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78화 (178/204)

178화. 남아 있는 의지

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치며 빠르게 뛴다.

솜털마저 바짝 서고 숨이 거칠어진

다.

나는 홀러드는 힘을 이기지 못하

고 비틀거렸다.

“포기해. 넌 안 돼,”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둘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돌아왔

다.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두고 본다고 해서 달라질 거라

고 생각해? 고작 일부만 흡수하고

도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그 이상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결국

끝은 정해져 있어.”

그대로 터져 죽을 거야,뻥 하

고.

듈은 짓궂게 웃어 보이고는 팔짱

을 꼈다. 처음에는 반항이라도 하

려던 모양이나,이제 그마저도 생

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언제쯤 무너질지 가늠해보

면서.

“옷!,’

어떻게든 버티고자 했는데,결국

참지 못한 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나는 왼쪽

가슴을 움켜쥐면서 뒷걸음질 쳤다.

거대해도 너무 거대했다. 고작

일부를 흡수했음에도 거대한 힘은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날 짓눌러

으깨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둘에게서 힘을 빨아들이

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맹렬히 나를 노려보는 사내는 내

틈을 노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역으로 잡아먹히고 말 것

이었다.

“그래도 나름 잘 버티네.”

“결국 그마저도 곧 한계가 을 것

같지만.”

듈이 얄궂게 이죽거렸지만 내겐

이제 더 대답할 여력도 없었다. 하

도 세게 입술을 깨물어 턱이 다 뻐

근해졌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버티는 게 전부였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듈의 말처럼

그대로 터져 죽는 게 아닐까. 생각

만 해도 끔찍한 상상에 입이 바싹

말랐다. 될 수 있으면 곱씹지 않으

려 해도 한 번 떠오른 두려움은 쉽

게 가라앉기 어려웠다.

'이대론 안 돼. 다른 방법을 찾아

“그게 아니지. 조금 더 천천히.”

“자꾸 억지로 힘을 사용해 누르

려고만 하니 안 되는 거야. 흐름에

맡겨야지.”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자연스레

몸에 힘이 풀렸다. 그건 아주 오래

된 기억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도로

떴다. 오래된 기억에 절로 목이 멨

지만 지금은 추억에 빠져 있을 때

가 아니었다.

“왜 갑자기 멈추고 그래? 이제

포기한 건가?”

내가 힘을 흡수하기를 멈췄다는

걸 알아차린 듈이 팔짱을 풀었다.

자신만만한 눈을 보아하니 슬슬 내

가 한계가 왔다고 여기는 모양이었

다.

나는 몸을 축 늘어트렸고 듈은

반대로 몸을 똑바로 세웠다.

“아니. 그 반대지.”

“아직도 입은 잘만 살아있군.”

기세가 자신에게 돌아갔다고 믿

고 있기 때문인지, 그는 완전히 평

정을 되찾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

서 그의 욕망이 사라졌다는 건 아

니지만.

나는 먹잇감을 발견하고 군침 흘

리는 포식자처럼 노골적으로 나를

노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그대

로 걸었다.

힘을 거두어들이는 데 무리한 몸

이 비틀거렸지만 더는 그에게 패배

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야? 그 눈은?”

“다가오지 마.”

뭔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느낀

걸까. 듈이 답지 않게 다급히 외쳤

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는 대

신,묵묵히 그에게 다가갔다.

“다가오지 말라고 했어.”

듈은 서둘러 힘을 쓰기 위해 손

을 움직였지만,그가 뭘 하든 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안 되는 거지? 아직 힘이

남아 있는데? 왜?”

“나 때문이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냥 부탁을 좀 했을 뿐이야.

날 좀 도와달라고.”

“부탁?”

듈의 말대로 억지로 힘을 다 흡

수했다면 결국 나는 터져 죽었을

것이었다.

애당초 그 힘은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거 알아? 네가 가진 힘조차도

아주 일부라는 걸.”

“그렇겠지. 내가 만났을 때의 그

자는 무척 약해져 있었으니까, 분

명 어딘가에 힘을 숨겼던 거야. 그

래서 너 같은 게 나온 거고.”

“그는 단 한 번도 힘을 숨긴 적

은 없어. 애당초 숨길 이유도 없었

지.”

그건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요정왕이라 부른다고 해도,결국

그건 인간이 사용하는 호칭에 불가

했다. 애당초 그는 뭔가로 지칭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바람이었고,때론 불이나

물이 되기도 하였으며,흙으로 바

뀔 수도 있었다. 그는 모든 자연

그 자체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전부 그의 힘이었다.

“그는 널 동정했지. 그래서 잡아

먹혀준 거야.”

동정?”

“그 작은 동정이 이런 식으로 돌

아올 줄 몰랐겠지만.”

내 손짓에 맞춰 듈이 천천히 무

를을 꿇었다. 물론 그 순간에도 그

는 끝까지 반항하려 했지만 소용없

었다. 요정의 피가 흐르는 이상,그

는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힘을 거

역할 수 없었다.

나는 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쓰

게 웃었다.

그는 한때,내가 가장 좋아하던

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에 나는 더욱 듈을 용서할 수 없었

다.

“그는 다정했어. 누구보다 거대

한 힘이면서 작은 새 하나 그냥 두

지 못하고 돌봐 주곤 했거든.”

“다정? 웃기는군. 그자는 아무것

도 하지 않았어. 제 밑의 요정들이

고통받고 살육당하는 데에도 끝까

지 외면했지.”

“그가 끝까지 외면했다면 네가

있지 않았겠지.”

“거대한 힘은 세계의 균형을 무

너트려. 그렇기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했어. 그저 바라보는

방관자의 역할만이 그의 것이었지.

결국 지키지 못했지만.”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 자만

할 법도 한데,요정왕은 그러지 않

았다. 그는 되레 만물을 사랑했고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지 못했다.

“요정왕은 무엇도 외면하지 않았

어.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을 하려 했지.”

“그는 세계에 개입한 대가로 업

보를 떠안아야 했어. 특히 그가 살

린 생명은 더 했지. 살아있는 생명

들은 다들 죄를 짓기 마련인데,그

업보는 모조리 요정왕의 것으로 남

아버 렸거든.”

요정왕은 동족을 잃고 죽어가던

어린 요정을 가엽게 여겼고 처음으

로 누군가를 살렸다. 그리고,그 작

은 동정은 결국 절대적인 힘조차

무너트릴 만큼 무거운 업보로 돌아

왔다.

나는 손을 뻗어 듈의 얼굴을 감

싸 쥐었다.

“하지만 이젠 안 돼.”

“당신은 이제 끝났어.”

“누구 마음대로?”

“요정왕의 의지대로.”

나는 웃었다. 힘과 힘-께,기억도

내게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 나는 내가 왜 살아났는지

알았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뭘 해

야 하는지도.

“죽은 자가 뭘 한다고.”

“그는 죽었지만,의지는 남아 있

거든.”

내가 그 의지니까.

나는 손에 힘을 줬다. 힘을 빼앗

긴 듈의 얼굴은 점차 변형되어 요

정왕이 아닌,내가 모르는 이들의

얼굴로 수없이 변하고 있었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하나둘,바닥으

로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

다.

“잔당은? 후환이 남지 않도록 하

려면 확실히 처리해야 해.”

“아뇨. 처리는 필요 없습니다.”

“모나차르트 대공은 겁이 없는

모양이군. 혹시라도 그들이 잘못

입을 놀리면 어쩌려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수도를 빠

져나가긴 어려운 데다가 도망친다

해도 별수 있겠습니까? 황가의 핏

줄이 없는 한,침묵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설마,벌써 그 아이를 확보한

건가?”

“후계 구도가 복잡해지는 건 사

양이니까요.”

블러쉬는 묵묵히 대답하면서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어여쁜 아

내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도 아쉬운

데,굳이 시커먼 사내와 가깝게 붙

어있을 이유는 없었다.

“모나차르트 대공은 생각보다 일

을 잘 해내는군.”

“전하께서는 생각보다 많이 부족

하시더군요.”

“그건 내가 잠시 훈련을 쉬어서

감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랬던 걸

세!”

블러쉬가 지적하자 황태자의 얼

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까 황

제의 병사를 제압할 때 당할 뻔한

걸,블러쉬가 구해줬던 게 생각났

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훈련을 더 할 필요가 있

어 보이긴 했죠.”

“모나차르트 대공.”

황태자는 눈썹을 추켜올리면서도

블러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야만인이라 깔봤던 사내는 지금

껏 황태자가 봐온 이들 중 가장 강

했다. 단순히 멋이 아닌,생존이 곁

들어진 검은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

서는 법을 몰랐다. 모나차르트 대

공에게 도움을 받은 게 부끄럽긴

했지만,그의 검술에 가슴이 뛰었

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황태자는 한 번 더 흘끔 블러쉬

를 보면서 애써 덤덤한 척 목소리

를 가다듬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내부 정리가

쉽게 끝났군.”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지 않으

시는 게 좋을 겁니다. 보통 그렇게

긴장을 풀면 얼마 안 가 일이 일어

나기 마련이거든요.”

“모나차르트 대공이 농담을 좋아

할 줄은 몰랐는데.”

“농담이 아닙니다.”

블러쉬는 표정 없는 얼굴로 검을

빼 들었다.

황태자는 절 향해 겨눠진 검 끝

에 한 소리를 하려다가 이내 숨을

삼켰다.

황궁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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