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97화 (197/204)

197화. 살아온 방식에 대한 대

“제 부름을 들어주셔서 감사해

요.”

“계속 시도해봤는데,안 되길래

포기해야 하나 싶었거든요.”

“..포기?”

이상한 표현에 설마 하고 봤더

니,아이의 품에는 두툼한 책이

한 권 안겨있었다.

나는 묘하게 익숙한 책 표지에

미간을 찡그렸다. 저 책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가 안고 있는 건 요정을 소

환하는 의식이 서술된 책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이제야 대충

시간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거

친 숨을 푹 쉬었다.

딱 봐도 이건 요정을 소환하기

위해 내가 아등바등하던 시기였

다.

하지만 내게 이런 기억은 없었

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누워 계세

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뻗어져

내게 닿았다.

나는 내게 살포시 내려앉은 작

은 손에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다

가 눈을 크게 떴다. 힘이 홀러들

어오고 있었다.

“너……

“네? 왜, 그러세요?”

나는 영문 모른 채 고개를 갸

웃거리는 아이의 손을 단단히 잡

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아이에게서

흘러들어오는 힘이 빠르게 내 몸

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맞아. 지금 나는 좀 아

파.”

나는 금세 아픈 척 표정을 일

그러트리며 아이의 동정을 사기

위해 애썼다.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기

위해서는 어린 나의 도움이 필요

했다.

“의사를 불러와야 할까요?”

“아니. 그냥 옆에 있어 줘.”

“ 네?”

“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을수

록 소환자 옆에 계속 있어야 몸

이 회복하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속여

먹는 건 쉽다.

나는 적당한 핑계를 내며 좀

더 아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혹시나 해서 시도해 본 건데

예상이 맞았다. 아이와의 접촉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점점 빠르게

몸이 가벼워졌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까지만 아이를 잡고 있다가 손을

놨다.

원래는 더 잡고 있을 셈이었지

만,힘이 내게로 옮겨을수록 아이

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걸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네가 도와준 덕분에.”

"다행이네요.”

불행 증 다행으로 아이는 나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순 없

었다. 혹시 모르니,요정왕의 힘

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나

아지면 기억을 살짝 지워두고 떠

나야 할듯했다.

“어?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

“마침 가볼 곳이 생각나서.”

요정이 가진 힘의 근원은 자연,

그 자체였다.

어린 나에게서 더는 힘을 부여

받지 못한다면 이곳에 가만히 머

물기보다는 수도 밖으로 나가 자

연에게서 충족하는 편이 나았다.

하물며 괜히 과거의 나와 같이

있다가 내가 어떤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르고.

눈앞의 아이는 프로스트 때와

는 사뭇 달랐다.

아이가 나와 자신의 접점이라

도 눈치랜다면,겨우 최소한으로

건드린 과거가 엉망으로 꼬여버

릴 것이었다.

“저랑 있어야 한다면서요.”

“지금은 괜……

나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멈

춰 섰다.

고작 얼마 떨어지지 않았을 뿐

인데,급속도로 몸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설마……

나는 순진하게 끔벅이는 녹색

눈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여기서 머

물러야 하는 모양이었다.

* * *

‘바보 같아.’

나는 열심히 책을 읽는 어린

시절의 나를 속으로 매도하며 턱

을 삐딱하게 세웠다.

아이가 최선을 다하는 이유가

인정받기 위해서이며,그리고 그

인정은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이

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요정님에 대해 아

버지께 말씀드리면 안 되는 거예

요?”

“말했잖아. 아직은 때가 아니라

고.”

“그때는 언제 오는데요?”

“곧 을 거야.”

네가 요정의 눈물로 인해 힘과

기억을 되찾고,또 그것을 다시

스스로 봉인하게 되는 순간이.

나는 뒷말은 속으로 삼키며 팔

짱을 꼈다. 억지로 곁에 머물게

되었다곤 하나,과거의 나와 사이

좋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꽃물이 들듯, 발

갛게 물드는 뺨이 불쾌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는 소녀가 떠올리고 있는 대

상이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 네?”

속으로만 생각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낸 모

양이다.

나는 토끼 눈을 한 아이를 보

며 급히 손을 들었다.

“너한테 한 거 아니야. 그냥 생

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요정님에게도 아는 사람이 있

어요?”

이대로 잠자코 조용히 넘어갈

셈이었는데,아이는 기회를 놓치

지 않았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는 아이와 눈을 마주친 채

로 고심하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

차피 나중에 기억은 지우고 떠나

게 될 테니까.

“있어. 되게 잘생긴 사람이.”

“저희 아버지만큼요?”

“너희 아버지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야.”

“진짜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가 작

은 입을 뻐끔거렸다. 내 발언이

무척이나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눈에 힘

을 주고 단호히 검지를 위로 추

켜을렸다.

“무릇 남자란 말이야, 곱상하게

생긴 게 다가 아니야. 이렇게 근

육도 단단히 붙고,눈매도 이렇게

좀 날카롭고,이렇게 표정도 좀

없고 그래야지 좋은 거지.”

“그런 사람이면 무서울 것 같

은데요.”

“아니야. 그런 사람이 좋은 거

야.”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

다.

어린아이에게 내 취향을 강요

하는 것 같지만 어떤가. 결국 이

아이가 크면 내가 되고,내 취향

은 블러쉬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을 잊게

되겠지만 이것만큼은 알아줬으면

했다.

굳이 피가 섞인 관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세상은 내 생각 이상으로 넓고,

그만큼 날 좋아해 주는 사람도

많다는 걸.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는 거

니,샤리에트.”

“아버지!”

물론 티어드롭 저택 안의 세상

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아이가

그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는 티어드롭 공작을 발견하

고는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의 뒷

모습을 느릿하게 좇았다.

내 시선의 끝에는 티어드롭 공

작이 있었다.

내가 보이지 않는지,티어드롭

공작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머리

를 쓰다듬어줄 뿐 내게 시선을

옮기지 않았고,덕분에 나는 편히

두 사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죽고, 요정으로 살

아났기에 이제 내 안에는 티어드

롭의 피는 사라졌다. 그렇기에 내

겐 심적으로나,혈통적으로나 티

어드롭 공작을 향해 아버지라 부

를 이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왜였을까.

나는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가

뱉었다.

만약 내가 요정의 힘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관계

는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죽지 않고 진짜

샤리에트로 남아있어도 다른 모

습이었을 수도 있고.

욕심으로 얼룩져있긴 해도,적

어도 티어드롭 공작이 어린 딸을

사랑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내가 죽었음

에도 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그토

록 맹목적으로 매달릴 리도 없었

을 테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샤리에트 블랑 티어드롭, 모두

가 사랑한 티어드롭 공작 영애.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온갖 것을

부족함 없이 누릴 수 있었던 데

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걸 알게 된 이상,나는 티어

드롭 공작에게 두 번 다시 아버

지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있어

서 가장 큰 형벌은 샤리에트를

빼앗기는 것일 테니까.

나는 그가 들을 수 없음을 알

면서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게 될 말은

샤리에트로서 처음이자,마지막으

로 아버지에게 전하는 작별 인사

였다.

“한 번 지은 죄는 되돌릴 수

없지만,그렇다고 가만히 둘 순

없어요. 제때 치료하지 않은 상처

가 곪고 썩었다 해서 손대지 못

하면 다음에는 환부를 아예 도려

내야 하잖아요.”

이 거리에서, 이렇게 작은 목소

리로 말해봤자 들리지 않을 것이

다.

하지만 나를 닮은 녹색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하는 것만으로

도 내겐 충분했다.

애당초 이건 그에게 결코 전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버리려고요. 예전에 제

가 당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제가 버리는 거예요.

아빠를요.”

아빠. 그건 티어드롭 공작이 유

일하게 진짜 샤리에트에게만 허

락했던 호칭이었지만, 이제 다신

그는 들을 수 없는 호칭이었다.

제 아버지가 그랬고,또 그 아

버지가 그랬던 것처럼,업보에 업

보를 더한 사내가 누릴 수 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이 순간,한껏 예민해진 내 감

각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불행할 것이다. 그가 겪을

수 있는 최대의 불행만큼.

그것이 업보이고, 그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대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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