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알아버렸으니까
* * 木
“거기 문이 있는 건 어떻게 아
셨어요?”
“내가 언제 모르는 게 있었
어?”
“그건 그렇지만
“다른 소리 할 시간에 잘 기억
해둬. 문이 어디 있는지.”
“제가 그걸 기억해야 해요?”
“기억하면,나중에 쓸모 있을
거야.”
나는 태연히 말하며 계단을 내
려 갔다.
비밀창고 문을 여는 내내,잘못
을 저지른 양 우물쭈물하는 아이
를 보니 뭔가 내가 나쁜 짓을 시
키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그녀
가 과거의 나이기도 하니 참작의
여지는 있겠지.
나는 잘도 합리화하면서 티어
드롭의 보물 창고로 쏙 들어갔다.
얼마나 요정의 물건들이 많은
지 문을 연 순간부터 계속해서
빠르게 힘이 채워지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시도할 만
했다.
“여,여긴……
“티어드롭의 비밀 보물 창고
지.”
“한 번도 안 와봤지?”
“요정님은 와보셨어요?”
"응. 저번에.”
요정의 눈물을 홈치느라 말이
지.
그저,같은 물건을 또 홈칠 요
량으로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
을 뿐.
나는 정중앙에서 반짝이는 다
이아몬드 목걸이를 향해 성큼성
큼 걸어갔다.
여러 개의 다이아몬드를 엮어
서 만든 목걸이는 언제봐도 변함
없이 아름답고,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만,전과는 조금 달랐다.
탑과 마찬가지로 목걸이에도
힘이 남아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탑에 남아있
었던 것 그 이상의 힘이.
요정의 눈물에서 별 힘이 느껴
지지 않았던 것도 결국 내 탓이
었나.
나는 알차게 과거의 유물들을
써먹는 것 같단 생각을 지우지
못하며 목걸이에 손을 뻗었다.
요정의 힘 때문인지,탑을 만질
수 있었던 것처럼 목걸이도 쉽게
내 손에 쥐어졌다.
“그거 만지시면 안 되지 않을
까요…….,,
“안 되긴. 지금부터가 중요한
데.”
“네?”
나는 아이의 목에 요정의 눈물
을 걸어주었다. 묵직한 무게에 아
이의 자세가 다소 삐뜰어지기는
했어도 정작 목걸이에 제 주인을
찾은 양 반짝반짝 빛났다.
“앞으로 많은 일이 있을 거야.
그리고,네가 감당할 수 없는 순
간들도 찾아을 테고.”
“그럼에도 잘 해낼 거야. 그것
만큼은 내가 보장할게.”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말했잖아.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도 될 것 같다고.”
“하지만 저는 요정님이랑 헤어
지기 싫어요. 저는-”
“헤어지지 않아.”
나는 아이의 작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눈을 마주쳤다.
딱히 잘해준 것도 없는데,아이
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헤어질 수 없지. 우린 누구보
다 가까운 사이거든.”
“•…"가까운 사이요? 그럼 친
구 같은 거예요?”
“뭐, 비숫할지도. 사실 친구보
다 더 가깝겠지만.”
그렇기에 아는 것이다. 아이가
외롭다는 걸.
잠깐 머물렀을 뿐인 내게 마음
을 많이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
유도.
아이는 항상 애정에 굶주려 있
었다.
정작 떼쓰기 위해 옷자락 한
번 잡아보지 못하면서.
“……가지 않으면 안 돼요?”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어. 내
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거든.”
U ,,
“하지만 너무 실망하진 마. 우
린 금방 만날 거야.”
“……진짜요?”
“그래. 요정의 비밀이 있는 한,
그렇지.”
나는 반듯한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아이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우린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나,
그렇기에 내겐 다신 이 손을 잡
을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다.
“……요정의 비밀이 뭔데요?”
“요정은 오래된 물건에 깃들
수 있다는 거지.”
“그건 비밀이 아닌걸요.”
아이가 속았다는 듯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나는 그에 피식 웃었다. 내가
한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비밀이야. 그것도 아주 큰 비
밀.”
나는 천천히 목걸이의 힘을 발
동시 켰다.
요정의 눈물은 이곳에도 있었
지만,내가 있던 시간대에도 있었
다.
그리고,그 시간대에서 요정의
눈물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심포니아.]
그 목소리는 어디서부터 들린
걸까.
나는 귀를 울리는 나지막한 목
소리에 눈을 감았다.
요정의 눈물이 존재하는 시간
대는 많았음에도 헤매는 일은 없
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분명 우리
는 서로 닿아있었다.
“돌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사람들은 최대한 피신시킬 수
있게끔 조치해두고 돌아왔습니다.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곧
피난 작업도 끝날 겁니다.”
“그런가. 그나마 다행이군.”
블러쉬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언제부터 자신이 남의 목숨을
챙겼다고. 이딴 소리를 꺼내는 제
꼴이 퍽 우스웠다.
사내는 여전히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익숙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곳에 멈춰 섰
다.
검에 몸을 지탱하고,다른 한
손으로는 목걸이를 쥔 채로 수문
장처럼 한 자리를 지켰다.
“이대로라면 쓰러지십니다.”
프로스트가 쉰 목소리로 이마
를 짚었다.
얼핏 봐도 지금 블러쉬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넝마가 된 몸
으로 지금껏 버티고 있다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그에게 난 상처
들은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정신
을 잃고 쓰러지다 못해 사경을
헤멜 만큼 깊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블러쉬는 버렸다. 그런
정신력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해
질 정도로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
었다.
“지반이 무너지면 정말로 끝일
겁니다.”
“그래도 두고 갈 순 없지. 설령
죽는다 해도 혼자보단 둘이 나을
테니.”
만약 심포니아가 나을 통로가
저 괴물이라면,그녀는 무너질지
도 모를 지하에서 홀로 도망쳐야
만 했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처음 와보는 곳에서 쉽게 벗어
날 수 있을 리 없으니,자신이 있
어야 했다.
“비 전하께선 그런 걸 원하실
리 없을 겁니다.”
“알아. 그녀는 원하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그래.”
사람답게 살아보자 했던 건 심
포니아 때문이었다.
그녀가 없는 삶이라면,다시 예
전으로 돌아가고야 말 것이었다.
모나차르트에서 태어나 짐승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사내에게
는 그것이 더 자연스럽고 익숙한
일이기에.
“이럴 거면 혼자 두는 게 아니
었는데.”
블러쉬는 쓰게 웃었지만 실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을 돌려도 자신은 같은 선택
을 했을 것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를 심포니아를
보며 제 옆에 묶여놓고 싶단 생
각은 늘 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단 한 번도 실천에 옮
길 순 없었다.
동화 속 요정을 닮은 여자였다.
흐르지 않으면 썩어버리는 물
처럼 제 갈 길을 가야 했고,제멋
대로 부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모
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그래서 마음에 담아버렸고,또,
그렇기에 잡아둘 수 없었다.
하고픈 일이 있으면 불처럼 타
오르는 모습이 예뻐서,힘든 일을
겪으면 되레 비 온 뒤의 땅처럼
단단한 모습이 좋아서.
대신,기다리기로 했다.
손에 피를 묻히고,망가트리는
것 외에 자신이 잘하는 건 기다
리는 일이기에 여자가 하고 싶은
대로 훨훨 날다가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쉼터가 되기로 했다.
그러니,그녀는 곧 돌아와야 했
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
럼 어디에 있든,제 보금자리를
찾아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기껏 손을 씻은
사내가 어찌 될지 모르니.
블러쉬의 손등 위로 핏줄이 바
짝 섰다.
성정을 잘 죽인다고 한들,살아
온 세월이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사내는 지금이라도 괴물을 가르
고 제 여인을 찾으러 갈 자신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뭉개진다고 한들 절 향해
웃어주는 미소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할 만했다.
왜냐하면, 알아버렸으니까.
제 품에 안긴 채 수줍게 웃던
여자를 알게 이상,처음으로 돌아
갈 수 없었다.
단언컨대 여자는 사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예쁜 것이었다.
그리고,그건 앞으로도 그럴 것
이다.
고작 이런 상황 때문에 포기하
기엔 여자는,제 아내는 너무나
어여쁘기에,
블러쉬는 상황에 맞지 않는 생
각에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충분히 기다릴 대로 기다
렸고,쉴 만큼 쉬었다.
슬슬 제 아내를 직접 찾으러
갈 때다. 그렇게 생각한 참이었
다.
블러쉬의 손에 들린 목걸이에
서 희미한 빛이 홀러나오지 않았
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