다. 해준은 굳이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고 싶지 않아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을 만큼 막대한 부가 가치를 창출해야 해. 평범한 건 이 집에서 미덕이 될 수 없어. 내 평생 그런 걸 좇아 본 적도, 바란 적도 없다.”

“네.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격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치겠다.”

선례가 존재하는 명백한 경고였다.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말을 듣고 해준의 얼굴이 좋을 수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으나 안간힘을 쓰며 충동을 억눌렀다.

결국 식사는 참담한 분위기로 서둘러 끝났다. 남은 식구들은 조금이라도 유 회장과 대화를 섞으려 노력했지만 해준은 아니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들어가 봐라.”

해준의 말에 유 회장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해준은 더 이상 이 집에 있다간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울 거 같아 발길을 뗐다. 그를 배웅하러 나온 조모가 허겁지겁 붙잡았다.

“해준아……!”

그녀는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 유 회장에게 용서 구하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해준에게는 그럴 자존심도 남지 않았다.

“추운데, 들어가세요.”

해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싸늘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눈송이가 그의 정수리와 옷에 내렸다. 조모는 쩔쩔매며 해준에게 붙은 눈을 털어 주면서 달랬다.

“아니. 지금 추운 게 문제가 아니잖아. 집에 가서 전화라도 드리렴. 어?”

“생각해 볼게요.”

“그게 생각해 볼 일이니. 너 정말 왜 그래. 해준아. 해준아!”

해준은 조모를 뿌리치고 돌계단을 내려왔다. 등 뒤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해준을 기다리고 있던 수행 기사는 예상보다 빠르게 나온 그를 보고 조금 놀란 듯했다. 해준은 별다른 말 없이 달리는 차 안에서 가만히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찌감치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된 차창 밖을 보며 해준은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에게 본가는 끊임없이 시험에 들어야 하는 무대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집에서 쫓겨난 후 자신을 변변찮게라도 변호해 줄 어른 하나 없이 맨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기사님.”

“네. 도련님.”

“개 키워 보셨어요?”

굴지의 기업 대원의 독자를 태운 수행 기사가 냉큼 대답했다. 해준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평소 부담 없는 차림을 선호했지만 오늘은 날인 만큼 격식을 갖춰 입은 터라 영 편하질 않았다.

수행 기사는 생각지 못한 질문에 의도를 가늠하듯 뜸 들이다 대답했다.

“집에 한 마리 있습니다.”

“어떤가요?”

“강아지 한 마리 데려오시려고요? 제가 여태 강아지 두 마리를 하늘로 먼저 올려 보냈는데…….”

“…….”

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흐르다 끊겼다.

“무릇 동물이란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와 같은 거 같습니다.”

“쉽지 않겠네요.”

“보람도 있죠. 하지만 책임도 많고요. 무엇보다……. 보낼 때가 힘들죠.”

“그러게요. 수명이 짧으니까.”

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걱정도 그런 거였다. 돈과 책임감은 그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맹목적으로 자신만을 믿어 주고 의지하는 존재가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오래 살 존재.

그런 존재 딱 하나만 있다면 이 외로움도 견딜 수 있을 거 같았다.

* * *

재준과 해준은 퍼즐 같은 관계였다. 서로 모양은 정반대지만 빈틈없이 딱 맞는 것처럼, 성향과 기질은 달라도 맞춘 듯 훌륭한 조합이었다.

어느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친구.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닮은 구석 하나 뾰족하게 없지만 마음의 정도로는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가족보다 의지되는 때가 왕왕 있을 정도로.

고교 시절에도 영혼의 짝으로 유명하던 두 남학생은 나란히 같은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모두 훌륭한 성적으로 최고의 대학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둘은 각자 연애를 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했으나 결국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시민권자인 해준에게 조부는 미국 유학을 권했다.

“야. 그래서 그 이야기는 어떻게 됐는데?”

재준과 해준이 아쿠아리움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냥 안 간다고 질렀지.”

“미친놈…….”

재준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친구를 심란하게 바라보다 물었다.

“나도 따라갈까?”

“무슨 소리야.”

“아니. 너 혼자 가기 싫은 거면 나도 같이 가 줘?”

“됐어 인마. 난 그냥 한국이 편해.”

재준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디에서 뭘 해도 잘할 놈이었지만 해준은 자신의 입지를 현상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아까운 인재라면 유 회장의 눈에는 더할 것이다.

“오빠!”

멀리서 재이가 달려왔다. 재준의 하나뿐인 여동생 안재이. 아주 예쁜 건 아니지만 새침한 인상은 누가 봐도 재준과 닮아 있었다. 마르고 뼈가 가는 체형 탓에 몸이 약해 보이는 아이였다. 새하얀 얼굴은 핏기가 없어 보일 정도였다. 재준이 손을 흔들며 반겼다. 재이가 두 명의 소년 앞에서 숨을 고르며 해준을 힐끔거렸다.

“오빠, 엄마가 다섯 시까지 나오라고. 그때 나오면 된대.”

재이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두서가 없고 들떠 보였다.

“너 어딜 보고 말하는 거야.”

낄낄거리며 동생을 놀리는 재준에게 재이가 눈을 흘겼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 재이는 해준을 좋아했다.

“재이 오랜만이네.”

재이는 해준의 말에 그를 힐끔 바라봤다. 해준은 친절했지만 먼저 다가오지 않았고, 나서서 다정하게 챙겨 주진 않았지만 자신을 늘 한결같이 대했다. 이번에도 자신을 보며 인사하더니 그뿐이라는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알고 지내며 상냥하게 대해 주는 것조차 특별한 대우라는 걸 알지만 재이는 항상 그가 아쉬웠다.

훤칠하다 싶은 오빠와도 비교되지 않는 연예인 같은 외모. 자신이 상상했던 어른의 모습보다도 단단하고 쭉 뻗은 직각 어깨. 동그란 뒤통수와 목덜미를 따라 곧게 뻗어 내려오는 허리까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재이가 가방을 멘 것을 보며 재준이 넌지시 알은척했다. 해준이 몇 년 전 재이의 생일에 선물해 준 가방이었다.

“너 일부러 멨냐 그 가방.”

“……아니거든.”

정확한 사실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틱틱거릴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이제 겨우 중학교에 들어간 재이는 때 이른 사춘기가 다가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재준은 어이없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삐죽였다.

“쟤 저거 아까워서 평소엔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살아. 내가 준 건 없어져도 모르고.”

“아냐.”

재이가 항변했으나 그마저도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였다.

“아니기는. 너 이제 해준이 유학 가면 어떡할래.”

“어?”

청천벽력 같은 말에 재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재준이 낄낄거리며 동생을 놀렸다.

“미국 갈 수도 있어. 너 나중에 후회 말고 얼른 친해져 놔라.”

재이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당사자를 쳐다봤지만 해준은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반응 따위는 개의치 않는 모습에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정말 가 버릴 거 같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고개 한 번 들지 않는 남자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재이가 투덜거렸다. 일단 후퇴다. 먼저 아쿠아리움 쪽으로 돌아서는 재이의 귓바퀴 끝이 붉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