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76화 (176/204)

176화. 모든 비극은

* * *

등 뒤에 있는 호위는 셋,

는 전투에는 그다지 소질이

저 셋만 처리하면 충분히

수 있었지만 일단은 참고,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아버지

없으니

도망칠

그들을

적당히 장단에서 맞춰주며 이 김

에 듈의 근거지를 알아낼 셈이었

다.

그 성격이라면,분명 수도 어딘

가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며 낄낄대

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그 예상

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나는 가만히 내부를 살피며 입매

를 삐뚜름하게 세웠다.

적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있었

다.

“배신감이 클 거라는 걸 안단다.

하지만 이 못난 아비를 조금만 이

해해주면 좋겠구나.”

“이런 상황에서 이해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 심한 것 같은데.”

나는 내 손목을 결박한 족쇄를

내보이며 얼굴을 찌푸렸다.

도주를 염려한 것인지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 저들은 내가 아버지

의 소식을 듣고 탑으로 내려오자마

자 내 손목에 걸쇠부터 채웠고 덕

분에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의 기분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었

다.

찰랑거리는 사슬 소리는 분위기

에 걸맞지 않게 경쾌해 헛웃음이

나는 건 덤이었고 말이다.

“이제 날 아버지로도 대해주지

않을 셈인가 보구나.”

“아버지로 대우받길 바란다면 지

금이라도 멈춰. 그러면 얼마든지

대우해줄 테니까. 당신이 그럴 수

있을 리 없겠지만 말이지.”

“당신은 아버지도 아냐. 그럴 자

격도 없어.”

나는 혐오를 감추지 않으면서 입

술을 이죽거렸다.

티어드롭 공작은 그런 나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심포니아. 제발,정도껏 기어오

르렴. 애당초 내 자격은 네가 운운

할 게 아니니.”

“샤리에트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걸. 그건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아?”

“다 아는 척하지 말렴. 샤리에트

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거역한 적

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그랬지. 전 사리 분별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였고,아버

지를 누구보다 좋아했으니까. 그게

옳은 일인지,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냥 당신 말에 따른 거

야.”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내가 아프다

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더 아프지 않기 위해선

매일 약을 먹고 시기에 맞게 주사

를 맞아야 한다고.

약은 정말이지 더럽게 맛없었고

여린 살을 뚫는 주사는 그 이상으

로 아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병

이 낫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심하게 앓을 뿐이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렸다.

약을 먹고 나면 주어지는 달콤한

간식을 좋아했고, 주사를 맞은 날

이면 갖고 싶었던 선물을 받았고,

무엇보다 그 끝에는 바쁜 와중에도

내게 시간을 내주는 아버지가 있었

으니까.

간식도,선물도 다 좋았지만,나

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내 머리

를 쓰다듬으면서 요정의 옛이야기

를 듣는 걸 가장 좋아했었다.

“아버지가 세상의 전부였던 꼬마

가 어떻게 알겠어. 자신이 실험 쥐

에 불과했다는 걸 말이야.”

“말 가려서 하렴.”

“그딴 짓을 하고도 고작 실험 쥐

라는 말이 거슬리는 거야?”

“……도대체 누구에게 뭘 들은

거지? 픽스,그 녀석인가?”

티어드롭 공작이 이마를 짚은

채, 미간을 좁혔다. 거칠게 머리카

락을 쓸어올리는 그의 손길에서는

짜증이 잔뜩 묻어있었다.

“누구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중요한 건 다

른 거지.”

“당신이 샤리에트를 되살리려는

게 순수하게 딸을 그리워하는 건

지. 아니면 당신의 걸작을 되돌려

받기 위함인 건지. 과연 둘 중 어

느 쪽인지 말이야.”

샤리에트에게 특별하다는 수식어

가 붙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별하다는 건 남다르다는 뜻이

였으며,그녀, 그러니까 나는 정말

로 다른 사람과 달랐으니까.

나는 명맥이 끊어진 요정의 힘을

지니고 태어났다.

물론 그 비밀은 내 아버지라는

작자에 의해 감춰졌지만,그렇다고

아이가 받을 기대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티어드롭 공작은 샤리에트에게

많은 걸 걸었다.

자신의 딸이야말로 티어드롭의

진정한 후계자로,모든 것을 가지

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샤리에트가

가진 힘이란 정말로 미약하기 그지

없어 어린 요정이 치는 장난과 크

게 다를 바가 없는 수준에 불과했

다.

티어드롭 공작은 크게 실망했지

만 희망을 버리진 못했다.

쉽게 포기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후계자에게는 훌륭한 재

능이 있었다.

딸이 완벽해지기까지는 부족한

건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모든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넌 믿지

않을 것 같구나. 내가 보기에 넌

이미 픽스의 말에 홀려 넘어간 것

처럼 보이니 말이야. 하지만 이건

알아두렴.”

“뭘 말이지?”

“난 진심으로 샤리에트를 사랑했

단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의 인생

을 화려하게 열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잖니. 그리고 지금도 계속 그

렇지.”

“사랑?”

“그리고,그건 너도 마찬가지였

지. 내게 있어서 너는 특별한 아이

였거든. 하지만 결국 그것도 한계

가 있더구나.”

족쇄로 묶인 내 손 위로 티어드

롭 공작의 손이 겹쳐졌다.

솜털로 어루만지듯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손길은 익히 내가 아는

것이었다.

나는 나와 시선을 맞추고,흘러

내린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티어드롭 공작

에게 진저리치듯 주먹을 꽉 쥐었

다.

“너는 샤리에트 다음으로 훌륭한

아이였지만,완벽하다 말하기엔 부

족했지. 네 몸에는 티어드롭의 피

가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으니

까.”

“……설마, 날 버리는 이유가 그

게 다야?”

“아무리 마음이 가도 문득 깨닫

고 떠오르는 생각은 어쩔 수 없었

지. 티어드롭의 피가 흐르지 않는

너조차 이토록 잘 해내는데,진짜

내 딸이라면 그 이상일 테니까.”

“어쩌겠니. 핏줄이란 게 이런 것

인데.”

한 핏줄인 제 형제자매를 짓밟고

권력을 누려온 티어드롭 공작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그는 퍽 만족

스럽게 웃고 있었다.

“너도 네 친부모를 만났다면 나

대신, 그들을 선택했을 거란다. 그

러니 날 너무 원망 말렴. 그리고

무엇보다 넌 지금 큰일을 하려는

거잖니.”

'‘ ,,

“네 희생은 진짜 대륙의 주인을

위한 밑거름이 될 거란다.”

나는 이루지 못했지만 내 아이는

다를 테니.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사랑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나는 넋을 놓은 채,멍하니 티어

드롭 공작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때마침 삐걱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벌써 와있었군. 이런 거 보면

픽스보다 공작이 더 나을지도.”

아이처럼 방정맞은,하지만 정작

눈빛은 오래된 고목처럼 무거운 사

내가 재잘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

다. 아니나 다를까,듈이었다.

나는 심각해지는 수도 상황은 일

절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드는 둘을 보

며 미간을 찡그렸다.

“안녕.”

“인사가 나을 상황은 아니라서.”

“기분이 꽤 좋지 않은가 봐. 말

도 막 놓네.”

“팔려왔는데 기분 좋을 리가.”

나는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듈

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힘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상황이라서 정확히 둘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없어 쉽사리

움직일 순 없었다.

둘은 얼핏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고 가늠되면서도,바들바들 떠는

정령들을 보면 이기지 못할지도 모

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나는 눈치껏 내 뒤로 숨어든 정

령들을 모른 체하며 자리에서 일어

나 듈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

다.

덕분에 내 행동을 멈추기 위해

사방에서 검들이 튀어나왔지만,날

카로운 날붙이들은 듈의 손짓에 이

내 거둬졌다.

“조심해. 숙녀는 곱게 다뤄야지.”

“그런 이야기를 할 거면 이것부

터 풀고 말하지 그래?”

“저번처럼 허튼수작을 부리면 곤

란해서 말이지. 그건 당분간 하고

있어. 조만간 보석 박힌 걸로 바꿔

줄 테니까. 미리 대장장이에게 말

해둘게.”

“나보고 평생 묶여 살라고?”

“내 편으로 돌아선다고 말하면

풀어줄게.”

듈은 능글맞게도 잘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 안더니,결국 나를 의

자에 앉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에 준

비되는 차와 간식들을 보며 코웃음

을 쳤다.

밖은 지금 시끄러운데,정작 모

든 문제의 근원이 있는 이곳은 평

화롭기 그지없었다.

“지금 도대체 뭘 하자는 거야?”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심심하잖

아. 그래서 놀자는 거지.”

“난 그럴 마음이 없는데.”

“그럴 마음이 없어도 생기게 해

야지.”

“지금 당장 나한테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 말이지.”

표정이며,말투는 산뜻한데 눈빛

은 조금도 그렇지 못하다.

듈은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니었

다.

나는 재료를 어떻게 조리해야 맛

있을지 고심하는 요리사처럼 씨익

웃고 있는 사내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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