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살아온 방식에 대한 대
가
“제 부름을 들어주셔서 감사해
요.”
“계속 시도해봤는데,안 되길래
포기해야 하나 싶었거든요.”
“..포기?”
이상한 표현에 설마 하고 봤더
니,아이의 품에는 두툼한 책이
한 권 안겨있었다.
나는 묘하게 익숙한 책 표지에
미간을 찡그렸다. 저 책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가 안고 있는 건 요정을 소
환하는 의식이 서술된 책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이제야 대충
시간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거
친 숨을 푹 쉬었다.
딱 봐도 이건 요정을 소환하기
위해 내가 아등바등하던 시기였
다.
하지만 내게 이런 기억은 없었
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누워 계세
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뻗어져
내게 닿았다.
나는 내게 살포시 내려앉은 작
은 손에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다
가 눈을 크게 떴다. 힘이 홀러들
어오고 있었다.
“너……
“네? 왜, 그러세요?”
나는 영문 모른 채 고개를 갸
웃거리는 아이의 손을 단단히 잡
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아이에게서
흘러들어오는 힘이 빠르게 내 몸
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맞아. 지금 나는 좀 아
파.”
나는 금세 아픈 척 표정을 일
그러트리며 아이의 동정을 사기
위해 애썼다.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기
위해서는 어린 나의 도움이 필요
했다.
“의사를 불러와야 할까요?”
“아니. 그냥 옆에 있어 줘.”
“ 네?”
“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을수
록 소환자 옆에 계속 있어야 몸
이 회복하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속여
먹는 건 쉽다.
나는 적당한 핑계를 내며 좀
더 아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혹시나 해서 시도해 본 건데
예상이 맞았다. 아이와의 접촉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점점 빠르게
몸이 가벼워졌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까지만 아이를 잡고 있다가 손을
놨다.
원래는 더 잡고 있을 셈이었지
만,힘이 내게로 옮겨을수록 아이
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걸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네가 도와준 덕분에.”
"다행이네요.”
불행 증 다행으로 아이는 나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순 없
었다. 혹시 모르니,요정왕의 힘
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나
아지면 기억을 살짝 지워두고 떠
나야 할듯했다.
“어?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
“마침 가볼 곳이 생각나서.”
요정이 가진 힘의 근원은 자연,
그 자체였다.
어린 나에게서 더는 힘을 부여
받지 못한다면 이곳에 가만히 머
물기보다는 수도 밖으로 나가 자
연에게서 충족하는 편이 나았다.
하물며 괜히 과거의 나와 같이
있다가 내가 어떤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르고.
눈앞의 아이는 프로스트 때와
는 사뭇 달랐다.
아이가 나와 자신의 접점이라
도 눈치랜다면,겨우 최소한으로
건드린 과거가 엉망으로 꼬여버
릴 것이었다.
“저랑 있어야 한다면서요.”
“지금은 괜……
나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멈
춰 섰다.
고작 얼마 떨어지지 않았을 뿐
인데,급속도로 몸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설마……
나는 순진하게 끔벅이는 녹색
눈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여기서 머
물러야 하는 모양이었다.
* * *
‘바보 같아.’
나는 열심히 책을 읽는 어린
시절의 나를 속으로 매도하며 턱
을 삐딱하게 세웠다.
아이가 최선을 다하는 이유가
인정받기 위해서이며,그리고 그
인정은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이
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요정님에 대해 아
버지께 말씀드리면 안 되는 거예
요?”
“말했잖아. 아직은 때가 아니라
고.”
“그때는 언제 오는데요?”
“곧 을 거야.”
네가 요정의 눈물로 인해 힘과
기억을 되찾고,또 그것을 다시
스스로 봉인하게 되는 순간이.
나는 뒷말은 속으로 삼키며 팔
짱을 꼈다. 억지로 곁에 머물게
되었다곤 하나,과거의 나와 사이
좋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꽃물이 들듯, 발
갛게 물드는 뺨이 불쾌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는 소녀가 떠올리고 있는 대
상이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 네?”
속으로만 생각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낸 모
양이다.
나는 토끼 눈을 한 아이를 보
며 급히 손을 들었다.
“너한테 한 거 아니야. 그냥 생
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요정님에게도 아는 사람이 있
어요?”
이대로 잠자코 조용히 넘어갈
셈이었는데,아이는 기회를 놓치
지 않았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는 아이와 눈을 마주친 채
로 고심하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
차피 나중에 기억은 지우고 떠나
게 될 테니까.
“있어. 되게 잘생긴 사람이.”
“저희 아버지만큼요?”
“너희 아버지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야.”
“진짜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가 작
은 입을 뻐끔거렸다. 내 발언이
무척이나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눈에 힘
을 주고 단호히 검지를 위로 추
켜을렸다.
“무릇 남자란 말이야, 곱상하게
생긴 게 다가 아니야. 이렇게 근
육도 단단히 붙고,눈매도 이렇게
좀 날카롭고,이렇게 표정도 좀
없고 그래야지 좋은 거지.”
“그런 사람이면 무서울 것 같
은데요.”
“아니야. 그런 사람이 좋은 거
야.”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
다.
어린아이에게 내 취향을 강요
하는 것 같지만 어떤가. 결국 이
아이가 크면 내가 되고,내 취향
은 블러쉬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을 잊게
되겠지만 이것만큼은 알아줬으면
했다.
굳이 피가 섞인 관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세상은 내 생각 이상으로 넓고,
그만큼 날 좋아해 주는 사람도
많다는 걸.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는 거
니,샤리에트.”
“아버지!”
물론 티어드롭 저택 안의 세상
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아이가
그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는 티어드롭 공작을 발견하
고는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의 뒷
모습을 느릿하게 좇았다.
내 시선의 끝에는 티어드롭 공
작이 있었다.
내가 보이지 않는지,티어드롭
공작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머리
를 쓰다듬어줄 뿐 내게 시선을
옮기지 않았고,덕분에 나는 편히
두 사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죽고, 요정으로 살
아났기에 이제 내 안에는 티어드
롭의 피는 사라졌다. 그렇기에 내
겐 심적으로나,혈통적으로나 티
어드롭 공작을 향해 아버지라 부
를 이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왜였을까.
나는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가
뱉었다.
만약 내가 요정의 힘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관계
는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죽지 않고 진짜
샤리에트로 남아있어도 다른 모
습이었을 수도 있고.
욕심으로 얼룩져있긴 해도,적
어도 티어드롭 공작이 어린 딸을
사랑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내가 죽었음
에도 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그토
록 맹목적으로 매달릴 리도 없었
을 테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샤리에트 블랑 티어드롭, 모두
가 사랑한 티어드롭 공작 영애.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온갖 것을
부족함 없이 누릴 수 있었던 데
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걸 알게 된 이상,나는 티어
드롭 공작에게 두 번 다시 아버
지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있어
서 가장 큰 형벌은 샤리에트를
빼앗기는 것일 테니까.
나는 그가 들을 수 없음을 알
면서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게 될 말은
샤리에트로서 처음이자,마지막으
로 아버지에게 전하는 작별 인사
였다.
“한 번 지은 죄는 되돌릴 수
없지만,그렇다고 가만히 둘 순
없어요. 제때 치료하지 않은 상처
가 곪고 썩었다 해서 손대지 못
하면 다음에는 환부를 아예 도려
내야 하잖아요.”
이 거리에서, 이렇게 작은 목소
리로 말해봤자 들리지 않을 것이
다.
하지만 나를 닮은 녹색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하는 것만으로
도 내겐 충분했다.
애당초 이건 그에게 결코 전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버리려고요. 예전에 제
가 당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제가 버리는 거예요.
아빠를요.”
아빠. 그건 티어드롭 공작이 유
일하게 진짜 샤리에트에게만 허
락했던 호칭이었지만, 이제 다신
그는 들을 수 없는 호칭이었다.
제 아버지가 그랬고,또 그 아
버지가 그랬던 것처럼,업보에 업
보를 더한 사내가 누릴 수 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이 순간,한껏 예민해진 내 감
각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불행할 것이다. 그가 겪을
수 있는 최대의 불행만큼.
그것이 업보이고, 그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대가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