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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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정말 여긴 너무 더워요.”
“전에는 추운 것보다 더운 것
이 낫다면서.”
“모나차르트에 너무 익숙해졌나
보죠.”
입술을 삐쭉 내민 미샤에게 손
을 내밀자,그녀는 언제 불만을
토로했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미샤가 내 손을 잡으려
던 순간,그녀보다 더 빨리 내 손
을 잡아챈 이가 있었다.
“이것만큼은 양보하기 어려워
서.”
체격 차이를 이점 삼아 태연히
날 품에 안은 블러쉬가 가볍게
웃었다.
나는 한소리를 하려다가 부드
럽게 휘어진 눈매에 빠르게 포기
를 선언했다.
하여간 내가 본인에게 약하다
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단 말이지.
“아가씨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더 신경 쓰는 겁니다.
바로 고쳐지는 물건과 달리,아직
회복 중이셔서.”
블러쉬의 변명이 무색하게 내
가 깨어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
어가고 있었다.
애당초 부상이 심했던 건 내가
아니라,블러쉬 쪽이기도 했고.
“도대체 매번 왜 그런 꼴로 오
는 건지.”
막사로 들어가자마자, 우릴 발
견한 황태자가 대뜸 얼굴을 구겼
다.
물론 블러쉬는 그런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앉을 자리
를 봐줄 뿐이었다.
“환자는 조심해야죠.”
“그놈의 환자 소리는 언제 안
듣게 될는지 모르겠군.”
“아마 한참 더 써먹으실 겁니
다. 붙어있기 좋은 핑계치 않습니
까.”
황태자의 불만에 시비스가 짧
게 말을 덧붙였다.
수도 복귀 문제로 모나차르트
에서 불렀던 건데,황태자와 엮이
는일이 많아지면서 종종 반쯤
저쪽으로 넘어간 것처럼 굴곤 했
다.
“부러우시면 결혼하시면 됩니
다.”
처음에는 부끄러웠는데 이것도
반복되니 내성이 된다.
나는 블러쉬 못지 않게 뻔뻔하
게 낯을 들이밀며 씨익 웃었다.
사실 아직도 부끄럽긴 하지만,
약간의 부끄러움만 감수하면 당
당히 애정 행각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전 안 부럽습니다.”
“하여간 뻔뻔한 건 달라지질
않는군. 부부가 쌍으로 문제야.”
“우리 아가씨는 문제 아니거든
요! 문제 있는 건 대공뿐이라고
요!”
주요 인사들이 모인 회의치고
는 시끌벅적하지만,계속 반복되
니 일상처럼 느껴진다.
나는 소란 속에서도 태연히 서
류를 집어 들었다.
워낙 제국 내의 피해가 큰 터
라, 복구도 복구인데 피해 규모조
차 다 파악이 되지 않고 있었다.
“계속 확인했지만 역시,수도의
복구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아요.
정세가 안정화되면 조금 낫겠지
만,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
서는 수도에 모든 걸 부을 수 없
어요.”
“수도는 제국의 중심이야. 포기
는 어려워.”
“그럼 사람들에게 선택하라 하
죠. 언제 복귀될지도 모를 수도에
머물 것인지,아니면 그나마 기반
이 나은 타지역으로 이민하고 싶
은지요.”
“그래도 수도를 지키고 싶으시
다면 지키세요. 말리지 않을게
요.”
내가 으름장을 놓듯 씨익 웃자,
황태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애당초 수도 복구가 어렵다는
사실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지?”
“마침 주인 자리가 빈 곳이 있
잖아요.”
“나 보고 오르젠타 대공이라도
되라는 건가.”
“뭐,비슷하긴 하죠,”
“비슷?”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
차린 건지 황태자의 표정이 일그
러 졌다.
과거의 제도가 부활하면 가장
손해를 보는 건,현 황실의 후계
자인 그였다.
황제가 죽은 이상,그가 새 황
제로 추대될 것이었다.
“원래 제국에 황실은 존재하지
않았잖아요. 다섯 가문 중 가장
뛰어난 이를 황제로 추대해 이끌
게 했을 뿐이죠.”
“과거의 제도를 부활시키겠다?
내가 그걸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
하나?”
"이름뿐인 황태자께선 당연히
그러셔야죠.”
나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채,
황태자를 응시했다.
지금껏 나름 황태자와 잘 지내
왔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순 없
었다. 우리는 슬슬 서로가 적인
지,아군인지 구분해야 했다.
“무례하군.”
“더 무례해질 수도 있어요. 예
를 들면, 저는 선황제를 누가 죽
였는지에 대해까지 논의할 수 있
거든요.”
"그 문제에선 그대들도 자유로
울 수 없을 텐데.”
“그렇다면,한 번 제대로 논의
해볼까요? 누구에게 얼마나 책임
이 있는지 정확하게 비율을 나눠
보는 거예요.”
나를 노려보던 황태자가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배신당했다는 듯 짐짓 막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는 미안
하나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완전
한 같은 편이 아니었을뿐더러, 아
주 잠깐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이것까지 계산했나?”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원래 내 목적은 블러쉬를 황제
로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과거의 제도를 부활시키고,돌
림병 치료제로 얻어낸 신임을 바
탕으로 새로운 황제가 된다.
거기까지가 내가 짠 계획이었
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 행
해지진 않았다. 달라진 것도 있었
다.
“기존 황실을 소멸케 하는 대
신,과거처럼 5대 가문에서 황제
를 뽑을 겁니다.”
“황실이 배제된 5대 가문이 가
능한가?”
“새로운 5대 가문에는 요정이
포함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요정 같은
건 옛이야기 아닌가.”
“지금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건 요정 중 하나인 엘프입니다
만.”
“그건……
내 지적에 혀에 찔린 황태자가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
며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엘프는 일부에 불과합
니다. 세상에는 그들 말고도 잠적
한 무수한 요정들이 있거든요. 저
는 앞으로 그들을 양지로 끌어들
일 겁니다. 인간과 동등한 입장에
서 살게 하고,함께 공존하게 할
겁니다.”
“그런 게 가능한 것 같은가.”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죠. 혹시
모르잖아요. 요정 중에서도 황제
가 나올지도.”
멀리서 거리를 두면 둘수록 서
로가 낯설고,다르게 느껴질 것이
다.
요정과 인간이 가까워지기 위
해선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되게 할 거예요. 왜냐하
면,이제 추는 저희에게 기울었잖
아요? 그리고, 권력은 이럴 때 쓰
라고 있는 게 아닌가요?”
나는 보란 듯이 거만한 손짓으
로 홀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동안 움츠려있었지만, 이번
일로 세력은 완전히 뒤집혔다.
머리를 잃은 오르젠타는 폭동
으로 얼룩져 자멸했고,황실은 중
심이던 수도를 잃었으며,두 세력
에서 이리저리 재던 펠라시온과
말리그테는 아직도 눈치만 보고
있었다.
결국 이 끔찍한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건 모나차르트 뿐이었
다.
과거 제도가 부활해 새 황제를
뽑게 된다면,당연히 블러쉬의 몫
이 될 것이었다.
“좋게 말할 때,적당히 받아주
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악독한 계획을 준비하게 될 것
같거든요.”
“……모나차르트 대공은 참 악
독한 여자를 아내로 들였군.”
“그게 매력이거든요. 그리고,
특히 제 사람에게는 각별한 편이
라.”
“얌전히 손잡고 아군이 되어
라?”
“이해가 빠르셔서 좋군요.”
“아내만 못된 게 아니라,남편
부터가 문제군.”
“그래서 싫으신가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
다.
황태자는 나를 노려보다가 이
내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
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지. 과
거의 제도를 끌어오려면 설득해
야 할 이가 한둘이 아닐 테니."
“물론 그래야죠.”
“대신, 방심하진 마. 과거대로
황제를 선출하면,그만큼 끌어내
리기도 쉽다는 걸. 건방 떨다간
가장 빨리 황위를 넘겨준 황제로
기록될 수도 있어.”
“신경 쓸게요. 황태,아니. 이젠
이건 쓰이지 않을 테니 다른 호
칭을 생각해봐야겠네요.”
“텐즈 폰 필시온.”
“이딴 식으로 통성명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부를 이름은 필
요하니까.”
"그럼 저도 다시 인사해야겠네
요. 특히 이번에는 정식으로 인사
한 만큼 제대로 손을 잡을 수 있
겠죠.”
내가 악수하고자 팔을 뻗자, 블
러쉬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건
양보 못 한다고.”
“하! 정말이지, 저 꼴을 보기
싫어서라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회의를 끝내야겠어.”
황태자,아니 텐즈는 짜증을 내
며 테이블을 툭툭 쳤다.
하지만 딱히 걱정은 없었다.
제 이권을 놓치기 싫어 떨떠름
한 표정을 지었지만,애당초 텐즈
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내는 아
니었다.
그걸 알기에 그동안 그와 오랫
동안 회의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지웠던 웃음을 다시 지어
보이며 텐즈에게 보던 서류를 내
밀었다.
앞으로 이어질 회의는 꽤 길
것이었다.
“회의는 무사히 끝나셨습니까?
부탁하신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ᄑ e ᄉ 티 이 人f”
나는 반가운 얼굴에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실제로 따지면,그가 나보다 훨
씬 나이가 많겠지만 그걸 인지하
면서도 마음은 전혀 다르게 흘렀
다. 내가 새로 태어나게 한 생명
들이라 그런지 두 생명 다 부모
의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막상 블러쉬는 프로스트에 대
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별 감흥
이 없어 했지만.
“잘 다녀왔나?”
“네,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사정이 있긴 했어도 그래도 형
제였는데,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했던 나의 생각과 달리 블러쉬와
프로스트 사이는 바뀌지 않았다.
분명 둘 다 서로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음에도 내색하지 않았
고,딱히 관계에 변화를 주지도
않았다.
둘은 그저 예전처럼 각별한 군
신 관계를 유지할 뿐이었고, 그래
서 나 역시도 뭔가를 하지 못했
다.
그것이 둘의 선택이라 여기고
존중할 뿐이었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샤리에트가 그랬던 것처럼.
약속을 지키겠다는 내 제안에
도 불구하고 샤리에트는 떠났다.
높은 자리를 원하던 그녀의 심
경이 왜 바뀌었는지는 모르나,내
짧은 소견으로는 픽스 블랑 티어
드롭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다.
나와 달리,그녀는 결국 아버지
라 여기던 이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을 비난할
자격은 내게 없었다.
그건 오롯이 그녀의 선택이었
다.
그저 나중에 혹시라도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게 된다
면,그녀가 사뭇 다른 모습을 하
고 있길 바랄 뿐이있다.
나는 먼저 떠나버린 샤리에트
에 대한 기억을 애써 지워내며,
프로스트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그건 요정왕에게 앞서 보낸 편
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그래도 나름 잘 지내고 있나
보네.”
엘프들이 머무는 숲에서 어색
하지 않을까 했는데,다행히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나는 성의 없이 휘갈긴 편지를
확인한 후, 힘을 써 그대로 태워
버렸다.
목걸이와 연결되어서일까. 힘을
넘겨준 후로 더는 대단한 힘은
쓰지 못할 거라는
내겐 여전히 요정의 힘이 남아있
었다.
“원하시는 질문은 들으셨습니
까?”
“아니. 전혀.”
“네?”
“솔직히 제대로 답해줄 거라고
도 생각 안 했거든.”
그자는 답을 직접 주기보다는
스스로 깨닫게 두는 버릇이 있으
니까.
내가 원하는 답을 구하려면 직
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
다.
하여간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
다.
“뭘 물어보신 겁니까?”
“음,대단한 건 아니고 조금 걸
리는 게 있어서요.”
블러쉬가 호기심을 가질 정도
로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그래도
개인적으로 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게 뭡니까?”
“생각해보면 과거들이 다 연결
되어 있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만
좀 이상해서요.”
“예를 들면요?”
“누가 저한테 미래에 대한 기
억을 보여줬던 걸까요?”
프로스트의 기억을 손댄 것도,
어린 나의 기억을 건드린 것도
나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내게 미래를
예지해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의문이 들
었다.
그렇다면 내게 미래를 보여줬
던 이는 누구였을까?
“새 요정왕이라는 작자의 소행
은 아닙니까?”
“그래서 물어본 건데,그는 아
닌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확실히 수상하군요.”
“그렇죠. 하지만 당신이 미간을
찡그릴 정도는 아니에요.”
나는 장난스레 블러쉬의 미간
을 톡톡 쳐 주름을 펴게 했다.
“궁금하셔서 찾으셨던 거 아닙
니까?”
“궁금하긴 하지만, 찾을 수 없
다면 할 수 없죠. 어차피 그건 과
거잖아요. 전 현재를 생각하기도
바빠서 깊게 파고들 시간까지는
없어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천천히
찾아보죠. 뭐,못 찾으면 할 수
없겠지만요.”
처음에는 조금 걱정되었지만,
요정왕이 보낸 편지를 보니 그
불안도 사라진 터라 걱정은 크게
없었다.
요정왕이 보낸 편지는 성의 없
고도 간결했지만, 그의 마음만큼
은 분명히 전해져왔으니까.
[행복해져라.]
비록 짧은 문장이지만,특별한
존재에게 받은 축복은 기쁠 수밖
에 없으니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으며 블러쉬의 손을 꼭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