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기억 속 모습과
“비켜,미샤.”
“안 돼. 멈춰. 일단 멈춰봐!”
“멈추라니 무슨 소리야. 이대로
주술이 발동되면 너무-”
“주술은 이미 발동되었어.”
미샤가 더듬더듬 괴물을 어루
만졌다.
자신이 본 게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그 안에 있었던 건 분명 그
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해. 저 안에서-”
타타닥-.
미샤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
리가 들렸다.
플렌은 미샤를 보호하는 동시
에 갑자기 들이닥친 침입자를 경
계하려 했으나,곧 얼굴을 확인하
고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침입자의 정체는 프로스트였다.
“흰둥아?”
미샤가 안도하면서도 떨떠름하
게 그를 부르자,프로스트가 경직
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비 전하셨습니다.”
“뭐? 뜬금없이 나타나서 그게
무슨 소리야?”
“전부 기억났습니다. 비 전하께
서 알려주셨어요.”
프로스트가 답지 않게 성급하
게 말을 이어나갔지만,누구도 그
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평소처럼 발소리를 죽일
여유조차 없이 달려온 듯 온몸이
땀범벅인 사내의 모습에 그가 무
척 조급해 보인다는 걸 알 수 있
을 뿐이었다.
프로스트는 다시금 자신이 깨
달은 바를 쏟아내려다가 제게 쏟
아진 당혹한 어린 시선들과 멀지
않은 곳에 쓰러진 블러쉬를 발견
하고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는지
입을 꾹 닫았다.
“지금 바로 나가셔야 합니다.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이걸 두곤 못 가! 여기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미샤가 날카롭게 소리침과 동
시에 빛이 더욱 강해졌고,그에
대한 반동으로 괴물 내부가 좀
더 훤하게 드러났다.
미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괴물 안의 실
루엣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잠시 그곳
에 시선을 둘 뿐,결국 별다른 문
제가 없다는 양 쓰러진 블러쉬를
부축했다.
“미샤 님은 플렌 님이 데리고
움직여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 못 들었어? 저걸 두고
못 간다고!
“비 전하의 명이십니다.”
“아가씨가 언제 그런 명령을
내렸는데.”
“오래전입니다.”
“오래전?”
미사의 반듯한 이마 위로 주름
이 깊어졌다.
오래전이라니 그토록 막연한
과거는 없었다.
심지어 방금까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놨던 모습을 떠
을리면 더욱더 떨떠름했다.
플렌은 프로스트를 가만 응시
하다가 이내,미샤를 들어 안았
다.
“말라깽이,이거 안 놔?”
"지금은 엔제너스 경의 말에
따르는 게 맞아.”
“저걸 어떻게서든 처리하겠다는
패기는 어딜 가고 그런 소리를
해?”
“장로님이 아니야.”
플렌은 작은 주먹을 마구마구
휘두르는 미샤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괴물을 돌아봤다.
프로스트의 곧은 눈을 보는 순
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아
니 이미 벌어졌다는 걸.
“장로님이 아니면 뭔데?”
“아가씨지.”
“뭐?”
“아가씨가 시간을 거슬러 가신
거야.”
장로가 발동시킨 주술의 주체
가 어째서 심포니아가 되었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저 확실한 사실은 그녀가 답
을 찾아냈을 거라는 것이었다.
심포니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쿨럭-!”
그때였다.
기절했던 블러쉬가 거친 숨을
뱉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이제 그의 붉은 눈은 피와 섞여
어디서부터가 동공이고 눈자위인
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곳을 벗어나면 바
로-”
“……놓고 가.”
말을 하는 것도 힘겨운지,블러
쉬의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약한 느
낌은 조금도 없었다. 거친 숨과
섞인 목소리는 되레 송곳니를 드
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것
을 연상케 했을 뿐이었다.
블러쉬는 느릿하게 눈을 한 번
더 껌벅이고는 자신을 부축하는
프로스트의 손을 밀어냈다.
“날 놓고 가라고.”
“그럴 수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분명-”
“내 몸 상태를 내가 모를 리
가.”
프로스트와 멀어지자,블러쉬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흔들렸다•
당황한 프로스트가 서둘러 제
주군을 다시 잡으려 했지만,이번
에도 블러쉬는 그의 손을 거절했
다.
“전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여
기 있어야 해.”
다친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이
면서 피가 엉겨 붙어 어설프게
및었던 상처가 도로 터졌다. 내장
까지 손상을 입었는지,말합 때마
다 몸 안쪽에서부터 통증이 느껴
졌고, 블러쉬의 족적을 따라 붉은
길이 생겼다.
그럼에도 사내는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절뚝거리면서 고집스럽게 나아
갈 뿐이었다.
터억-.
드디어 도달한 블러쉬의 손이
괴물에 닿았다.
덕분에 괴물의 표면에는 진한
핏자국이 남았지만 정작 블러쉬
는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그의 손에는 상황과 어
울리지 않게 반짝이는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다.
* * *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나는 뒤바뀐 풍경에 미간을 찡
그렸다.
분명 방금까지 한 치 앞도 보
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공간에
갇혀있었는데, 지금은 생뚱맞게
꽃밭에 서 있었다.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바람을
타고 살랑거리는 꽃잎을 따라 시
선을 옮기다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고목에 마른 침을 삼켰다.
“여긴…….
내 착각이 아니라면,분명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다•
아니. 사실 단순히 몇 번 방문
한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저 고목 밑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고, 그네를 타기도 했으
며,요정왕이 읽어주는 동화를 들
으며 화관을 만들기도 했었다. 그
게 오래전의 내 일상이었다.
그리고,그런 내 옆에는 항
상
“어리석은 선택을 했구나.”
일순간 거세게 분 바람에 꽃잎
이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어느샌가 내 등 뒤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고는 손으로
입을 꾹 막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소리를 내
질러버렸을 것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니?”
“아,아니. 그게…….
나는 몇 번이고 말을 고르다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눈앞의 사내는 둘과 같은 얼굴
을 하고 있었으나,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곤 생
각하지 못했나 보구나?”
“……그야,당신은 소멸되었으
니까요.”
“네가 있던 시대에선 그렇지.”
“시대요?”
사내는 대답 대신,고목을 가리
켰다.
그 아래에는 파묻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꽃잎에 감싸져 색
쌕 잠이 든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나였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애꿎은 손끝만 괴롭히다가 조심
스럽게 입을 됐다.
그 순간에도 사내, 아니 요정왕
은 자애로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제가 과거로 온 건가요?”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는 긴 한숨과 함께,이마를
짚었다.
내가 바랐던 건 요정왕의 부활
이었다. 고위 요정일수록 육체의
의미가 없으니,고치에 요정왕의
힘을 모두 붓는다면 그를 부활시
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으니까-
요정왕의 힘을 물려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모든 것이 어설픈
나보다는 요정왕 쪽이 상황을 정
리하는 데에 유리할 거라고 생각
하기도 했고.
하지만 정작 나온 결과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게 달가
울 리 없었다.
나는 뻔히 답을 알고 있음에도
부디 요정왕이 내 예상을 부정하
기를 바라며 그를 재촉하듯 바라
봤다.
“그래. 과거로 왔단다. 예정대
로 말이야.”
“예정이요?”
요정왕은 대답 대신, 그냥 웃었
다.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되짚다
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됐다.
“……혹시,당신은 전부 다 알
고 있었던 건가요?”
“이젠 아저 상 1 라고 안 불5 1 주는
구나.”
“그, 그건 제가 그땐 어려
서……
나는 ’ 당황해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요정왕에게 아저씨라니,불경죄
도 이런 불경죄가 없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변명해보자면
당시의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솔직히 어린아이가 뭘 알겠나.
눈치껏 대단한 존재라는 걸 깨달
았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 가늠
할 만큼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요정왕이라고 한들,
당시 내겐 아저씨라는 호칭 외에
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내 눈에는 지금도 어린걸.”
" ,,..
"편히 대하렴. 예전처럼. 나는
그게 더 좋단다.”
요정왕이 아무리 그렇게 다독
여도 영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
는데,일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
가 들렸다.
어린 내가 뒤척이는 소리였다.
요정왕은 잠이 든 어린 나를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역시,그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일단은 자리를 옮기는 게 좋
겠지. 다른 이는 몰라도 본인끼리
만나면 곤란해지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하잖니.”
요정왕은 싱긋 웃으며 내게 손
짓했다.
나는 머뭇거리면서도 그를 따
라 천천히 걸음을 뗐다.
아직도 되찾은 기억이 어색하
게 느껴졌지만,신기하게도 붓으
로 그려놓은 듯 유려한 미소는
내 기억 속 모습과 조금도 다르
지 않았다.
자연스레 그의 뒤를 쫓고 있는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