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재이는 제 방 책상 앞에 앉아 한참을 고심했다. 도대체 그와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남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애가 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골똘히 생각해 봐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서 불쑥, 오기가 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그 잘난 면전에다 뱉어 버리겠다고.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전 포고를 하겠다고. 재이는 제 방을 박차고 나갔다.
단숨에 해준의 서재로 들어갔다. 서류를 검토하던 해준이 고개를 들었다. 모델에 견주어도 모자랄 것 없는 외모였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입체적이었지만 담백하고 날카로웠다. 가로가 긴 시원한 눈매와 짙은 속눈썹은 깊은 눈매를 만들어 주었다. 매끈하게 잘생긴 얼굴은 강인함과 분명함이 감돌았다.
“나 오빠랑 결혼할 거예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에 그리 놀라지 않은 듯 덤덤히 지적했다.
“안 돼. 그리고 아저씨라고 해야지.”
“……뭐가 안 되는데? 그럼 아저씨랑 결혼할 거야.”
“그거도 안 돼.”
“왜 안 돼요?”
“난 너랑 결혼하지 않을 거니까. 엄밀히 말하면 불가능한 일이지.”
철옹성같이 단단한 남자였다. 나이가 차면 될 거라 기대했지만 그는 전이나 지금이나 어림도 없다는 듯 자신을 대했다. 그가 자신의 말을 단순히 어깃장으로 여길까 봐 우려한 재이가 진심을 표했다.
“아저씨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잖아요. 30년, 40년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살 거예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하고 가장 헌신할 수 있어요. 아저씬 내 마음 이용하면 되잖아요.”
“설득력이 떨어져. 굳이.”
“굳이요? 하……!”
재이의 얼굴이 벌게졌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욕 한마디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보잘것없는 것인 양 취급하며 아주 강력한 입장 표명을 할 수 있는 단어. 굳이.
그는 재이의 절절한 마음을 단 두 글자로 짓뭉갤 수도 있는 남자였다.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사업에 보탬이 될 수 있고 배신하지도 않는다구요. 사는 데도 내가 가장 편하게 해 줄 수 있고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어. 이미 우리 그래 왔고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왜 굳이 아닌 길을 가려고 해요? 왜?”
“일은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자신의 구구절절한 설득에도 그는 시종일관 짤막한 거절을 내놓았다. 의중과 진심을 알기 힘든 간결한 태도에 약이 올라 미칠 거 같았다. 자신과 독대할 기회도 쉽게 주지 않는 그가 미웠다. 재이가 입을 삐쭉이다 미운 충동이 가득한 말을 폭탄처럼 터트렸다.
“키스도 잘할 수 있어요.”
“뭐?”
내내 서류만 들여다보던 해준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재이는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연이어 그를 자극했다.
“잠자리도. 내가 가장 잘할 자신 있다고요.”
“…….”
서재에 터질 거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섹스요.”
재이가 그를 도발하듯 다시 한번 자극적인 단어로 되짚었다. 아무리 그와 이야기해 보려 해도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으니, 쿡쿡 찌르며 자극할 수밖에.
“나랑 하기 싫어요?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
도발적인 재이의 말에 해준은 잠자코 그녀를 쏘아봤다. 위압감이 깔린 눈빛은 화가 난 건지 동의한 건지 모호했다. 단 하나 분명한 건 등골이 오싹거릴 정도로 그에게 끌린다는 것.
“한 번도, 단 한 번도 나랑 하는 상상, 해 본 적 없어요?”
막연하고 낙관적이었지만 그와 재이 둘 사이에서 흐르는 침묵이 긍정의 뜻으로 느껴질 때쯤이었다. 매번 그랬듯 해준은 재이의 기대를 박살 냈다.
“넌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
“네?”
“젊을 때 좋다고 쪽쪽거리다 알뜰살뜰 평범하게 나이 들어 가는 거. 그런 걸 기대하고 이러는 거야?”
“…….”
그래, 재이가 바란 건 그런 거였다. 큰 기대도 바라는 것도 없는데 왜 그의 말에 죄라도 지은 것 같은지. 감히 넘볼 수 없는 걸 넘본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해준은 그런 힘이 있었다.
“대한민국 남성 기대수명 80.3세. 여성 86.3세. 우리가 같은 나이라도 넌 통계적으로 6년이란 세월을 혼자 보내야 해. 남들은 네 상상처럼 뒷산으로 등산 가며 늙어 갈 때 넌 짐 싸 들고 요양원이나 들락거려야 한다는 말이지. 젊을 적 잘 벌고 멋들어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기저귀 찬 채 와이프는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런 늙은이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
“당연히 내가 먼저 죽겠지. 난 내가 남들보다 덜 자고 덜 먹으며 일해 놓고서 무병장수하길 바라진 않는다. 그건 욕심이야. 그럼 너는?”
“난 상관없어요. 내가 괜찮다잖아요.”
“노년기에 홀로 남게 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야. 좆같은 일을 당해도 화내면서 달려올 남편 하나 없는 거지. 주변 노인네들이 주책스러운 희롱을 해도 어디 가서 이를 남편이 없어. 쉽게 말해 인생을 즐길 때쯤엔 실컷 고생하다 돈으로도 위로 안 되는 외로움에 사무쳐 산다는 말이야.”
“……우리가 지낸 세월이 있는데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해요? 추억하면서 살면 되잖아요.”
“안재이. 그래서 안 된다고.”
다가오지 말라는 듯 단호한 어조였다. 한 번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을 내친 적이 없었다. 재이가 벙한 채로 그를 쳐다봤다.
“네가 손해 보지 않으려 똑똑하게 굴면 또 모르지. 쇼핑이라도 좋아해 내가 남긴 돈으로 벅차게 행복할 거라면 모른다고. 남자라도 즐기는 애였으면 또 모른다. 새파랗게 어린 네가 내게 물불 못 가리고 헌신하면 뭐가 남을 거 같아. 죽을 때까지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싶어?”
해준은 이제 좀 납득하겠냐는 듯 재이를 바라봤다. 잘못된 선택에 뻔한 미래가 두렵지 않으냐고 묻고선 재이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재이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묘한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아쳤다.
“아니. 나도 같이 따라 죽을 거예요.”
“…….”
단지 홧김에 튀어나온 말이 아닌 걸 해준도 알고 있었다. 재이는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우리 그런 사이잖아요.”
결연함이 그녀의 말에 배어 있었다. 해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 * *
12년 전.
차창 밖으로 한낮의 거리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문에 기대어 턱을 괴고 있는 해준의 얼굴이 창에 비쳤다. 소년과 남자 사이의 해준은 얼굴에 앳된 기가 남아 있었고 매끈한 이목구비는 세월이 흘러도 시들 거 같지 않았다.
생장미가 연상되는 소년이었다. 그것도 풀이 푸릇한 검붉은 장미. 누구나 탐낼 듯한 외모에 존재감이 빛났지만 쉽게 손댈 수 없는 위험한 소년.
세단은 대대로 정재계 인사들의 단독 주택이 있는 부촌에 들어섰다. 넓은 도로의 양옆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담장은 성곽을 연상케 했다. 해준이 탄 세단은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높은 지대로 올라갔고 다시는 열리지 않을 거 같은 튼튼한 대문 앞에 멈췄다.
대원 그룹의 유 회장이 주로 지내는 단독 주택이었다. 규모는 사실상 저택에 가까웠다. 높은 지대에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며 수도의 기운을 받는 절묘한 위치였다.
“여전하네.”
해준이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중얼거렸다. 유 회장의 저택은 단순히 그 크기를 제외하고도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흘렀다. 혹자는 화강암 지반을 깎고 들어선 거라 그 살기가 바닥에 흐르고 있다고 했다.
처음 유 회장이 집터를 보며 풍수지리 전문가를 불렀을 때, 기에 눌리게 되면 3년 안에 망하고 야반도주할 것이라 했다. 그 이야기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유 회장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코웃음을 쳤다.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실제로 대원 그룹은 3대가 넘도록 승승장구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유 회장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무릇 그룹의 수장이란 피도 눈물도, 측은지심도 잊고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유 회장의 아래에서 스물한 살의 유해준도 배턴을 넘겨받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저 왔어요.”
해준이 들으란 듯 중얼거리며 돌계단을 올라갔다. 아름다운 조경으로 잘 관리된 정원이 그를 맞았다. 촘촘한 잔디는 물론이고 나무와 꽃은 보름마다 오는 국내 정상급 정원사의 손길을 거쳐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 중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해준에게 아무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기다리고 있던 관리인들이 허리 숙여 공손히 인사하며 그를 맞았다. 그의 할머니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반겼다.
“우리 강아지!”
“도련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뵙는 거 같네요.”
해준은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다정한 말투로 응수했다. 그런 한결같은 모습에 저택에선 해준의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다. 관리인과 직원은 하나같이 그를 그룹을 이끌어 나갈 재목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그러나 그 한결같은 모습은 본가에 들락거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하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밟고 있는 것이 잔디가 아니라 살얼음처럼 느껴진다는 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빙상에 발끝으로 서 있는 듯했다. 해준은 강해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일관된 태도로 행동했다.
“회장님이 오늘 컨디션이 안 좋으셔.”
조모는 웃는 낯을 하고서 그를 집 안으로 안내하고 있었지만, 귀띔하는 목소리는 그다지 밝지 못했다. 해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무슨 문제라도.”
“말도 마라. 아침부터 이유 없이 밥상을 세 번이나 물리며 난리였단다. 노친네 언젠 이유가 있어서 그랬니.”
유 회장의 성질머리를 익히 알고 있는 조모가 혀를 내둘렀다. 해준은 그 광경을 상상하며 한숨을 삼켰다. 오늘 식사 자리는 호락호락하지 않겠군. 해준은 무슨 말이 날아와도 겸허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실수하지 마라.”
“그럼요.”
조모의 당부에 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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