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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167화 (167/204)

167화. 요정왕의 딸

“당분간 이곳을 써,아니 쓰시죠.

인적 드문 곳이라 웬만한 사람 아

니고서야 이곳을 찾기 어려울 겁니

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그리고,

앞으로 일행들을 설득하는 것도 잘

부탁드릴게요.”

“다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테니,그 부분은 괜찮을 겁니다. 다

만……

“치료제 문제도 걱정하지 말아

요.”

사내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호선

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려 노력

했지만,열떤 눈에는 감출 수 없는

희망이 엿보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배웅한

후,블러쉬를 올려다봤다.

주변 인기척을 확인하기 위함이

었다.

“따로 느껴지는 건 없습니다. 편

히 지내셔도 될 것 같습니다.”

“티어드롭의 그림자들이 절 찾고

있을 테니,그리 오래 머물진 못할

거예요.”

“그래도 정비하기에는 충분할 겁

니다. 여차하면, 제가 또 한 번 납

치하면 될 테니까요.”

“눈치 안 보셔도 됩니다. 모나차

르트로 돌아갈 마음이 없으실 거라

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복면을 내린 블러쉬가 살짝 입꼬

리를 올렸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알아

차리지 못할 만큼 미묘한 변화였지

만,내게는 그의 미소가 그저 다정

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모나차르트 쪽 상황을 좀 더 듣

고 싶어요. 근황도,그리고……

나는 두 팔로 나 자신을 보호하

듯 끌어안은 채 살짝 심호흡을 했

다.

나름 각오를 했지만 다음 말을

하는 건 역시,떨렸다.

하지만 이어서 용기를 낼 수 있

는 건,블러쉬가 기다리고 있기 때

문이었다.

나는 한 번 더 크게 심호홉을 한

후,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요정왕의 딸이라는 이야기

가 무슨 소리인지도요.”

“듣기 괴로우실 겁니다.”

“그래서 더 듣고 싶어요. 모른

척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계속 생각날 테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내가 원한

다면 날 위해 얼마든지 침묵해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상처 입는다고 한들 차라

리 모든 걸 알고 내가 스스로 판단

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그게 내가 오랫동안 고심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일단 모나차르트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있

고,타 지역에서도 소문을 내고 있

습니다. 물론 간접적으로요.”

“예를 들면요?”

“모든 지역 중 유일하게 모나차

르트만 폭동이 벌어지지 않았다거

나,모나차르트에서 이탈하는 사람

이 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간접적인 소문은 퍼지는 건 느리

나,그만큼 위험부담도 낮았다.

소문이라는 건 시간이 흐르고 많

은 사람을 거치게 되면서 와전되거

나,몸집이 달라짐에 따라 점차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아직은 모나차르트에 대

한 평이 그리 좋지 않았다.

모나차르트의 사정이 예전과 같

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쉽게 움직이

지 않을 터였다.

하물며 너무 적극적이면 되레 반

감이 생길 수 있으니,우리 입장에

서는 도리어 천천히 퍼지는 게 좋

았다.

은근한 소문은 비교적 티도 덜

나 견제가 덜한 데다가 수많은 사

람의 귀에 들어갔을 때는 누구도

쉽게 주워담을 수 없을 테니 말이

다.

“그럼 어디까지 소문이 퍼진 거

죠?”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소문을

일부러 한 번에 내지 않고 여러 소

문이 겹칠 수 있게 해두었기에 다

른 소문에 비해 퍼지는 속도가 빨

랐습니다. 시기 영향도 있고요.”

“아무래도 곧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니, 다들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긴 하겠죠.”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니,더욱

예민하고 날이 설 수밖에 없죠. 쉽

게 접근할 문제는 아닙니다.”

나 역시도,블러쉬가 경고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그만큼 목소

리는 물론, 문제도 커질 수밖에 없

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희에겐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이 필요해요, 모두가 버

린 병자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서

신뢰를 얻어야 하죠.”

이건 도의적인 문제를 떠나,모

나차르트의 미래와도 연관이 깊었

다.

위기 속 구원자 노릇은 모나차르

트에 대한 편견을 부수기도 하겠지

만,동시에 모나차트르의 발전을

도울 것이었다.

모나차르트는 개개인별로 보면,

여러모로 신체 조건은 좋은 편이

나,타 지역에 비해 인구수가 월등

히 적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각지에서 몰려드는 병

자들을 거둬들여 몸집을 부풀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후,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치

료를 위해 모나차르트를 방문한 이

들이 모두 남는다고 확신할 순 없

지만,남은 이들은 모나차르트의

부흥을,그리고 떠난 이들은 모나

차르트에 대한 편견을 바꿔줄 테니

말이다.

“이번에 받아들인 무리도 합류하

면 좀 더 빠르고 확실하게 소문이

퍼질 겁니다.”

“네. 이미 소문이 퍼진 상황에서

모나차르트인이 아닌,다른 이들이

치료 사례를 입증해주기 시작하면

더욱 마음을 흔들 테니까요. 하지

만 그렇게 되기 위해선……

어떤 공격이 와도 모나차르트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모두를 지킬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야

만 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블러쉬를 바라

봤다.

전투 쪽으로는 지식이 부족하다

고 해도 내가 요구하는 것이 말처

럼 쉽지는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

이었다.

그런 내 걱정 어린 시선을 알아

차린 걸까. 블러쉬의 손이 내 손올

찾아 꽉 잡았다.

“모나차르트는 약하지 않습니

다.”

“배워먹지 않은 용병 무리라 오

인당하기도 하나,실은 모나차르트

의 자랑은 방어거든요.”

M ,,

a

“자신이 없었다면, 저 혼자 나을

일도 없었을 테고요. 맹세컨대,모

두가 무너진다고 한들 모나차르트

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겁니

다.”

고작해야 나를 안도시키고자 하

는 이야기임에도, 그 속에 확신과

온기가 더해져서인지 나지막한 목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

다.

나는 블러쉬가 그랬던 것처럼 그

의 손을 마주 잡으며 시선을 위로

옮겼다.

아직 다음 이야기가 남아있기 때

문이었다.

그리고 다행인지,불행인지 눈치

빠른 사내는 금세 내 시선의 뜻을

알아차렸다.

“일단 제가 모든 걸 아는 건 아

니라는 건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금기가 걸려 있기도 했고, 요정들

이 모르는 부분도 있었으니까요.”

“네. 감안하고 들을게요.”

“일단 심포니아와 요정왕과 혈연

관계인지 말하자면,그 부분은 아

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라고요?”

“하지만,이건 인간의 기준일 뿐

입니다.”

“인간의 기준이라는 건……

나는 제대로 질문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다음 내용을 알 것 같지만, 차마

내 입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요정의 기준은 좀 다르다고 하

더군요. 요정은 사람들처럼 모체에

게 잉태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식

으로 태어나 혈연만으로 모든 걸

따질 수 없다고요.”

“네,그 부분은 알고 있어요.”

“그래서,요정의 기준으로 말하

자면 심포니아는 요정왕과 관련된

게 맞습니다.”

“다만,요정왕 본인이 직접 언급

했거나, 심포니아가 따로 기억하는

게 없다 보니 정확히 어떤 관계인

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요정에

게 인간의 잣대를 들이밀어 딸이라

고 표현할 뿐이죠.”

요정에 대해선 나 역시도 완벽히

이해하는 바는 아니기에 깊게 파고

들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의문이 생

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요정왕이죠?”

“엘프에게 당신을 맡겼던 게 그

자니까요. 그래서,다들 심포니아를

당연하게 요정왕의 아이로 생각했

던 모양입니다.”

“엘프가 절 맡을 리가요. 그랬다

면,제가 왜 티어드롭 공작의 손에

서 키워졌겠어요.”

나는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엘프가 나를 키웠고,그들과 함

께 지냈다면 내가 굳이 티어드롭

저택으로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를 유별날 만큼 특별하게 여기

던 엘프들이 나를 버렸을 리는 절

대 없기도 하고,혹시라도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렸다면 더 먼저 발

벗고 나서서 날 찾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내게 그런 이야기

는 하지 않았다.

나와 가장 가까이서 지낸 플렌조

차 일정한 선을 지키며 인간과 요

정의 삶이 다름을 새삼스러울 정도

로 계속 깨닫게 해줬을 뿐이었다.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사정이요?”

“잃어버린 기억이 있지 않습니

까.”

“그리고,요정 친구와 했다는 계

약,역시.”

블러쉬가 나를 응시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비친 여자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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