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200화 (200/204)

200화. 웃음이 났다

"요정은 마음에 드는 물건음

집 삼아시 깃든다는 이야기를 아

시나요?”

갑자기 그 이야기가 떠오른 건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블러쉬는 오래전, 심포니아의

이야기를 떠을리며 목걸이를 꽉

쥐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뭔가

를 알기에 한 행동도 아니었다.

그저 짐승처럼 예민한 사내의

감각으로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심포니아의 이야기처럼 요정의

눈물 목걸이가 그녀를 되돌아오

게 하는 매개체임을.

"곧 따라갈 테니,먼저 피해 있

도록 해.”

“네?”

“나는 그녀를 데리고 갈 테니.”

“하지만 지금 전하의 몸 상태

느.."..

프로스트는 마주친 시선에 말

을 삼켰다.

피투성이 몰골이 무색하리만큼

블러쉬의 눈빛만큼 살아 있었다.

지금껏 항상 그랬듯이.

블러쉬 모차나르트. 그 이름에

서 알 수 있다시피 모나차르트에

서 태어나고 자란 사내는 일평생

죽음을 등진 채 살아왔다. 죽음

따위가 두려울 리 없었다.

결국 프로스트는 더는 블러쉬

를 말리지 못했다. 그 대신, 제

어깨에 타고 있던 이스를 내밀었

다.

“비 전하께 이스를 부르는 피

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비 전하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겁

니다. 그리고 돌아오신 후에

프로스트는 손끝을 만지작거렸

다. 블러쉬에게 말하고 싶은 기억

이 있었지만,입이 떨어지지 않았

다.

블러쉬는 그런 그를 빤히 보다

가 이내 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치 빠른 새는 가볍게 날개를

펄럭이며,프로스트에게서 블러쉬

쪽으로 이동했다.

“돌아와서 듣지.”

“심포니아와 함께.”

“……네. 저도 그편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니 부디 무사히 다녀

오십시오.”

프로스트는 부러 밝게 웃으며

한 걸음 멀어졌다.

예나,지금이나 자신은 항상 블

러쉬의 뒷모습을 보는 입장이었

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유약한 형 대신,모나차르트의

주인으로서 무거운 짐을 진 아이

는 이제 완연한 어른이 되어있었

다.

너른 어깨에 놓인 짐은 줄어들

진 않았지만,그걸 나눠 짊어질

이가 생겼다. 피와 죽음, 굶주림.

온통 피비린내 나는 일상에도 희

망이라는 것이 서렸다.

그걸 알기에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는 것이었다.

다들 살육귀라 부르는 모나차

르트 대공이었지만,실은 그것만

이 블러쉬의 전부는 아니기에.

프로스트는 오래전,형의 요정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 혀를 차

면서도 끗꿋하게 들어주던 아이

를 기억했다.

그리고,그 아이가 얼마나 그

이야기를 좋아했는지도.

시도는 좋았는데,어린 나의 기

억까지 지우려 하다 보니 힘이

약간 모자랐다.

나는 거의 코앞에서 멈춰버린

시간대에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서 힘을 채우려면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걸까.

나는 허공에 붕 뜬 채로 눈치

껏 주변을 살피다가 아무도 없다

는 걸 확인하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이내 보다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혹시 보고 있어요? 보고 있으

면 좀 도와줘요!”

그나마 가능성 있는 요정왕을

불러봤지만,돌아오는 답은 없었

다.

하기야 그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예전에 도와줬겠지.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슬쩍 목걸이와 이어져 있는 빛이

향해있는 지점을 향해 손을 뻗었

다.

아예 멀리 있다면 이렇게 아쉽

지도 않을 텐데,닿을 듯 말듯 아

슬아슬한 거리라서 짜증이 났다.

누가 저기서 손이라도 뻗어주

면 괜찮을 텐데. 그런 건 불가능

하겠지.

“역시,얌전히 기다리는 것 외

에는 답이 없으려나.”

힘이야 기다리면 채워지는 거

고,여기선 시간이 흘러간다는 게

의미 없으니 이대로 가만히 있어

도 나쁠 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루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둥둥 떠다니며 시간을 보내

는 건 생각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정말 미

쳐버릴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서글펐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나? 편지라도 막 써서……

잠깐,편지?

문득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에

나는 품을 뒤적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져본 건

데,프로스트가 선물해준 피리가

손에 잡혔다. 이것도 요정의 물건

으로 쳐주는 건지 피리에선 옅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물론 그건 아주 미약한 정도라

이동할 정도의 힘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실험해볼 가치는 있었다.

분명 프로스트는 그렇게 말했

으니까. 이스는 어디에서나 이 소

리를 듣고 찾아온다고.

보통 새라면 모를까,요정왕의

힘으로 새로 태어난 새라면 가능

한 이야기였다.

나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며

피리를 입에 물었다.

삐이-. 삐이-.

적막하던 공간에 어울리지 않

게 귀여운 피리 소리가 울려 퍼

졌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어떤 반응도 돌아

오지 않았다.

역시,요정왕의 새라 해도 여기

까지 오는 건 무리인 건가.

몇 번 더 피리를 불어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입을 떼려는 순간,

이윽고 빛이 흔들렸다.

정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

만,익숙한 힘을 가진 존재가 오

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설마,요정왕이 와준 건가? 내

목소리를 듣고?

기대 어린 마음으로 다시 한번

피리를 힘껏 부는데, 막상 튀어나

온 건 눈처럼 새하얀 새였다.

“이스?”

제 이름을 알아들은 이스가 날

개를 펄럭이며 내게 날아들었다.

나는 적막 속에서 겨우 만난

나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에 기뻐

하며 이스를 끌어안았다.

“너,맞구나? 프로스트 말처럼

정말로 부르는 대로 왔어.”

이스가 가진 힘으로는 여기서

빠져나갈 순 없겠지만 그래도 다

른 이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어차피 이곳까지 올 수 있는

건,요정왕이나 그의 힘을 가진

이 정도일 테니까. 기다림을 같이

견딜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

사해야 할 따름이었다.

내심 이스의 뒤를 쫓은 프로스

트라도 와주길 바랐던 마음이 없

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아니면,프로스트한테 편지를

쓸까? 네가 전해줄래? 아니다. 편

지를 쓰려고 해도 쓸 수 있는 도

구가 없네.”

새 하나를 앞에 두고 혼잣말하

는 꼴이 우스웠지만 할 수 없다.

이런 곳에 홀로 있으면 자연스

레 말이 많아지기 마런이었다. 억

지로 활기찬 척이라도 해야 기분

이 우울해지는 걸 막을 수 있으

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내를

찾으시면 곤란한데.”

뭐지? 내가 드디어 미쳤나?

나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

렸다. 여기서 들을 수 없는 목소

리가 들리고 있었다.

“하다 하다,이제 환청까지-”

“심포니아.”

“……음?”

또 들렸다? 심지어 너무나 선

명하게 들렸는데? 이게 정말 환

청 이 라고?

나는 의심 반,기대 반으로 목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두리

번거렸다가 끝내 빛 사이로 보이

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짤막한 숨

을 뱉었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붉은 손

이었다.

어라? 잠깐,붉은 손?

나는 눈을 껌벅거리다가 손이

붉은 이유가 핏자국으로 얼룩덜

룩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고 기

겁했다.

왜,많고 많은 손 중에서 피 묻

은 손이지? 아니,그런데 저 손

묘하게 낯이 익은 것 같은데?

피 때문에 놀란 마음을 진정하

고 다시 살펴보니 정말 잘생긴

손이었다. 이 상황과 맞지 않은

평가라는 걸 아는데,정말로 그랬

다.

굳은살이 박이고 변형되어 언

뜻 모났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묘

하게 잘생긴 손이었다. 그리고 내

가 아는 한, 손이 이처럼 잘생긴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블러쉬.”

내 말이 정답이라는 듯, 손이

좀 더 뻗어졌다.

나는 멍한 기분으로 조심스럽

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로 당신이에요?”

대답보다 그대로 손이 잡아채

진 게 더 빨랐다.

하지만 애당초 대답은 필요하

지 않았다. 단단하게 맞물린 손이

주는 온기는 내겐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나를 끌어을리는

손에 남은 손도 겹쳤다.

크고 단단한,그러나 무엇보다

따뜻한 손은 오래간만에 잡아도

조금도 변함없었다.

아니, 취소. 바뀐 게 있네.

“얼굴 꼴이 왜 그래요.”

잡은 손에 그대로 끌려가다 보

면 결국 그 끝에는 내가 좋아하

는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주친 눈에도 차

마 웃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와 손

을 맞잡은 사내의 꼴은 엉망이었

다.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인 것 같

군요. 못 본 사이에 수척해지셨습

니다.”

정작 만신창이인 사내는 제 상

처보다 내 상태가 더 눈에 들어

온 모양이지만.

그 사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