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87화 (187/204)

187화. 아주 진한 녹색

광-!

강인하던 사내가 쓰러지는 건

한순간이 었다.

공격도,방어도 하지 못한 채

괴물의 공격을 받은 블러쉬는 아

직 정신은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

었으나,단박에 몸이 망가지고야

말았다.

“장로님,지금 뭐하시는 거예

요!”

미샤가 날카롭게 외치며 장로

의 옷깃을 잡았다.

피비린내가 좋지 않았던 사내

긴 했으나,블러쉬는 심포니아의

연인이었다. 그런 그를 뻔히 죽게

내버려 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지거나, 혹은 검에 그대로 먹

혔으면 했는데 생각보다 목숨이

질기셔서요. 여기서 끝내는 게 맞

을 것 같았습니다.”

“장로님!”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습니

다,미샤. 이 또한 그분을 위한

것이니까요.”

“그분이라뇨, 저는,아,안 돼!”

괴물이 다시금 공격을 위해 팔

을 들었다.

미샤는 서둘러 옷깃을 놓고 블

러쉬를 향해 달려갔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블러쉬

는 치명상을 입었다. 이번에 또

공격받으면 정말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어떻게서든 빼내야 했다.

하지만 미샤의 노력은 그녀의

앞을 막아선 줄기에 물거품이 되

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공격이 블

러쉬를 향했다.

“놓아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미샤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

로 장로를 돌아봤다.

하지만 정작 장로는 아무런 죄

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

히려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블러쉬가 언제 숨통이 끊어질

지 기대하면서.

미샤는 더는 참지 못하고 품에

서 이것저것을 꺼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치료약을 먹

이면 괜찮아질 수 있다. 무조건

그래야 했다.

“포기하세요,미샤. 저자는 여

기서 죽을 운명입니다.”

“운명이요? 그런 게 어딨어요!

분명 이기고 있었단 말이에요! 너

도 봤잖아!”

미샤가 서둘러 플렌을 찾았다.

애써 말을 아끼고 있었으나, 정

작 플렌도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

고 있었다. 그 역시도 지금 상황

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플렌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감히 장로님의 뜻에 반

하는 건 아니나,적어도 알아야겠

습니다. 왜 이러시는지.”

“우리 요정들을 위함입니다.”

“……우리 요정이요?”

“곧 새로운 요정왕이 탄생할

겁니다.”

U

짜 맞춘 듯,주변이 고요해졌

다.

장로가 말하는 새로운 요정왕

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

다.

심포니아가 새로운 요정왕이

된다고 해서 왜 블러쉬가 죽어야

하는지.

“저자는 아가씨의 연인이에요.”

“압니다. 그간의 이야기는 전부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이러세요. 제발 이

러지 마세요. 저자가 잘못되면 아

가씨께서 분명 슬퍼하실 거예요.”

"슬퍼하시겠지만,대신 저희의

곁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확고한 결의에 찬 말투에 숨이

턱 막히는 듯하다. 플렌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물만 그렁그

렁 달고 있는 미샤를 뒤로 감춘

채,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평생 장로를 존경하고,그녀를

따르던 플렌이었지만 아닌 것은

아니 었다.

“……장로님은 처음부터 도움을

주시려고 오신 게 아니시군요.”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이건

요정들을 위함입니다.”

“이러실 거면 처음부터 못 하

게 막으시면 되는 거지 않습니까.

그때는 아가씨의 선택을 존중하

는 것처럼 구셨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시는 건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대 요정왕의 뜻에 맞게 기

다린 것뿐입니다.”

요정왕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자신의 후계자가 된 아이를

안타깝게 여겼기에 심포니아의

선택을 존중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심포니아가 힘을

깨닫기 전의 이야기였다.

거대한 힘을 노리는 이들은 항

상 있었고, 심포니아는 요정왕이

그랬던 것처럼 사소한 감정을 버

리지 못해왔다.

요정왕이 베푼 작은 동정이 끔

찍한 괴물을 만들었던 것처럼,인

간과 가까워질수록 그녀도 같은

과오를 반복할 것이었다.

그러기 전에 서둘러 그녀가 가

진 모든 미련을 잘라내 버려야

했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요정에게

있어선 찰나에 불과하니,어떤 미

련도 남지 않게끔 마지막 유희를

즐기시길요. 행복하실수록 그것을

잃었을 때,상처도 크실 테니까

요.

“그 말씀은 설마 처음부터

플렌은 미샤를 제 뒤로 감춘

채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요정과

인간의 경계가 있어 차마 심포니

아를 직접 돕지 못했지만,누구보

다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고 지금

껏 믿어왔으니까.

“새로운 요정왕이 태어나고,이

번 일이 끝나면 많은 것들이 달

라질 겁니다.”

“아가씨는 지금껏 인간으로 살

아오셨습니다. 달라지는 건 없습

니다.”

“아뇨. 달라집니다. 앞으로 그

분은 완벽한 요정으로 살아가실

테니까요.”

장로가 단호히 고개를 젓자,천

아래로 보이는 결 좋은 은발도

그녀를 따라 가볍게 찰랑거렸다.

오래 기다린 만큼 그녀는 강한

확신에 차 있었다.

“거짓된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

지만,증인들이 많으면 그분도 믿

으실 수밖에 없겠죠. 사랑하던 연

인이 실은 배신자였다는 걸.”

“저희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

리를 증언할 거라 생각하세요?”

"네. 그러기 위해 데려온 것인

걸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

는 장로는 엘프들이 자신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 말을 듣지 않

으면 다른 방법을 쓰면 그만이고.

“지금은 절 이해하지 못하겠지

만 나중에는 달라질 겁니다. 이

모든 건 대의를 위함이니까요.”

“대의라고요?”

“참 슬프지 않나요. 너무 거대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힘이

라니.”

“정작 그 힘을 가진 이들은 이

토록 연약하기 그지없는데.”

어설프게 마음을 나눠주다가

비극으로 끝맺음할 거라면,차라

리 처음부터 여지를 주지 않는

편이 나았다.

누구와도 연을 맺지 않은 채,

고결하게 제 운명에 순응하고 자

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요정왕이 가져야 할 완벽한

모습이기에.

하지만 안타깝게도 항상 제 주

인이 되어야 할 자는 그렇지 못

했다. 매빈 감정에 휘둘리고,또

무너졌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리는 건 한 번이면 족했

다. 두 번 다신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의 왕은 요정과 인간이 함

께 하는 이상을 꿈꿨으나, 애당초

그런 건 불가능했습니다. 인간은

탐욕스럽고,요정은 과거를 잊지

못하니까요. 결국 비극은 반복될

뿐입니다.”

지금처럼.

장로에게 닿지 못한 검이 파르

르 허공에서 떨렸다.

피투성이가 된 와중에도 노려

보는 사내의 눈빛은 조금도 죽지

않았다.

방심한 사이 나무줄기를 뜯어

내고 무기를 던지는 것부터가 포

기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니까.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결국 끝

은 정해져 있는데.

장로는 검을 막기 위한 바람에

벗겨진 후드를 느긋하게 도로 썼

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그녀의

얼굴이 드러난 후였다.

“장로님이 왜……

장로의 얼굴을 확인한 미샤가

더듬더듬 말을 더듬다가 플렌을

돌아봤다. 하지만 놀란 건 플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역시도 당혹

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러난 장로의 얼굴은 이 자리

에 있는 모두가 아는 자의 것이

었다.

“그래도 기억을 찾지 말라고

했던 건 그래도 진심 어린 배려

였답니다. 어차피 요정의 삶은 기

니,기다리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

까요.”

“하지만 결국 일이 이렇게 되

었네요. 그러니 저도 해야 할 일

을 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정작 장로는 절 보는

시선이 어떤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선을 뻔히

알면서도 태연하게 괴물을 향해

손짓할 뿐이었다.

“그럼 슬슬 정리해볼까요. 다행

스럽게도 이곳에선 어떤 짓이 벌

어져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그리고 모든 정리가 끝나면

그만 깨워야겠죠.”

우리들의 새로운 왕을.

장로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

다.

그녀의 눈은 아주 진한 녹색이

었다. 모두가 다 아는 바로 그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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