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70화 (170/204)

170화. 관계라는 건

“그럼 기억은 왜 지우셨던 겁니

까? 오히려 기억이 있던 편이 나았

을 텐데요.”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죠. 저는

원래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존재니

까요.”

나는 블러쉬의 어깨 너머로 흔들

리는 정령을 응시했다.

겉보기엔 별반 다를 게 없었지

만,육안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

었다.

“있으면,안 된다고요?”

“그게 규칙이거든요. 아주 오래

된 규칙,

내가 손을 뻗자, 정령들이 내 손

위로 앞다뤄 내려앉았다.

그들은 전부 하나 같이 날 향해

기대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내 마음을 무겁

게 했다.

나는 이제 그들이 품고 있는 기

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

다.

“저는 사실-”

“저쪽부터 수색해!”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한다!”

불청객처럼 찾아온 외침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을 꾹 닫았

다.

“벌써 추격대가 붙은 모양입니

다. 일단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최대한 제 옆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상대는 제가 할게요. 당신은 그

저 추격을 피하는 데에만 신경 써

주세요.”

“하지만,아니. 알겠습니다. 그렇

게 하시죠.”

긴말을 하지 않아도 날 믿는 사

내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 내 몸

을 들어 품에 안았다.

나는 높아진 시야에 익숙해지기

위해 눈을 감았다가 도로 떴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내 입술 사이로 홀러나오는 건

아주 낯선,그리고 동시에 그리운

언어였다.

내가 요정의 눈물과 함께 봉인했

던 건 기억만이 아니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자다.”

“ 네?”

“미약하긴 하나,이건 분명 그자

의 힘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둘은 답지 않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자라면, 누굴 말씀하시는 겁

니까.”

“……모든 요정의 시초. 인간의

언어를 빌리자면,요정왕이라고 불

리는 자.”

“이제 와서 저희 계획을 방해할

셈인 걸까요.”

“아니. 그건 불가능해. 애당초 그

자는 더는 존재하지 않거든.”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잡아먹어 버렸지.”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전

언제나 그렇듯,씨익 웃어 보이

는 듈의 미소에 픽스는 저도 모르

게 두 손을 꽉 모았다.

끌어 올라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송곳니는 짐승의 것을 닮아있었다.

그것도 보통 짐승이 아닌 살점올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맹수를.

“하지만 힘이 느껴지신다고 하시

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말이야. 너무 쉽게 잡아먹

을 수 있었거든.”

픽스의 질문과는 이어지지 않는

다른 대답이있지만,딱히 듈은 신

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듈의 대답은 누굴 위한

것이 아니었다.

듈은 창문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참 응시하다가 눈살을 찌

푸렸다.

외형만큼은 완벽하게 모방했지

만,자신은 여전히 완벽하지 않았

다.

그자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랐다.

아무리 잡아먹고 먹어도 닿을 수

없었다.

“좀 더 힘이 필요해.”

“아주 강한 힘이.”

그래야 비로소 이 허기가 가실

테니.

듈의 눈동자 초점이 흐릿해졌다.

첫 살인 이후 시작된 허기는 지

금에 이르러 겨우 익숙해졌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항상 배고팠고 굶주려있었

다.

* 本*

내 허밍에 맞춰 정령들이 움직인

다.

나는 손짓으로 춤을 추듯 거세게

일렁이는 물보라를 거둬내며, 마지

막 적을 처치했다.

추적자는 전부 고도로 훈련된 자

들이었음에도 그들을 막아내는 건

어린애 장난처럼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네. 전혀 문제없어요.”

나는 거센 숨을 한 번 쉬지 않고

곧장 대꾸했다.

막힌 둑이 터진 양,기억과 함께

되찾은 힘은 세찬 물줄기처럼 내게

서 쏟아져나오고 있었지만 조금도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무뿌리를 소환해내기도 버거웠

던 건 옛말일 뿐이었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듈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슬쩍 내 주위를 돌며 까르

르 웃고 있는 정령들을 바라봤다.

정령사인 플렌조차 다룰 수 있는

정령의 수가 한계가 있었다. 이토

록 많은 정령이 한 번에 힘을 사용

하는 경우를 마주하기는 처음이기

에 그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체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알 수 있

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정령을 움직이

는 것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만큼

거대한 힘을 다룬다는 뜻이기도 했

다.

그리고,그렇기에 두려운 일이기

도 했다.

“이게 혹시 요정왕의 힘입니까?”

“아마도요.”

“애매모호한 대답이군요.”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힘이 강

해졌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요정왕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얻

었던 후부터 나는 요정의 힘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내가 모든 기억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동안,말도 안 되리만큼 힘

이 커져 있었다.

"강하다는 건 나쁜일이 아니

죠.”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도 있어

요.”

“혹시, 아까 말씀하신 규칙과 연

관 있는 겁니까?”

나는 대답 없이 내 손목을 바라

봤다.

새하얀 피부 위로 도드라진 핏줄

들이 내가 살아있음을 말해주고 있

었다.

하지만 이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짧은 침묵 끝에 천천히 입

을 뗐다.

“저는 평범한 요정과는 달라요.”

“다르다뇨?”

“제겐 육체가 없거든요.”

블러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멈출 수

없었다.

내가 해야 하는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 였다.

“요정의 주술은 정신을 현혹시키

죠. 있는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해요.”

“당신이 그런 상태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사실이

에요.”

기억을 찾으면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미샤의 경고는 다른 의미로

도 사실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포함한 모

두를 현혹시키고 속여야만 존재할

수 있었지만,기억은 자꾸만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으니까.

모순적이나,나는 나를 잊어야만

존재할 수 있었다.

“이 상태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

을지 모르나,만약 제가 육체를 유

지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저는 기

억을 버려야 할 거예요. 그게 제가

유일하게 당신 곁에 있을 방법일

테니까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블러쉬라면 이렇게 대답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모든 게 끝난 이후

의 일이었다.

아무리 그라 해도 이토록 쉽게

내가 바라던 대답을 해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네.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기억을 버린다는 건 원하는 것

만 잊을 수 있다는 게 아니에요.

지금껏 쌓아온 모든 기억을 잃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가 되는 거라

고요.”

“그래도 당신이 내 연인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기억은 다시 쌓으면 되는 거고,

무엇보다 제가 기억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이 뭘 두려워하는지는 아

나,전 티어드롭 공작이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직접 경

험했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곧은 눈동자는 내게 거짓을 말하

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기에 절로 목이 겠

다.

“피를 나눈 아버지조차 해주지

못했던 일이에요.”

“관계라는 건,피로만 이루어지

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잊으셨던 것 같은데1 저희는 부

부입니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누구보다 가까운 관계죠.

전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

다.”

블러쉬의 손이 내 손을 찾았다.

깍지낀 손은 족쇄처럼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다.

“두려워하신다는 거 압니다. 무

엇이 당신인지 받아들이기 힘들겠

죠.”

이래서 눈치 빠른 사내는 참 곤

란하다.

나는 시큰거리는 눈가를 참아내

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가 되레

보이는 잡은 손에 결국 헛웃음을

뱉었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너무 이상해요. 모든 정황이 제가

샤리에트라고 말하고 있는데,머리

로는 이해가 되어도 가슴으로는 못

받아들이겠어요.”

“그럴 만도 합니다. 비현실적인

일 아닙니까. 보통 사람이 경험하

기 힘든 일이기도 하고요.”

“……모든 게 정말이지, 전부 다

요정의 장난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래서 당신에게 고마워요.”

이제 블러쉬가 아닌, 내가 그의

손을 잡는다.

나는 고개를 도로 들고 양 입꼬

리를 끌어을렸다.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모든 게 현실감 없죠. 그럼에도 괜

찮을 것 같단 생각을 해요. 어떤

순간에도 당신은 지금 모습 그대로

변치 않고 곁을 지켜줄 거라는 걸

알거든요.”

이 정도로 흔들리기에는 그간의

함께 보낸 시간이 있었다.

나는 굳은 신뢰만큼이나 곧은 사

내의 눈을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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