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아주 진한 녹색
광-!
강인하던 사내가 쓰러지는 건
한순간이 었다.
공격도,방어도 하지 못한 채
괴물의 공격을 받은 블러쉬는 아
직 정신은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
었으나,단박에 몸이 망가지고야
말았다.
“장로님,지금 뭐하시는 거예
요!”
미샤가 날카롭게 외치며 장로
의 옷깃을 잡았다.
피비린내가 좋지 않았던 사내
긴 했으나,블러쉬는 심포니아의
연인이었다. 그런 그를 뻔히 죽게
내버려 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지거나, 혹은 검에 그대로 먹
혔으면 했는데 생각보다 목숨이
질기셔서요. 여기서 끝내는 게 맞
을 것 같았습니다.”
“장로님!”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습니
다,미샤. 이 또한 그분을 위한
것이니까요.”
“그분이라뇨, 저는,아,안 돼!”
괴물이 다시금 공격을 위해 팔
을 들었다.
미샤는 서둘러 옷깃을 놓고 블
러쉬를 향해 달려갔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블러쉬
는 치명상을 입었다. 이번에 또
공격받으면 정말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어떻게서든 빼내야 했다.
하지만 미샤의 노력은 그녀의
앞을 막아선 줄기에 물거품이 되
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공격이 블
러쉬를 향했다.
“놓아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미샤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
로 장로를 돌아봤다.
하지만 정작 장로는 아무런 죄
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
히려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블러쉬가 언제 숨통이 끊어질
지 기대하면서.
미샤는 더는 참지 못하고 품에
서 이것저것을 꺼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치료약을 먹
이면 괜찮아질 수 있다. 무조건
그래야 했다.
“포기하세요,미샤. 저자는 여
기서 죽을 운명입니다.”
“운명이요? 그런 게 어딨어요!
분명 이기고 있었단 말이에요! 너
도 봤잖아!”
미샤가 서둘러 플렌을 찾았다.
애써 말을 아끼고 있었으나, 정
작 플렌도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
고 있었다. 그 역시도 지금 상황
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플렌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감히 장로님의 뜻에 반
하는 건 아니나,적어도 알아야겠
습니다. 왜 이러시는지.”
“우리 요정들을 위함입니다.”
“……우리 요정이요?”
“곧 새로운 요정왕이 탄생할
겁니다.”
U ”
짜 맞춘 듯,주변이 고요해졌
다.
장로가 말하는 새로운 요정왕
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
다.
심포니아가 새로운 요정왕이
된다고 해서 왜 블러쉬가 죽어야
하는지.
“저자는 아가씨의 연인이에요.”
“압니다. 그간의 이야기는 전부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이러세요. 제발 이
러지 마세요. 저자가 잘못되면 아
가씨께서 분명 슬퍼하실 거예요.”
"슬퍼하시겠지만,대신 저희의
곁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확고한 결의에 찬 말투에 숨이
턱 막히는 듯하다. 플렌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물만 그렁그
렁 달고 있는 미샤를 뒤로 감춘
채,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평생 장로를 존경하고,그녀를
따르던 플렌이었지만 아닌 것은
아니 었다.
“……장로님은 처음부터 도움을
주시려고 오신 게 아니시군요.”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이건
요정들을 위함입니다.”
“이러실 거면 처음부터 못 하
게 막으시면 되는 거지 않습니까.
그때는 아가씨의 선택을 존중하
는 것처럼 구셨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시는 건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대 요정왕의 뜻에 맞게 기
다린 것뿐입니다.”
요정왕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자신의 후계자가 된 아이를
안타깝게 여겼기에 심포니아의
선택을 존중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심포니아가 힘을
깨닫기 전의 이야기였다.
거대한 힘을 노리는 이들은 항
상 있었고, 심포니아는 요정왕이
그랬던 것처럼 사소한 감정을 버
리지 못해왔다.
요정왕이 베푼 작은 동정이 끔
찍한 괴물을 만들었던 것처럼,인
간과 가까워질수록 그녀도 같은
과오를 반복할 것이었다.
그러기 전에 서둘러 그녀가 가
진 모든 미련을 잘라내 버려야
했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요정에게
있어선 찰나에 불과하니,어떤 미
련도 남지 않게끔 마지막 유희를
즐기시길요. 행복하실수록 그것을
잃었을 때,상처도 크실 테니까
요.
“그 말씀은 설마 처음부터
플렌은 미샤를 제 뒤로 감춘
채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요정과
인간의 경계가 있어 차마 심포니
아를 직접 돕지 못했지만,누구보
다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고 지금
껏 믿어왔으니까.
“새로운 요정왕이 태어나고,이
번 일이 끝나면 많은 것들이 달
라질 겁니다.”
“아가씨는 지금껏 인간으로 살
아오셨습니다. 달라지는 건 없습
니다.”
“아뇨. 달라집니다. 앞으로 그
분은 완벽한 요정으로 살아가실
테니까요.”
장로가 단호히 고개를 젓자,천
아래로 보이는 결 좋은 은발도
그녀를 따라 가볍게 찰랑거렸다.
오래 기다린 만큼 그녀는 강한
확신에 차 있었다.
“거짓된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
지만,증인들이 많으면 그분도 믿
으실 수밖에 없겠죠. 사랑하던 연
인이 실은 배신자였다는 걸.”
“저희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
리를 증언할 거라 생각하세요?”
"네. 그러기 위해 데려온 것인
걸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
는 장로는 엘프들이 자신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 말을 듣지 않
으면 다른 방법을 쓰면 그만이고.
“지금은 절 이해하지 못하겠지
만 나중에는 달라질 겁니다. 이
모든 건 대의를 위함이니까요.”
“대의라고요?”
“참 슬프지 않나요. 너무 거대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힘이
라니.”
“정작 그 힘을 가진 이들은 이
토록 연약하기 그지없는데.”
어설프게 마음을 나눠주다가
비극으로 끝맺음할 거라면,차라
리 처음부터 여지를 주지 않는
편이 나았다.
누구와도 연을 맺지 않은 채,
고결하게 제 운명에 순응하고 자
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요정왕이 가져야 할 완벽한
모습이기에.
하지만 안타깝게도 항상 제 주
인이 되어야 할 자는 그렇지 못
했다. 매빈 감정에 휘둘리고,또
무너졌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리는 건 한 번이면 족했
다. 두 번 다신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의 왕은 요정과 인간이 함
께 하는 이상을 꿈꿨으나, 애당초
그런 건 불가능했습니다. 인간은
탐욕스럽고,요정은 과거를 잊지
못하니까요. 결국 비극은 반복될
뿐입니다.”
지금처럼.
장로에게 닿지 못한 검이 파르
르 허공에서 떨렸다.
피투성이가 된 와중에도 노려
보는 사내의 눈빛은 조금도 죽지
않았다.
방심한 사이 나무줄기를 뜯어
내고 무기를 던지는 것부터가 포
기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니까.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결국 끝
은 정해져 있는데.
장로는 검을 막기 위한 바람에
벗겨진 후드를 느긋하게 도로 썼
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그녀의
얼굴이 드러난 후였다.
“장로님이 왜……
장로의 얼굴을 확인한 미샤가
더듬더듬 말을 더듬다가 플렌을
돌아봤다. 하지만 놀란 건 플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역시도 당혹
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러난 장로의 얼굴은 이 자리
에 있는 모두가 아는 자의 것이
었다.
“그래도 기억을 찾지 말라고
했던 건 그래도 진심 어린 배려
였답니다. 어차피 요정의 삶은 기
니,기다리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
까요.”
“하지만 결국 일이 이렇게 되
었네요. 그러니 저도 해야 할 일
을 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정작 장로는 절 보는
시선이 어떤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선을 뻔히
알면서도 태연하게 괴물을 향해
손짓할 뿐이었다.
“그럼 슬슬 정리해볼까요. 다행
스럽게도 이곳에선 어떤 짓이 벌
어져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그리고 모든 정리가 끝나면
그만 깨워야겠죠.”
우리들의 새로운 왕을.
장로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
다.
그녀의 눈은 아주 진한 녹색이
었다. 모두가 다 아는 바로 그
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