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침략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겠군요.”
“그래서 말인데,당신이 생각했
던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한 거라면,혹시 이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블러쉬가 별안간 품에서 반짝이
는 목걸이를 꺼냈다.
요정의 눈물이었다.
“챙겨온 거예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블러쉬가 요정의 눈물을 내게 건
네려다가 멈칫했다.
아마 아까의 사건이 떠오른 탓인
듯했다.
“이젠 괜찮아요.”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
를 지으며 요정의 눈물을 건네받았
다.
이제 요정의 눈물은 내 눈에 단
순히 아름다운 보석이 아닌,그 이
상의 것으로 보였다.
“목걸이 자체는 이제 힘이 없지
만,다른 역할은 할 수 있어요.”
“역할이요?”
“아주 크고 단단한 그릇의 역할
이죠.”
내가 기억과 힘을 모두 봉인할
수 있었던 건,요정의 눈물 덕분이
었다.
아무리 내구력이 좋은 물건도 막
상 봉인을 시도하려면 부서지거나,
얼마 가지 못하고 풀리기 일쑤였으
니까.
이토록 오랫동안 문제없이 봉인
이 유지되었다는 건 굉장한 사례였
다.
“요정왕의 힘을 담아낼 정도라면
듈도 가능할지도 몰라요.”
“그자의 힘을 봉인하자는 겁니
까?”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봐야죠.
이런 물건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요정의 눈물을 봉인의
매개체로 썼던 것도 그 때문이고
요.”
“그렇다고 해도 말처럼 쉽진 않
을 것 같군요.”
“네. 쉽진 않을 거예요. 반항하지
못하게 무력화시키는 게 가장 급선
무니까요.”
이 힘이라면 듈과 맞서도 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문제는
듈이 제대로 힘을 드러낸 적이 없
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그가 진심으로 싸운다
면,과연 이길 수 있을지는 지금으
로선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육신이 없
는 상태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기도 했고.
최대한 버티고자 하겠지민' 내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되찾은 기억은 내게 강력한 힘을
선사했으나,동시에 나를 갉아먹었
다.
기억이라는 건 모순적이라,잊으
려고 하면 할수록 되레 사소한 언
행까지 상기시키는 법이었으니까.
억지로 밀어내도 자꾸만 내가 죽
던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는 건 어
쩔 수 없었다.
“그러면,차라리 죽이는 편이 낫
지 않겠습니까?”
“할 수 있다면 그래야겠죠. 하지
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뭘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게,말이죠. 문득 의구심이 생
겨서요.”
둘은 많은 이들을 잡아먹었고,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자신이 집어
삼킨 이의 기억이나,습관 같은 것
을 얻었다고 했다.
그래서 당연히 예전부터 느끼던
이질적인 감각은 그의 식인에서부
터 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 이
상했다.
“의구심이라면,어떤 걸 말씀하
시는 겁니까?”
“보통 동지라고 생각하는 건,공
통분모가 있을 때잖아요.”
나는 듈의 예상과 다르게 샤리에
트를 잡아먹지 않았다.
그럼에도 둘은 나를 자신의 동지
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듈에게 알 수
없는 묘한 끌림을 계속해서 느껴왔
다.
듈과 가까워질수록 이상 현상을
느끼기도 했었고.
그런데,만약 우리가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가 단순히 동지이기 때
문이 아니라면?
나는 문득 떠오르는 어떤 가정에
입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끼며 길
게 숨을 들이켰다.
“저는 듈이 잡아먹은 자 중 요정
왕이 있다고 생각해요.”
U ,,
“저희의 계획대로 된다면 좋겠지
만,그러기엔 듈은 예측 불가한 상
대잖아요. 그만큼 저희도 최악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블러쉬와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
고 싶었는데,갑자기 어디선가 들
리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냐니요. 방금 비명 소리
가 들렸잖아요.”
“저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습니
다.”
“그럴 리가요. 분명……
나는 기름칠하지 않은 기계처럼
삐거덕삐거덕 고개를 돌리다가 마
주친 시선에 숨을 삼켰다.
그제야 비명을 지른 이가 누구인
지 알아차린 탓이었다.
“정령들이 두려워하고 있어요.”
공포 섞인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건 다름 아닌,정령들이었다.
나는 겁에 질려 이리저리 어쩔
줄 몰라 하는 정령들로 인해 덩달
아 발만 동동 구르다가 잡힌 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일단 진정하세요.”
나지막한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
로도 든든하다.
나는 블러쉬의 손을 잡은 채,정
령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그들이 내게 뭔가
말하고 싶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
다.
그들은 집요하리만큼 나와 시선
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내가 황급히 질문했지만,정령들
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내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지 금세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정령들은 사람처럼 입으로 목소
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자신의 의
지를 전달하는 특유의 방식으로 계
속해서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들의 이야기를 듣
다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블러쉬
를 올려다봤다.
“정령들이 경고하고 있어요.”
“경고요?”
“피 냄새가 난대요. 그것도 아주
짙게.”
블러쉬와 나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금방이
라도 비가 을 것처럼 우중충했지
만,우리의 시선을 끄는 건 날씨가
아니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향해 피어오
르고 있었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티어드롭이
다.
나는 블러쉬와의 재회할 장소를
곱씹으며,문을 두들겼다.
상황이 최악으로 흐르고 있었다.
될 수 있는 한,빨리 일을 마치
고 블러쉬와 다시 만나야 했다.
“나예요. 얼른 나와봐요.”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얼른
문 열어요.”
문을 두들겨도,몸으로 밀어 봐
도 잠긴 문은 영 열리지 않았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손을 노려보
다가 입술을 열었다.
평소 같았다면,평화적인 방법을
염두에 뒀겠지만 지금은 최대한 시
간을 아껴야 할 때였다.
광!
“꺄아악!”
정령이 일으킨 바람에 거칠게 밀
려 나간 문이 뜯겨나간 것처럼 덜
렁거 렸다.
나는 두 귀를 막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샤리에트를 발견하고
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히 여기 있었네요. 전 아무
런 대답이 없어서 설마 잠이라도
든 줄 알았죠. 물론 지금 꼴을 보
아하니 그런 건 아닌 듯 보이지만
말이에요.”
“너,너 어떻게……
“영애의 도움이 필요할 때거든
요.”
“내, 도움?”
나는 대답 대신, 챙겨온 아버지
의 목걸이를 샤리에트에게 던졌다.
그리고 얼떨결에 목걸이를 받은
채,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만 껌벅이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기억이 돌아와 모든 것을 알게
된 상태에서 샤리에트와 마주치니
새삼 기분이 이상해졌기 때문이었
다.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고.
샤리에트가 아닌,진짜 그녀의
이름이.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머리를 흔드는 것으로 잡념
을 쫓아버리고 샤리에트의 손목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곧 황궁에서 반역이 일어날 거
예요.”
“반역이라고?”
“그리고,그걸 영애가 도와야 해
요.”
“무슨 헛소리야! 내가 그걸 왜
해야 하는데!”
샤리에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거부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선택권이란 없었다.
“반역을 일으킬 사람이 다름 아
닌,영애의 약혼자거든요.”
“뭐?”
샤리에트가 어이없다는 듯 날 바
라봤다.
하지만 나는 대답해주는 것 대
신,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샤리에트가 내게 잡힌 손목을 풀
기 위해서 끙끙거렸지만,그녀보다
는 내 쪽이 힘이 더 셌다.
나는 정령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등을 억지로 떠밀면서 성큼성큼 걸
음을 옮겼다.
지금쯤 황태자와 접선을 시도하
고 있을 블러쉬와 시간을 맞춰야
했다.
그리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선 이
동하면서 설명을 하는 편이 효율적
이었다.
“황후가 되고 싶다면 이 정도는
해야죠. 안 그래요? 미래의 황후
폐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황
태자는 차기 황제야! 가만히만 있
으면 황위를 이어받는데, 왜 굳이
반역을-”
“입지가 불안정한 상황에선 뭐든
못하겠어. 특히 자신을 대체할 다
른 후계자가 있다면 더욱.”
“그런-”
“말도 안 된다느니,이러려고 내
혼인을 추진했느니 그런 소리 할
거라면 입 다물어. 그런 걸 떠들
만큼 시간이 충분하지 않거든.”
나는 턱짓으로 바깥과 이어지는
창문을 가리켰다.
아까 보이던 검은 연기는 하나였
으나,이제는 셸 수 없을 만큼 그
수가 늘어있었다.
수도가 침략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