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업보
꽉 쥔 주먹에 손톱이 살을 파고
들었다. 그나마 이성이 내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지 않게끔 끊임없
이 나를 저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끝내 손에 풀었다. 스스로
상처 내기엔 기억나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제게 이걸 보여주시는 이유가
뭐예요?”
“지금이라면 바골 수 있단다. 지
금의 네겐 그만한 힘이 있잖니.”
속삭이는 목소리는 퍽 달콤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요정왕의 눈에는 내 모습이 그
대로 비치고 있었다. 분노로 일그
러진 얼굴이.
결국,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요정왕을 더는 보지 못하고 어깨
를 축 늘어트렸다.
요정왕의 말대로 지금의 나는
뭐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아
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제가 나서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죠. 그리고,지금의 저는
더는 존재하지 못할 거예요. 화가
치밀면서도 저 순간이 있어서 지
금의 제가 있을 수 있는 거니까
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
니 ?”
“여기서 장로님을 죽인다고 해
서 끝이 아니잖아요."
나는 애써 울음을 삼켜내며 턱
을 바로 세웠다.
지금의 내가 아닌,다른 모습의
내가 듈을 상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모습의 내가 를
러쉬를 찾아갈지는 더욱 확신할
수 없었고.
“그 선택은 저 아이 때문이니?”
풍경이 별안간 모나차르트로 바
뀌었고 다시 블러쉬가 보였다.
나는 익숙한 얼굴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쉬려다가 노골적으로 느껴
지는 따가운 시선에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블러쉬 말고 다
른 아이가 또 있었다.
14누나는 요정이죠?”
“어,어?”
“블러쉬! 이것 봐,여기 요정이
있어!”
블러쉬를 닮은 다른 아이가 검
지 끝으로 정확하게 나를 가리켰
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하고 눈만
껌벅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형의 재촉에 고
개를 돌린 블러쉬와 눈이 마주쳤
다.
“저기, 나는-”
“그런 이야기 좀 그만해,형.”
“하지만-”
“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나
차르트 대공이 되어야 하잖아. 괜
한 소리 하지 말고 훈련에나 집중
해. 안 그러면 아버지가 정말로 화
내실 거야.”
분명 눈이 마주쳤던 것 같은데,
블러쉬는 너무나 쉽게 고개를 돌
렸다.
“……블러쉬?”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이름을 불렀지만,대답은커녕 돌아
오는 답도 없었다.
아무래도 블러쉬는 나를 보지
못하는듯했다.
정작 블러쉬의 핀잔에 억지로
끌려가면서도 고개를 돌리며 연신
흘끔거리는 다른 아이는 내가 선
명하게 보이는 듯했지만.
닮은 얼굴을 보아하니,아무래도
저 아이가 블러쉬가 전에 말한 형
일 것이다.
유약하다는 이유로 내몰렸던,자
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었던 형.
“생이 얼마 남지 않아서 볼 수
있는 거야. 수명이 얼마 안 남으면
감각이 더욱 예민해지곤 하니까.”
u ,,
“왜?”
“……저 애가 어떻게 죽는지 아
세요?”
“보고 싶니?”
“보고 싶다기보다는 그저 알고
싶어서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형의 죽음을
덤덤하게 말하던 블러쉬가 떠올랐
기 때문이었다.
“제 동생 손에 죽지.”
“동생 손에 죽는다고요? 그 말
씀은 설마……
나는 멀어지는 두 아이의 뒷모
습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닫았다.
요정왕이 말하는 죽음은 블러쉬
가 들려준 이야기와는 사뭇 달랐
다.
“아니면, 다른 사람 손에서 죽을
수도 있고.”
아차 싶어 입을 열려고 했지만,
내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요정왕
의 힘에 의해 장소가 이동되었다.
요정왕이 이번에 선택한 장소는
익숙하지만,동시에 낯선 모나차르
트의 서재였다.
그리고,서재 안에는 처음 만났
을 때보다 자란 블러쉬의 형이 먼
저 와 앉아있었다.
“이번에도 선택해보렴. 죽일지,
아니면 살릴지.”
“왜 자꾸 제게 이런 말도 안 되
는 선택지를 주시는 거예요?”
"내 후계자의 자질을 확인해보
려는 거지. 참고로 끝의 운명을 가
진 아이는 제 형을 죽인 걸 기점
으로 많이 변한단다. 아주 안 좋은
쪽으로 말이야.”
요정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턱짓
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블러쉬의 형
은 우리가 왔다는 것도 모른 채,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등 뒤
로 다가섰다.
아이는 다름 아닌 식물도감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블러쉬의 말대로라면, 그의 형은
블러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의문
의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요정왕은 블러쉬가 그의
형을 죽인다고 말했다.
그럼 내가 여기서 이 아이를 죽
여야만 내가 기억하는 미래가 되
는 게 아닐까?
더불어 블러쉬에게도 끔찍한 기
억을 안겨줄 필요도 없어지고.
‘‘앗,안녕하세요!”
망설이는 사이,아이가 휙 돌아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날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홈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아이의 눈이 너무 맑아서 동시
에 내 죄책감도 커져갔다. 잠시였
지만 몹쓸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
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누나, 옛날에 봤던 요정 맞죠?”
“내가 요정으로 보이니?”
“책에서 봤어요. 요정은 세상에
서 가장 예쁘다고. 누나는 제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예쁘니까,요정
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그렇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누나는 제 눈
에만 보이잖아요. 책에서 그랬어
요. 요정 중에는 곧 죽을 사람을
찾아가는 요정이 있다고.”
그건 어린아이가 할 법한 소리
는 아니지 않나. 나는 오해를 풀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요정이 아니야.”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다 아는
걸요. 전 오래 살지 못할 거예요.”
“뭐?”
"저는 내일 로카니 숲으로 떠나
요. 신에게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요.”
아이는 기도라고 말했지만, 나는
눈치껏 그가 산 제물이 되었음을
금세 알아차렸다.
제아무리 추위에 익숙한 모나차
르트인이라 한들,저 어린아이가
혹한의 추위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아니. 아무것도.”
“전 괜찮아요. 저는 지금까지 원
체 쓸모가 없어 제대로 된 한 사
람의 몫을 해본 적이 없는걸요. 이
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기
쁜걸요.”
“……정말로 괜찮은 게 맞아?”
괜찮을 리 없는데도 아이는 쉽
게 웃었다. 그 사실에 나도 모르게
괜히 목이 멨다.
“그럼요. 아, 아쉬운 건 하나 있
네요.”
“그게 뭔데?”
“제 동생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
지 못해서요. 그때 보셨죠? 예쁘
장한 아이요. 이름이 블러쉬라고
하는데,말수는 없지만 굉장히 착
한 아이거든요.”
“……알아. 좋은 사람인 거.”
덤덤하게 말했지만,실은 형의
죽음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것도.
그리고, 그렇기에 요정왕의 말대
로 형을 죽이게 되면 더욱 그렇겠
지.
“제 동생을 잘 아세요?”
“어쩌면 너보다 더 잘 알걸.”
“진짜요? 그럼 나중에 혹시라도
제 동생을 만나게 되면,이 말 하
나만 전해주실 수 있나요?”
“무슨 말?”
“너는 꼭 훌륭한 모나차르트 대
공이 될 거라고.”
아,역시 나는 이 아이를 죽이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일랑 그저
잠자코 아이의 맞은편에 앉아 이
야기를 듣는 것뿐이었다.
잔혹한 선택을 하기에는 아이의
얼굴에는 내가 사랑하는 이와 비
숫한 흔적들이 가득 남아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구나?”
요정왕이 아쉬움을 드러내며 혀
를 찼다.
나는 그를 돌아보는 대신,아이
를 계속 응시했다.
아이의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비쳤지만,요정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꼭 주어진 선택지에서만 답을
고르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확실히 구별되거든
요.”
“ 뭘?”
“아이의 눈에 아저씨는 비치지
않아요.”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서
모든 요정을 다 볼 수 있는 건 아
니야. 특히 나 같은 존재라면 더욱
그렇지.”
“하지만,요정의 힘을 가진 아이
라면 좀 다르지 않나요?”
나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켰다
도로 뱉은 후,다시 말을 이었다.
“의도치 않게 듈의 기억을 엿봤
을 때 알았어요. 아저씨가 살린 아
이들이 듈과 저만이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어떤 공통
점을 가지고 있는지도요.”
“ ,9
“그 아이들은 전부 크든,작든
간에 요정의 힘을 가진 아이들이
었어요.”
“저 아이는 내가 살린 게 아니
다만.”
“공통점은 요정의 힘만이 아니
에요.”
“아니다? 그럼 또 뭐가 있지?”
“업보를 가진 아이들이라는 거
죠. 그것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선
조들이 지은 죄가 쌓이고, 쌓여서
업보에 짓눌릴 예정인 아이들 말
이에요.“
나는 빤히 요정왕을 응시했다.
내 기억 속 요정왕의 모습을 너
무나 잘 흉내 냈기에 하마터면 깜
박 속을 뻔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떻게든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던 요정왕은 항상 내가
스스로 정답을 만들어낼 때까지
기다려줬는데,지금은 그러지 않았
으니까. 도리어 그저 정해진 선택
지만 놓고 끊임없이 날 종용하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그릇된 선택을 하길 바라
기라도 하는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