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89화 (189/204)

189화. 기억 속 모습과

“비켜,미샤.”

“안 돼. 멈춰. 일단 멈춰봐!”

“멈추라니 무슨 소리야. 이대로

주술이 발동되면 너무-”

“주술은 이미 발동되었어.”

미샤가 더듬더듬 괴물을 어루

만졌다.

자신이 본 게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그 안에 있었던 건 분명 그

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해. 저 안에서-”

타타닥-.

미샤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

리가 들렸다.

플렌은 미샤를 보호하는 동시

에 갑자기 들이닥친 침입자를 경

계하려 했으나,곧 얼굴을 확인하

고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침입자의 정체는 프로스트였다.

“흰둥아?”

미샤가 안도하면서도 떨떠름하

게 그를 부르자,프로스트가 경직

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비 전하셨습니다.”

“뭐? 뜬금없이 나타나서 그게

무슨 소리야?”

“전부 기억났습니다. 비 전하께

서 알려주셨어요.”

프로스트가 답지 않게 성급하

게 말을 이어나갔지만,누구도 그

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평소처럼 발소리를 죽일

여유조차 없이 달려온 듯 온몸이

땀범벅인 사내의 모습에 그가 무

척 조급해 보인다는 걸 알 수 있

을 뿐이었다.

프로스트는 다시금 자신이 깨

달은 바를 쏟아내려다가 제게 쏟

아진 당혹한 어린 시선들과 멀지

않은 곳에 쓰러진 블러쉬를 발견

하고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는지

입을 꾹 닫았다.

“지금 바로 나가셔야 합니다.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이걸 두곤 못 가! 여기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미샤가 날카롭게 소리침과 동

시에 빛이 더욱 강해졌고,그에

대한 반동으로 괴물 내부가 좀

더 훤하게 드러났다.

미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괴물 안의 실

루엣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잠시 그곳

에 시선을 둘 뿐,결국 별다른 문

제가 없다는 양 쓰러진 블러쉬를

부축했다.

“미샤 님은 플렌 님이 데리고

움직여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 못 들었어? 저걸 두고

못 간다고!

“비 전하의 명이십니다.”

“아가씨가 언제 그런 명령을

내렸는데.”

“오래전입니다.”

“오래전?”

미사의 반듯한 이마 위로 주름

이 깊어졌다.

오래전이라니 그토록 막연한

과거는 없었다.

심지어 방금까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놨던 모습을 떠

을리면 더욱더 떨떠름했다.

플렌은 프로스트를 가만 응시

하다가 이내,미샤를 들어 안았

다.

“말라깽이,이거 안 놔?”

"지금은 엔제너스 경의 말에

따르는 게 맞아.”

“저걸 어떻게서든 처리하겠다는

패기는 어딜 가고 그런 소리를

해?”

“장로님이 아니야.”

플렌은 작은 주먹을 마구마구

휘두르는 미샤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괴물을 돌아봤다.

프로스트의 곧은 눈을 보는 순

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아

니 이미 벌어졌다는 걸.

“장로님이 아니면 뭔데?”

“아가씨지.”

“뭐?”

“아가씨가 시간을 거슬러 가신

거야.”

장로가 발동시킨 주술의 주체

가 어째서 심포니아가 되었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저 확실한 사실은 그녀가 답

을 찾아냈을 거라는 것이었다.

심포니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쿨럭-!”

그때였다.

기절했던 블러쉬가 거친 숨을

뱉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이제 그의 붉은 눈은 피와 섞여

어디서부터가 동공이고 눈자위인

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곳을 벗어나면 바

로-”

“……놓고 가.”

말을 하는 것도 힘겨운지,블러

쉬의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약한 느

낌은 조금도 없었다. 거친 숨과

섞인 목소리는 되레 송곳니를 드

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것

을 연상케 했을 뿐이었다.

블러쉬는 느릿하게 눈을 한 번

더 껌벅이고는 자신을 부축하는

프로스트의 손을 밀어냈다.

“날 놓고 가라고.”

“그럴 수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분명-”

“내 몸 상태를 내가 모를 리

가.”

프로스트와 멀어지자,블러쉬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흔들렸다•

당황한 프로스트가 서둘러 제

주군을 다시 잡으려 했지만,이번

에도 블러쉬는 그의 손을 거절했

다.

“전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여

기 있어야 해.”

다친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이

면서 피가 엉겨 붙어 어설프게

및었던 상처가 도로 터졌다. 내장

까지 손상을 입었는지,말합 때마

다 몸 안쪽에서부터 통증이 느껴

졌고, 블러쉬의 족적을 따라 붉은

길이 생겼다.

그럼에도 사내는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절뚝거리면서 고집스럽게 나아

갈 뿐이었다.

터억-.

드디어 도달한 블러쉬의 손이

괴물에 닿았다.

덕분에 괴물의 표면에는 진한

핏자국이 남았지만 정작 블러쉬

는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그의 손에는 상황과 어

울리지 않게 반짝이는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다.

* * *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나는 뒤바뀐 풍경에 미간을 찡

그렸다.

분명 방금까지 한 치 앞도 보

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공간에

갇혀있었는데, 지금은 생뚱맞게

꽃밭에 서 있었다.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바람을

타고 살랑거리는 꽃잎을 따라 시

선을 옮기다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고목에 마른 침을 삼켰다.

“여긴…….

내 착각이 아니라면,분명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다•

아니. 사실 단순히 몇 번 방문

한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저 고목 밑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고, 그네를 타기도 했으

며,요정왕이 읽어주는 동화를 들

으며 화관을 만들기도 했었다. 그

게 오래전의 내 일상이었다.

그리고,그런 내 옆에는 항

“어리석은 선택을 했구나.”

일순간 거세게 분 바람에 꽃잎

이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어느샌가 내 등 뒤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고는 손으로

입을 꾹 막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소리를 내

질러버렸을 것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니?”

“아,아니. 그게…….

나는 몇 번이고 말을 고르다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눈앞의 사내는 둘과 같은 얼굴

을 하고 있었으나,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곤 생

각하지 못했나 보구나?”

“……그야,당신은 소멸되었으

니까요.”

“네가 있던 시대에선 그렇지.”

“시대요?”

사내는 대답 대신,고목을 가리

켰다.

그 아래에는 파묻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꽃잎에 감싸져 색

쌕 잠이 든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나였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애꿎은 손끝만 괴롭히다가 조심

스럽게 입을 됐다.

그 순간에도 사내, 아니 요정왕

은 자애로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제가 과거로 온 건가요?”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는 긴 한숨과 함께,이마를

짚었다.

내가 바랐던 건 요정왕의 부활

이었다. 고위 요정일수록 육체의

의미가 없으니,고치에 요정왕의

힘을 모두 붓는다면 그를 부활시

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으니까-

요정왕의 힘을 물려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모든 것이 어설픈

나보다는 요정왕 쪽이 상황을 정

리하는 데에 유리할 거라고 생각

하기도 했고.

하지만 정작 나온 결과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게 달가

울 리 없었다.

나는 뻔히 답을 알고 있음에도

부디 요정왕이 내 예상을 부정하

기를 바라며 그를 재촉하듯 바라

봤다.

“그래. 과거로 왔단다. 예정대

로 말이야.”

“예정이요?”

요정왕은 대답 대신, 그냥 웃었

다.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되짚다

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됐다.

“……혹시,당신은 전부 다 알

고 있었던 건가요?”

“이젠 아저 상 1 라고 안 불5 1 주는

구나.”

“그, 그건 제가 그땐 어려

서……

나는 ’ 당황해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요정왕에게 아저씨라니,불경죄

도 이런 불경죄가 없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변명해보자면

당시의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솔직히 어린아이가 뭘 알겠나.

눈치껏 대단한 존재라는 걸 깨달

았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 가늠

할 만큼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요정왕이라고 한들,

당시 내겐 아저씨라는 호칭 외에

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내 눈에는 지금도 어린걸.”

" ,,..

"편히 대하렴. 예전처럼. 나는

그게 더 좋단다.”

요정왕이 아무리 그렇게 다독

여도 영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

는데,일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

가 들렸다.

어린 내가 뒤척이는 소리였다.

요정왕은 잠이 든 어린 나를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역시,그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일단은 자리를 옮기는 게 좋

겠지. 다른 이는 몰라도 본인끼리

만나면 곤란해지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하잖니.”

요정왕은 싱긋 웃으며 내게 손

짓했다.

나는 머뭇거리면서도 그를 따

라 천천히 걸음을 뗐다.

아직도 되찾은 기억이 어색하

게 느껴졌지만,신기하게도 붓으

로 그려놓은 듯 유려한 미소는

내 기억 속 모습과 조금도 다르

지 않았다.

자연스레 그의 뒤를 쫓고 있는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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