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85화 (185/204)

185화. 가장 어두운 곳

“요정은 살생을 싫어한다 들었

는데,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봅

니다.”

“살생이라는 건, 사실 기준이

명확하지 않죠. 늑대가 사슴을 잡

아먹는 것 가지고 살생이라 말하

지 않으니까요.”

장로가 가진 특유의 오묘한 분

위기 탓일까,어쩐지 감각이 예민

해지는 기분이다.

블러쉬는 천 아래로 보이는 은

발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껏 그녀가 직접 나서는 법

은 없었으나,결국 이렇게 도와주

러 오지 않았던가. 기껏 얻은 강

력한 아군에게 굳이 이런 감정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의외의 대답이군요.”

“요정의 기준을 인간에게 적용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고요.”

하지만 역시 이상한 기분을 지

울 수 없다.

블러쉬는 평정을 유지하기를

포기하며 절 잡은 횐 손을 가만

히 응시했다.

장로의 말은 얼핏 좋은 소리

같으나,자세히 들여다보면 뼈가

느껴졌다. 장로는 인간과 요정,

둘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왜 그렇고 계세요? 한시라도

빨리 아가씨를 구해야죠.”

입술을 삐죽 내미는 미샤의 귀

는 끝이 뾰족했다. 이제는 굳이

주술로 귀를 감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생김새

가 조금 다르긴 했어도 지금껏

봤던 미샤는 요정이라 해도 인간

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요정이 아니더라도 세

상에는 조금 남다른 인간들이 많

아 무던한 사내의 눈에는 요정이

나,인간이나 구분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관점일 뿐,

요정의 입장에선 아니라도 느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자꾸만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떠

돌아 얻은 감각은 특히 안 좋은

일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네. 일단은 여유 부릴 때가 아

니니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겠

습니다. 심포니아를 찾고,주술을

파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도록

말입니다.”

블러쉬는 애써 신경을 억누르

며 고개를 돌렸다.

묘한 기분이 들어도 지금은 할

수 없다. 확인은 나중이었고, 일

단 심포니아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

까?”

“뭐든 시켜만 줘요. 아가씨를

구하는 일에는 뭐든 가리지 않고

도울 테니까요.”

“의심 가는 곳이 있긴 합니다.

다만,그곳에는 듈-,그자도 같이

있을 겁니다.”

“차라리 잘됐네요. 그딴 놈은

당장에 해치워버리면 그만이잖아

요. 저희 측에는 이제 장로님도

계시니 그런 녀석은 전혀 문제없

어요.”

미샤가 가슴을 팡팡 치며 헤실

헤실 웃었다. 작은 체구와 다르게

그녀가 쁨어내는 기백은 남달랐

다.

“듈을 상대하는 건 제가 하겠

으니,나머지 분들은 주술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보단 요정들

이 주술에는 능할 테니까요.”

“그건 편견이에요. 요정이라고

해서 다 주술에 능한 건 아니거

든요. 솔직히 그 일은 장로님만

하셔도 충분할 거예요.”

“……혼자서 말입니까?”

“도움이 되기 위해 온 것이니,

그 정도는 해내야 면이 서겠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

방 정리될 겁니다.”

천 아래로 보이는 장로의 입술

이 호선을 그렸다.

어느덧 그녀의 주변에는 바람

이 강하게 맴돌고 있었다.

“돌아왔군,대공! 갑자기 티어

드롭의 군대가 날뛰고 있어 곤란

한 참이었는데,그나마 다행-”

“성문을 여십시오,”

“뭐? 돌아오자마자,무슨 소리

를 하는 거야. 지금 성문을 열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하는

소리인가?”

“티어드롭 공작이 오르젠타 대

공의 편에 섰습니다.”

“그것과 성문을 여는 것이 무

슨 상관인데?”

황태자가 당황해하며 입을 삐

끔거렸지만,블러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쏟아냈다.

“지금 오르젠타 대공은 더 많

은 피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 피?”

“길게는 말씀 못 드립니다. 하

나,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성문을 열고 도망치는 반란군

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장로는 금단의 주술을 발동시

키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하다 말

했고,그중 가장 좋은 것이 원망

섞인 피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

면,지금의 싸움은 어떻게서든 피

해야 했다.

“그들을 받아들였다가 생기는

일은 어쩌려고. 저들은 반란군이

야.”

“제국인이기도 합니다.”

“반란군,혹은 폭도라 불리는

이들 증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이

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티어드롭의 군대는 완벽하게 무

장한 상태죠. 싸움이 될 리 없습

니다. 그저 학살이 이루어질 뿐입

니다.”

“결정은 전하께서 하시는 겁니

다. 저들을 폭도로 부를지, 반란

군으로 남게 할지,그게 아니라면

그저 어느 평범한 제국인으로 둘

지.”

“……저들이 내말을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나?”

황태자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단호하게 방향을 제시하는 블러

쉬와 다르게,자신은 그럴 수 없

었다.

황제 대신,권좌를 차지하긴 했

으나 반란군들에게 그 사실이 와

닿을 리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황제나,황태자나 할 것 없이 전

부 그냥 황실 놈들일 뿐이었다.

“티어드롭에만 군대가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방금 전에는 피를 흘리지 말

라면서.”

“싸우라는 게 아닙니다.”

보호하라는 거지.

그 말을 하면서 블러쉬는 웃었

다. 솔직히 한때 전쟁에 미친 살

육귀 소리까지 듣던 그가 할 소

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해볼 법한

이야기였다.

“보호를 하라고?”

“황실군은 실력이 떨어지긴 하

나, 수는 가장 많지 않습니까. 그

걸 이용하면 됩니다. 군대를 보내

되,싸우지 말고 최대한 빠르게

사람을 찾고 보호해 황궁까지 데

려오게 하는 겁니다.”

“대공은 이런 식으로도 황실을

모독하는군.”

“이것도 전시라서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하……

겉으로는 무심해 보여도 이런

모습을 보면 참 얄입다. 황태자는

혀를 차면서도 일단 블러쉬의 말

에 귀를 기울였다.

억울해도 빠른 판단을 하기에

는 자신에게는 경험이 부족했다.

어쨌든 지금은 블러쉬의 지시에

따르는 편이 가장 나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정말로 효

과적일까? 오히려 우리 군대가

역습당해 더 많은 피라도 흘리면

그게 더 상황이 악화되는 건 아

닌가?”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

니다. 어차피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정리될 테니까요.”

“정리?”

"경험 많은 용병은 어디든 잘

도 숨어들곤 하죠.”

“설마……

“황실 군대가 사람들을 보호하

는 동안,제 사람들이 움직일 겁

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사방

에 흩어져 있던 병사들을 모나차

르트로 모았고,또 이제는 수도로

데려왔다.

그들은 전부 일당백은 하는 용

병들이니 티어드롭의 정예군은

충분히 상대하고 남을 것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수도가 페허가

되어 사방이 난장판인 장소는 주

변 모든 것들을 이용해 승리를

끌어내는 용병들에게 있어 최적

의 조건이기도 했고.

슬슬 용병들이 수도에 도착할

시간이니,황실군까지 더해진다면

쉽게 상황은 정리될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은 나지 않았다.

블러쉬는 습관적으로 검 손잡

이를 만지며 성큼성큼 걸음을 됐

고,황태자는 서둘러 그의 앞을

막아섰다.

어딜 가려는지는 모르나,지금

은 심적으로 블러쉬가 옆에 있어

줬으면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또 어딜 가

려는 거고?”

“아내를 찾으러 갑니다.”

“아내? 그대의 아내를 왜 여기

서 찾아?”

“전하께서는 가장 어두운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람.”

“바로 이 밑입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얼굴을 찌

푸리는 황태자에 블러쉬는 가볍

게 발로 바닥을 둥둥 쳤다.

그래봤자 단단한 대리석 바닥

이 느껴질 뿐이지만, 블러쉬가 말

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화려한 대리석 밑,그리고 그보

다 더 밑. 대범하게도 가장 밝은

곳 바로 밑에 숨어 꿍꿍이를 벌

이고 있는 자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애당초 블러쉬가 황궁에 온 목

적은 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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