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안 좋은 예감
“설마 지하가 황실 지하일 줄
은 꿈에도 몰랐네요.”
“자리만 잘 잡으면 오히려 이
런 곳이 숨기는 더 쉬웠을 겁니
다.”
“뭐,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어둠은 무섭다. 미샤는
칠흑 같은 이둠에 슬쩍 등불을
든 장로를 흘끔 올려다봤다. 인간
사회에 낯설 법도 한데,다행히도
그녀는 능숙하게 적응하고 있었
다.
“그나저나 얼마나 더 가야 하
는 걸까요?”
“일단 가봐야 알겠죠. 미로처럼
꼬여있는 길이지 않습니까.”
tt아니면,정령에게 도움을 요청
해보는 건 어떨까요?”
모처럼 괜찮은 의견을 냈다는
자부심에 미샤의 콧대가 한층 올
라갔다. 제 의견에 다들 깜짝 놀
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안 돼.”
하지만 정작 돌아온 건 단호한
말뿐이다. 미샤는 두 볼을 빵빵하
게 부풀렸다.
“왜 안 되는데.”
“수도에 온 후부터 정령들이
부름에 답하지 않아.”
“하여간 말라깽이는 필요할 때
는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쵸,장
로님?”
“미샤,그렇게 말하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고작 할
줄 아는 건 정령술밖에 없으면서
그것도 못하면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봐야죠. 플렌 말고 다른
요정을 데려왔어야 했어요.”
세상에 얼마나 멋지고,강한 요
정들이 많은데. 하필 정령사 노릇
도 못 하는 플렌과 동행하다니
정말 끔찍하다.
미샤는 혼잣말을 잘도 중얼거
리며 앞으로 씩씩하게 나섰다.
자신이 이토록 열렬하게 떠드
는 이유가 어둠 때문이라는 걸,
일행 중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
길 바라면서.
“그러고 보니,그자는 듀라한이
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나아가던 미샤를
보며 블러쉬가 슬쩍 운을 했다.
“진짜 듀라한이었어요? 벤시랑
같이 멸족당한 그 종족? 설마 했
는데 진짜 살아 있었나 보네요.”
“하도 섞여서 그렇게 부르긴
어려울 테지만,적어도 이 검이
효과는 있는 것으로 봐선 시작은
그랬을 겁니다.”
“윽,그 검 안 보여주셔도 되니
까 얼른 집어넣으세요. 솔직히 요
정 입장에서 그 검은 너무 꺼림
칙하단 말이에요.”
미샤가 기겁하며,플렌의 뒤로
쏙 물러났다. 원래도 피비린내가
심하던 블러쉬였지만,검을 될 때
면 더욱 그 냄새가 짙어졌다.
블러쉬는 혼혈인 플렌마저 얼
굴을 찌푸리게 하는 검의 존재에
도 태연해 보이는 장로를 홀끔
곁눈질했다.
애당초 플렌을 통해 블러쉬에
게 이 검을 선물한 건,장로였다.
"그런데,이 검은 도대체 어디
서 난 겁니까.”
많고 많은 요정의 물건 중 하
필 듀라한의 검을 선물해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심지어 그 검도 보통 검이 아
니라,동족을 잔인하게 살해해 원
한이 쌓일 대로 쌓인 저주받은
검인데.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교훈 삼아 제가 보관하고 있었던
거예요.”
"저라면,보관이 아니라 그대로
부숴버렸을 것 같은데. 저야 인간
이라 모르나, 요정에게는 픽 끔찍
한 물건 아닙니까/’
“그래서 더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상처가 아니니,마주하자고 말이
에요.”
장로의 차분한 목소리는 일말
의 동요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블러쉬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문이 풀려도 결국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겨버리니까.
그런 검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왜 둘이 날뛰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지.
검 관해 몇 가지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하필 빛이 보였다.
블러쉬는 의뭉스러운 여자를
한 번 흘끔 보고는 빛 쪽으로 몸
을 돌렸다.
일단 심포니아를 찾는 게 우선
이었다.
“뭔가 찾았습니까?”
“아뇨. 여긴 없어요.”
“여기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전진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
네요.”
다들 고개를 젓는 와중에 장로
가 살짝 손을 들었다. 덕분에 소
매가 홀러내리며 가는 팔이 좀
더 제대로 보였다.
“아
천천히 장로가 가리키는 방향
으로 고개를 든 일행의 입에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탄식이
홀러 나왔다.
천장에 무언가 있었다.
마치 벌레의 고치를 닮은. 그
래,그건 정말로 거대한 벌레의
고치처럼 보였다.
하지만 평범한 고치 같지는 않
았다. 오히려 고치는 하나의 태아
를 연상시켰다.
꿀꺽-.
그 순간,침을 삼키는 소리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블러쉬
가 벽을 타고 올라가 고치를 살
폈다. 심장박동처럼 쿵쿵 울리는
고치는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
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는,원초적인 감에 따른
의문이.
“아무래도 위험해 보이니 건드
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혹시라도
괜히 손댔다가 이상한 게 튀어나
오면 곤란하잖아요.”
" ,,..
“괴물의 소굴이에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장로의 말에 블러쉬는 반쯤 뻤
던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고치
안의 내용품이 궁금하긴 했으나,
이성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였다.
뒤늦게 침입자를 알아차린 듯,
땅이 울렸다. 원가 오고 있었다.
블러쉬는 재빨리 내려와 경계
태세를 취했다.
위험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미로 같은 지하 굴 안쪽부터
무언가 꾸물거리며 밀려 들어오
고 있었다.
“저,저게 뭐예요?”
미샤가 말을 잇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건 거대한 검은 점액질 덩어
리였다. 위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
한 검은 액체가 이곳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블러쉬가 원래
아는 것과는 다소 달랐다.
훨씬 더 거대해 공간을 꾸역꾸
역 채우고 있을뿐더러,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살아있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살
아있다.
검은 액체 사이로 번뜩이는 녹
색 눈동자를 보며 블러쉬는 허탈
한 숨을 뱉었다.
“듈입니다.”
“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둘이
요?”
돌아온 대답에 답할 새는 없었
다.
블러쉬는 검을 뽑은 채,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하긴 하
지만 분명 저 괴물도 일행을 인
지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빤히 바
라만 보는 게 전부지만,언제 돌
변해 공격해올지 몰랐다.
“지켜드릴 수 없으니,최대한
잘 피하면서 도망치십시오.”
“그게 무슨,까아악!”
“미샤!”
과앙-!
“얼른!”
역시 방심할 수 없다.
블러쉬는 날아드는 괴물의 공
격을 막아내며 마른 입술을 훑었
다. 막았을 뿐인데,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밀렸다.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
졌으나 힘은 오히려 강해져 있었
다.
다만, 다행스러운 건 그리 머리
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
다.
몸이 커지면서 이성이 사라진
건지,아니면 몸이 뜻대로 움직이
지 않는 건지 반응이 배 이상 느
렸다. 충분히 승산은 있었다.
블러쉬는 입안에 고인 피를 뱉
어내며 검을 고쳐 쥐었다.
“이자는 제가 처리할 테니,주
술을 찾아 해체해주시면 됩니다.”
“아
“넋 놓지 말고 얼른!”
원한 가득한 검을 렬 때마다
손목이 뻐근해졌지만 못 참을 정
도는 아니었다. 이제라도 마무리
짓지 못한 끝을 볼 수 있다면 기
꺼이 참아낼 수 있었다.
블러쉬는 제게 쏘아지는 검은
점액질을 피하며,빠르게 괴물의
공격 패턴을 외워나갔다. 그리고
괴물의 움직임이 느리다는 이점
을 활용해 빠르게 몸체를 잘라냈
다.
점액질 몸체는 쉽게 잘리진 않
았으나, 막상 잘라놓으면 다시 붙
지 않았다.
이대로 처리하면 시간이 걸리
긴 하겠지만 곧 끝날 것이었다.
푸욱-.
발돋움을 하려는 순간,복부를
관통하는 서늘한 감각만 없었더
라면.
블러쉬는 반사적으로 피 묻은
복부를 만졌다.
분명 상처는 있는데,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무기에 찔린 것
이 아니었다.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
이 그를 공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매서운 공격이
날아들었다.
“……왜 이리도 안 좋은 예감
은 잘도 맞는 건지.”
블러쉬는 다가오는 거대한 액
체를 보며 쓰게 웃었다.
피하고자 했지만 피할 수 없었
다.
이번에는 땅에서 튀어나온 나
무줄기가 그의 다리를 묶고 있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