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84화 (184/204)

184화. 믿는 거지

챙!

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블러쉬는 힘의 반동으로 물러

서면서도 눈으로는 재빨리 빈틈

을 찾았다. 분명 실력으로는 블러

쉬 쪽이 앞섰음에도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았다.

반평생을 티어드롭의 개로 더

러운 일들을 해내온 픽스 블랑

티어드롭의 검은 용병과 크게 다

를 바가 없었다. 블러쉬와 검을

쓰는 방식이 비슷했고,심지어 변

칙은 더 잘 썼다.

픽스는 단순히 일부러 틈을 보

여 공격을 허하고 이를 이용해

역공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아낌

없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했다.

좋게 말하면 교묘했고,나쁘게

말하면 지독한 방법이었다. 그건

어떻게서든 상대를 죽이고자 하

는 목적이 담긴 검술이었다.

용병의 삶에 익숙한 블러쉬가

아니었다면,속절없이 당했을 것

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용병

은 적응이 빨라야 살아남았고 그

만큼 블러쉬는 금세 픽스의 버릇

을 파악했다.

그 후부터는 실력 차는 명백했

다.

결국 블러쉬의 검은 픽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치명상이었

다.

“더는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

을 텐데.”

블러쉬의 발에 걷어차인 검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멀리 날

아갔다.

픽스는 어깨의 자상을 움켜쥔

채로 블러쉬를 올려다봤다.

어느덧 서늘한 검 끝이 픽스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왜 죽이지 않는 거지?”

“그자의 수족 노릇을 한 작자

에게 들을 게 있을 듯해서지."

일단 목숨은 부지했으나 딱 그

정도였다. 꾸욱,살갗을 눌러오는

칼끝은 자비롭지 않았다.

"내가 말할 것 같은가?”

“말하게 만들면 되겠지.”

“그럼 어디 해보시지 그래. 아

무리 고문해도 나올 건 없겠지

만.”

픽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차피 그는 이런 일에 익숙했다.

“말해. 심포니아는 어디 있는

지.”

“분명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

고 했을 텐데.”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

하는 미치광이에게 신의라도 지

키고 싶은 건가? 그자는 어차피

그쪽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텐데.”

듈이 정말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한들,인간의 목숨을

벌레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그자

가 소원을 이루어줄 리 없었다.

결국 이마저도 하나의 유희에

가까웠다. 강한 힘과 다르게, 듈

은 어린아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순간의 감정을 즐길 뿐이

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픽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둘을 지키고자

했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블러쉬는 검을 좀 더 겨누다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상처 입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니 협박해 캐

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달그락거리는 쇳소리

가 났다.

블러쉬에게는 익숙한,군대의

철갑옷 소리였다.

"아군을 부른 건가?”

“글쎄.”

다 산 사람처럼 생기 없던 표

정을 짓고 있던 픽스가 고개를

움직였다. 그로 인해 그의 목에는

칼끝에 베인 상처가 길게 났다.

하지만 정작 피를 흘리고 있는

사내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눈

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블러쉬는 별안간 움직이는 픽

스에 반사적으로 칼날을 세웠다

가 이내 헛숨을 뱉었다.

애당초 픽스는 아군이 왔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는 게 아니었

다. 그가 기삐하고 있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픽스의 시선이 향한 끝에는 티

어드롭 공작저가 있었다.

굳게 문을 닫고 버티던 공작저

의 문이 어느덧 거리가 제법 있

음에도 보일 만큼 활짝 열려있었

다.

미숙한 반란군에게 함락되었을

리는 없으니,스스로 열었을 확률

이 컸다.

군대를 내보내기 위해서.

이미 무너진 수도는 티어드롭

의 군대들로 인해 또 한 번 무너

질 것이었다.

그리고,군대를 이끄는 자는 당

연히 티어드롭 공작일 테고.

“하……

그제야 블러쉬는 깨달았다.

눈앞의 사내는 되돌리고 싶은

게 아니라,그저 망가트리고 싶을

뿐이라는 걸.

“지독한 복수로군.”

“하지만 그쪽도 곧 이해하게

되겠지. 이 감정은 잃은 자들만이

느낄 수 있으니까.”

U ,,

“그리고, 찾게 될 거야. 어떤

식의 복수가 가장 잔인할 수 있

을지 말이지.”

자신이 원하던 모습을 확인했

기 때문일까,픽스의 두 어깨가

축 처졌다.

“그래서 만족했나?”

“대답 못 하겠나 보군.”

블러쉬는 말없이 검을 거뒀다.

애당초 대답을 기다리던 게 아

니었다. 이미 표정만 봐도 알았

다.

그는 더는 제 몸이 망가지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악

귀처럼 독하게 들지 않았다. 대

신,제 안의 화를 전부 비어낸 양

텅 빈 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런 인간을 베어봤자,별 의미

가 없었다. 오히려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자멸하게끔 하는 편이 나

았다.

다 죽어가는 인간보다 다른 문

제를 처리하는 게 급선무이기도

했고.

그렇게 블러쉬가 돌아서서 서

너 걸음을 떼었을 때,픽스의 입

이 다시금 열렸다.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U ,,

“그래,말해주지. 걘 죽었어. 다

행스럽게도 잡아먹히지 않고 그

대로 소멸해버렸지.”

“그나마 다행이지. 잡아먹혔다

간 저런 꼴로만 남았을 테니까.”

픽스의 시선이 빼빼 말라비틀

어진 시체에 닿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블러쉬는 그것을

흘끔 볼 뿐, 딱히 반응이 없었다.

“왜 아무렇지 않지? 그 아이의

행방을 찾던 게 아닌가?”

“행방은 찾고 있지.”

“……아,믿고 싶지 않은 거

군.”

픽스가 쓰게 웃었다.

소중한 이들을 잃은 자들이 보

이는 반응은 하나 같이 비슷했다.

잃은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부정

했고,외면했다.

그런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데도.

지금이야 부정하겠지만,결국

저 당당한 어깨도 곧 자신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당연히 그

럴 거라고 자신했다. 정작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반대야. 오히려 믿는 거지.”

“믿어?”

이번에는 블러쉬 쪽이 대답하

지 않았다. 그저 뒤 한 번 돌아보

지 않고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

다.

걱정되는 건 사실이나,동시에

그렇지 않기도 했다.

애당초 사내는 그 누구보다 심

포니아를 잘 안다 자부했다.

그녀는 항상 길을 찾았고,예상

치 못한 결과를 내곤 했다. 어떤

위기가 온다고 한들,그 사실을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지하.”

“지하로 가보는 게 좋을 거다.”

픽스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무슨 변덕이

들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

다.

다만,조금 짜증이 난 것 같았

다. 아무렇지 않게 믿음을 운운하

던 사내의 꼴을 보고 있자면, 지

난 일이 떠올랐으니까.

사랑하던 연인을 먼저 떠나보

낸 후, 남은 건 복수만이 아니었

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죄책감도

함께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제 아비의

죄에 대신 울며 용서를

구하던

어린 조카의 숨을 거두던 그날의

기억이 더해진 채로.

* 水*

“아가씨는요?”

“아직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

다.”

“그런 게 어딨어요! 무조건 아

가씨를 지켰어야-”

“기다려,미샤. 이건 대공을 탓

할 게 아니야.”

플렌이 당장이라도 블러쉬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인 미샤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상황을 알려주시죠. 저희도 상

황 파악 후 바로 움직이겠습니

다."

“아무래도 듈-,그자는 시간을

거스를 모양입니다.”

“시간이요?”

“단순히 시간을 되돌릴 게 아

니라,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바꾸

는 게 목적인 듯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말이 안 되진 않을 겁니다. 그

자가 금기된 주술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라면요.”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이가

입을 됐을 뿐인데,플렌과 미샤

두 요정 모두 급하게 몸을 낮췄

다.

두 사람이 취하는 태도만으로

도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

구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블러쉬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간단한 예를 갖췄다.

묘령의 여자는 후드를 깊게 눌

러쓰고 있어 외형이 잘 보이진

않았다.

다만,맑은 목소리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천 밑으로 보이는

흰 피부에는 주름 하나 잡혀있지

않았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으리

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묘한 분위기가 있었

다. 감이 좋은 사내는 여자가 다

가온 후부터 주변 공기부터가 달

라졌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요정의 힘을 빌려주신다고 하

시더니, 거물을 데려오셨군요.”

“어설픈 요정 무리보다는 장로

님 한 분이 오시는 게 낫죠. 노인

네들의 반대가 좀 있었지만.”

“미샤,장로님 앞에선 말조심해

야 한다고 했지.”

“충분히 조심하고 있으니까 내

게 충고하지마.”

미샤와 플렌이 옥신각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 나온 장로

가 블러쉬의 팔에 손을 을렸다.

살생을 혐오하는 요정답지 않

게,그녀는 피 묻은 팔에 손을 댔

음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검을 내어드릴 때는 걱정했는

데,아무렇지 않으신가 봅니다.”

“원한보다 더 무거운 걸 짊어

지고 살아온 터라 이 정도는 괜

잖습니다.”

“그래도 너무 많은 피를 흘리

진 마세요. 살기 위한 피와 욕심

으로 흘린 무고한 피는 다른 법

이니.”

“충고십니까?”

“걱정입니다. 오래된 것이 되

면,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서

요.”

“……명심하죠. 하나,그건 이

번 일이 끝난 후의 이야기입니

다.”

심포니아를 만난 후,날이 무뎌

지긴 했으나 본질이 달라진 건

아니 었다.

사내는 평화 같은 어쯤잖은 소

리보다는 검이 더 가깝게 느껴지

는 삶을 살았다.

제 사람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

각하면 망설임 없이 검으로 벨

것이었고,제아무리 엘프의 장로

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감출 생

각이 없었다.

하지만 당연히 부정적인 반응

이 나오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장로는 덤덤했다. 아니,오히려

후드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입가

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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