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93화 (193/204)

193화.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다시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사방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새카만 어둠에 짧게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이곳에는 죽지 못해 사

는 이들이 있었고 내가 힘을 부

었던 고치도 존재했다.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고치 앞에 서 있는 여자를 제

외하고는.

나는 가만히 여자를 응시했다.

분명 인기척이 느껴졌을 터인데

도 여자는 그저 고치만을 바라볼

뿐,내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

다.

그래서 내가 볼 수 있는 건 여

자의 뒷모습뿐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허리까지 길게 늘어트린 은발

이 퍽 익숙해 보였다.

나는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고작 뒷모습이었지만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샤리에 트,”

내 것이나,어느 순간부터 내

것이 아니게 된 그 이름.

나는 죽음과 함께 버려야 했던,

그리고 나도 모르는 새에 빼앗겼

던 이름을 곱씹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도 지

우지 못했다.

내가 아는 샤리에트는 평범했

다. 지금껏 특별하다 여길만한 부

분은 보여주지 못했었다.

그런데,왜 저기 있는 그녀는

다른 것 같지? 무엇보다 샤리에

트가 지금 여기 있는 게 가능한

건가?

여러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중에서 가

장 말이 안 되고,동시에 가장 가

능성 있는 가정을 골라내며 그녀

를 향해 걸어갔다.

“..너야?”

질문이었으나, 대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지

금 내 눈앞에 있는 샤리에트는

과거의 그녀라고.

나를 죽였던,그리고 날 향해

미소 짓던 샤리에트. 그녀가 이곳

에 있었다.

“너,도대체 정체가 뭐야?”

“뭐긴 뭐야. 가짜지.”

사내가 퉁명스럽게 내 물음을

가로챘다.

나는 그제야 그도 있다는 걸

깨닫고 주먹을 꽉 쥐었다.

“ 가짜라고요?”

“말했잖아. 시간을 오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래서 만들

어낸 거야. 적합한 몸을.”

“적합한 몸이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제물로 쓸 참

이었지. 그가 아이들을 살리는 것

에 힘들어하면서 고치를 위한 먹

잇감도 부족해졌으니까.”

사내의 말에도 샤리에트는 조

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고

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작 고치는 처음과 다르게,빛

나긴커녕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보일 뿐이었지만.

그것은 변태한 곤충이 빠져나

가고 제 쓰임을 다해 비쩍 마른

곤충의 고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 대신으로 널 선택한 거야.

업보를 가졌지만 순수한 아이,그

것도 요정의 힘을 가진 아이라면

훌륭한 먹잇감이 되어줄 테니까.

그런데,그가 널 살려버렸지.”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야. 너를

바탕으로 새로운 너를 만들자는

계획이.”

사내의 말에 문득 예전에 들었

던 샤리에트의 이야기가 떠올랐

다. 그녀는 분명 자신과 같은 이

들이 많다고 했었다.

그리고, 원래 샤리에트의 역할

을 할 아이가 사라졌다는 것도.

“결국 이 모든 건 널 절망케

하고,인간을 증오하게 해,결국

요정의 편에 서게끔 하기 위한

수작이었다는 거지.”

“……이해가 안 돼요.”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게?”

“아뇨. 절 바탕으로 만들었다면

그냥 아저씨의 힘만 노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저 정도로 완벽한 몸까지 가질

정도라면 굳이 복잡하게 날 끌어

들일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힘을 가

지고 있는 편이 일을 처리하기에

도 수월할 테고.

“아무리 잘 흉내 낸다고 해도

그게 흉내 낸 것이라면, 그건 결

국 가짜일 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널 처리하고

네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던 작전

은 이미 실패했지. 알잖아?”

"아……

샤리에트는 이미 오래전 나를

한 번 죽였구나.

나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

억에 입술을 잠시 숨을 참았다가

다시 입을 뗐다. 침묵을 지키기에

는 하고픈 말이 남아있었다.

“그럼 저자는 전부 기억하고

있는 건가요? 당시 제게 했던 모

든 일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들은 거

지. 네 요정 친구들에게 말이야.”

“……그들이 절 배신했다고 말

하고 싶으신 거예요?”

“아니. 그들은 배신하지 않았

어. 오히려 좋은 마음이었지.”

요정들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

음에도 내가 회귀했다는 이야기

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심지어 그

행동은 좋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

이었다.

그렇다면,결국 답은 하나였다.

애당초 나는 이미 그자의 수상

한 정황을 목격한 바가 있지도

않은가.

“장로님.”

"오래간만이네요,아가씨.”

아니길 바랐는데, 돌아온 대답

을 못 들은 척할 수 없다.

나는 비로소 몸을 돌리는 샤리

에트를 보며 쓰게 웃었다.

“왜 그러셨어요?”

“저는 그저 갚았을 뿐이에요.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요정을 희생한 것처럼 저 역시도

그럴 뿐이죠/’

샤리에트가 두 손을 기도하듯

모은 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자매라 해

도 손색없을 만큼 나와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마치 거울을 바라보

는 것 같았다.

도대체 저 모습에 참 많은 이

들이 속았을까.

“미래를 보셨기 때문일까요. 아

가씨는 너무 많은 걸 알고 계셨

죠. 제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아

시는 것처럼 구셨어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미래를

아는 건 저도 마찬가지였죠. 심지

어 저는 아가씨보다 더 많이 알

고,더 준비했으니까요. 모나차르

트 대공이 어떤 자인지 알았고,

미완성이긴 하나 그분의 힘을 담

은 그릇도 있었죠.”

샤리에트가 천천히 내게 다가

왔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도,그렇다

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은 채 그

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누가 더 강하냐를 떠나서 나는

그녀가 무서웠다.

기억이라는 건 참 이상해서 시

간이 흐를수록 멋대로 과장되거

나,원치 않아도 더욱 강렬하게

남아버리곤 하니까.

“사람에게 기대하는 바가 클수

록, 그리고 행복할수록 아가씨께

서도 깨닫게 되는 바가 많으실

테니까요.”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연기하

든 간에 돌이켜보면 샤리에트의

눈은 항상 내 불행을 바라고 있

었으니까.

“하나, 그게 제 자만이었습니

다.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어

요. 이럴 거면 처음부터 아가씨가

그곳에 가게 두는 게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결국 제 자만심 때문에 기껏

준비한 일들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입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지요. 물론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아직까지 아가씨께서는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 적응하지 못하고

계신다는 사실이겠지만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겁니다.

곧 깨닫게 되실 거예요. 그게 진

정한 순리니 말입니다.”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며,나

긋나긋한 말씨며 마치 어린애에

게 훈계하는 듯 나를 타이르는

샤리에트를 마주하자니 나도 모

르게 절로 조소가 튀어나왔다.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

다.

하기야,그럴 만하지. 그녀를

마주한 순간부터 나는 계속 멸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괜찮답니다. 요정의 시

간은 길고,느리게 가니까요. 다

시 준비하면 됩니다. 저는 얼마든

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샤리에트는 선뜻 내게 손을 내

밀었다. 그녀는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 픽 고운 모습을 하고 있

었다.

그게 참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고,동시에 날 분노케 했다.

안타깝게도 샤리에트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내 몸이 떨리는 건 단지 공포

때문만이 아니있다.

나는 샤리에트가 감히 가늠하

지 못할 만큼 많은 감정을 그녀

에게 품고 있었다.

“아뇨.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뭘 하시든 어차피 아무것

도 이루지 못하실 테니까요.”

나는 과거로 돌아갔음에도 쉽

게 개입하지 못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이 되는

것처럼,내가 내린 사소한 판단으

로 지금보다 더 엉망인 상황을

부를까 봐.

그리고,끝내 잘못된 상황이 내

게 업보로 돌아와 요정왕이 그랬

던 것처럼 나 역시도 소멸해버릴

까 봐.

하지만 그건 과거이지,지금이

아니지 않나.

“당신이 뭘 하든,뭘 원하든 간

에 내가 전부 막을 거거든. 지금

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

부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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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가 왔으니,가짜는 사라져

야지. 안 그래?”

나는 망설임 없이 샤리에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웃었다.

아주 오래전,그녀가 그랬던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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