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94화 (194/204)

194화. 인간과 요정의 다리

“뭘 하시고 싶으신지 모르겠지

만, 이미 이곳으로 오신 후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답니다.”

“아니. 정해져 있는 건 없어."

“그럴 리가요.”

샤리에트의 미소와 함께 공간

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공간은

마치 음식을 소화하는 위장 같았

다,아니 위장이라 해도 손색없을

것이다. 맞잡은 손을 시작으로 점

차 힘이 빨려 들어갔고,빼앗긴

힘은 공간 전체로 퍼져 결국 고

치로 모였다.

나는 샤리에트의 등 너머 서서

히 빛나기 시작하는 고치를 바라

봤다.

그녀는 지금까지 해온 일을 반

복할 모양이었다.

그런 건 이제 불가능할 텐데.

처음에는 한 번,그 다음에는

두 번,또 그 다음에는 더 많게.

점점 환하게 빛나던 고치는 어

느 순간부터 빛의 세기가 강해지

지 않았다. 대신, 고장 난 등처럼

점멸하기를 반복했고,그 속도는

점차 더 빨라졌다.

그리고,점점 더 빛보다는 어둠

이 유지되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커진 샤리에트의 눈을 보

며 씨익 웃었다. 그녀도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모

양이었다.

이제 고치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샤리에트는 둘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억지로 제압하는 방식으

로 힘을 사용하고 있었고,나는

그런 방식이 얼마나 허점이 많은

지 알고 있었다.

나는 듈에게서 이미 힘을 흡수

해본 적이 있었다.

“무슨 짓을 하신 거죠?”

“빼앗았지. 네가 그랬던 것처

럼.”

억지로 힘을 모아봤자,의미 없

었다. 힘은 억제하는 것이 아니

라,흐름을 따르는 것이었다.

나는 흐름이 바뀌며 오히려 내

게 딸려 들어오는 공간의 힘에

입술을 이죽거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너야말로

내게서 많은 것을 빼앗았잖아.”

“인간들이 그런 짓만 하지 않

았어도 제가 이랬을까요?”

“알아. 인간들이 잘못한 일이라

는 거.”

“남 일처럼 말하지 말아요. 당

신에게도 그 피가 흐르고 있으니

까요.”

궁지에 몰린 여자는 더는 날

향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다.

나는 잔잔한 수면처럼 여유를

가장하던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

지는 걸 바라보며 더욱 손에 힘

을 줬다.

서릿발처럼 서늘한 여자의 시

선처럼 그녀의 손 역시,차가웠

다.

“그것도 알아, 그리고,난 내

선조들의 죄를 외면할 생각도 없

어.”

“그렇다면 더욱 속죄해야죠. 우

리의 왕이 준 힘으로 다시 태어

났으니,그에 맞게 그의 의지를

이어야죠.”

"하지만 그건 내 방식대로의

속죄이지,당신이 이래라저래라할

게 아니야. 다른 이는 몰라도 당

신은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

나는 그녀로 인해 죽었고,이름

을 빼앗겼으며,또 결국에는 다시

한번 대치하는 상황에 놓였다. 인

생을 통째로 도둑맞은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어요.”

“요정을 죽인 인간들도 그렇게

말했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요정이 언제 인간들을 위협할지

모른다고. 그러니,인간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선 요정들을 처리해

야 한다고.”

U ,,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

지 않아?”

“……제가 인간과 다를 바 없

다고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요정과 인간의 경계는 명백하

다. 둘은 결코 섞일 수 없다.

지금껏 내가 배워온 지식이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야기를 들

으면 의문이 먼저 들었다.

과연 요정과 인간은 다를까, 하

는 의문이.

나는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에

잠시 숨을 삼켰다.

그리고,잠깐의 고민 끝에 답을

내놓았다.

“달라.”

“ 거봐요-”

“하지만 그게 틀린 건 아니지."

“ ,,

“다르다고 해서 꼭 척을 지어

야 한다는 이유는 없어. 요정과

인간은 틀린 게 아니라,다른 것

뿐이니까.”

내가 내린 답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답이

나아갈 목표가 되었다.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아가

씨도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네요.”

“아무래도 보고 배운 게 이런

거라서.”

“특히,인간의 편에 선다는 점

에서 닮았죠.”

자연스레 내게로 흘러오던 힘

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샤리에

트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

해 애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싸움은 이미 끝난 지 오래

였다.

나는 천장을 바라봤다. 공간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요동치고 있

었지만,방금 전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빨아먹은 힘을 소화

하기 위해 애썼다면 지금은 메말

라가는 화초처럼 힘을 빼앗겨 쪼

그라드는 중이었다.

이곳은 얼마 안 있어 무너질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묶인 이들도 비

로소 자유를 되찾겠지.

“아가씨는 그 힘을 가져선 안

됩니다. 그랬다간 요정들은 또 한

번 비참한 최후를-”

“내가 힘을 가질 셈이었다면

진작 가졌겠지.”

“미안하지만,나는 당신과 달

라.”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눈앞의 여자를 미

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멈추는 법을 알거든.”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절 여

기서 죽인다고 해서 아무것도 끝

나지 않아요. 요정은 잊지 않거든

요. 제가 사라져도, 언젠간 그 시

절을 견디고 살아남은 원한들이

다시금 나타나겠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

지.”

“ 뭐라고요?”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고심하

는 건 이미 충분히 해봐서 말이

야. 당분간은 그러고 싶지 않네.”

“당신은-”

“그리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난 할 일이 많거든.”

나는 천천히 샤리에트의 손을

놓았다. 그 작은 행동에도 몸이

휘청거릴 만큼 그녀는 부쩍 약해

져 있었다.

나는 힘없이 주저앉은 샤리에

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는 티어드롭이 될 거야.”

“……그 더러운 이름을 이어받

겠다고요?”

“그 이름이 짊어진 업보도 내

몫이니까.”

u ,,

“그리고,인간과 요정의 다리가

될 거야. 비어 티어드롭이 그랬던

것처럼. 그게 내가 그 이름을 이

어받기로 한 이유야.”

"하, 정말 되지도 않은 소리

르...,,

샤리에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힘을 빼앗긴 그녀의 눈빛은 점점

더 혼탁해지고 있었다.

이곳은 그녀와 이어져 있었다.

점점 빠르게 무너지는 공간처럼

그녀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때,불현듯 어디서 익숙한 울

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건 흐느낌으로써 다가을 죽

음을 알리는 요정,벤시의 울음소

리였다.

“분명 벤시는 멸족당했다고

“아무래도 여긴 경계니까. 그리

고,이제 막 자유가 되었잖아.”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사내는 한 곳을 보고

있었다.

어느샌가 그곳에는 희뿌연 빛

이 줄을 지어 울음소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왜 울어주는 거지? 절 죽게

한 인간 따위를 위해서,왜……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락 말

락 한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가 샤리에트의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돌

아보지 않았다.

“모두가 원한을 품은 건 아닐

테니까.”

나 대신,대답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원한을 품지 않았다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해야 한

다는 법은 없지 않나.”

“그리고,죽음은 끝이 아니거

드 ”

사내가 가리킨 곳에는 빛이 있

었다.

나는 환하게 빛나는 빛을 명하

게 바라봤다.

특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냥 알아봤다.

그건 본능이었다. 내 안의 무언

가가 본능적으로 저 빛이 무엇인

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한 명이 더 있었지. 인간과 요

정의 다리가 되겠노라고 운운하

던 인간 하나가 더.”

“ ,,

"참 멍청하지 않아? 다시 살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포기하고,

어둠 속에서 등대 역할을 하기로

하다니 말이야.”

“물론 저런 성격이었기에 다들

저자를 따른 거겠지만.”

사내가 허탈하게 웃었고,나는

뭔가 홀린 양 빛의 이름을 중얼

거렸다.

“비어 티어드롭.”

티어드롭의 시작이자, 요정이

가장 사랑했던 사내.

나는 오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내 선조의 이름을 천천히

곱씹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

면서도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입안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 이름은 의미 없어. 너무 시

간이 오래되어서 잊어버렸을 거

거든. 하지만 네가 하려는 일에는

분명 도움이 되겠지. 저자의 선행

이 네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죽

은 자들을 달래고 있으니.”

“저는 저렇게는 못할걸요.”

“원래 다들 저렇게는 못 해. 무

수한 역사 속에서도 저런 길을

걸었던 놈들은 딱 둘뿐이었거든.”

나는 숨을 삼켰다. 사내가 말하

는 둘이 누구인지,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그렇기에 너였던 거겠

지.”

나를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은

처음과 다르게,픽 부드러워져 있

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내가 아는

아저씨를 묘하게 닮아있었다.

나는 그를 빤히 을려보다가 이

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 말했죠. 당신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그 거래,지금 바로 끝

내요.”

“지금?”

“네,지금.”

눈살을 찌푸리는 사내에도 아

랑곳하지 않고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내가 내세울 거래 조건

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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