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요정왕의 딸
“당분간 이곳을 써,아니 쓰시죠.
인적 드문 곳이라 웬만한 사람 아
니고서야 이곳을 찾기 어려울 겁니
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그리고,
앞으로 일행들을 설득하는 것도 잘
부탁드릴게요.”
“다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테니,그 부분은 괜찮을 겁니다. 다
만……
“치료제 문제도 걱정하지 말아
요.”
사내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호선
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려 노력
했지만,열떤 눈에는 감출 수 없는
희망이 엿보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배웅한
후,블러쉬를 올려다봤다.
주변 인기척을 확인하기 위함이
었다.
“따로 느껴지는 건 없습니다. 편
히 지내셔도 될 것 같습니다.”
“티어드롭의 그림자들이 절 찾고
있을 테니,그리 오래 머물진 못할
거예요.”
“그래도 정비하기에는 충분할 겁
니다. 여차하면, 제가 또 한 번 납
치하면 될 테니까요.”
“눈치 안 보셔도 됩니다. 모나차
르트로 돌아갈 마음이 없으실 거라
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복면을 내린 블러쉬가 살짝 입꼬
리를 올렸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알아
차리지 못할 만큼 미묘한 변화였지
만,내게는 그의 미소가 그저 다정
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모나차르트 쪽 상황을 좀 더 듣
고 싶어요. 근황도,그리고……
나는 두 팔로 나 자신을 보호하
듯 끌어안은 채 살짝 심호흡을 했
다.
나름 각오를 했지만 다음 말을
하는 건 역시,떨렸다.
하지만 이어서 용기를 낼 수 있
는 건,블러쉬가 기다리고 있기 때
문이었다.
나는 한 번 더 크게 심호홉을 한
후,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요정왕의 딸이라는 이야기
가 무슨 소리인지도요.”
“듣기 괴로우실 겁니다.”
“그래서 더 듣고 싶어요. 모른
척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계속 생각날 테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내가 원한
다면 날 위해 얼마든지 침묵해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상처 입는다고 한들 차라
리 모든 걸 알고 내가 스스로 판단
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그게 내가 오랫동안 고심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일단 모나차르트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있
고,타 지역에서도 소문을 내고 있
습니다. 물론 간접적으로요.”
“예를 들면요?”
“모든 지역 중 유일하게 모나차
르트만 폭동이 벌어지지 않았다거
나,모나차르트에서 이탈하는 사람
이 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간접적인 소문은 퍼지는 건 느리
나,그만큼 위험부담도 낮았다.
소문이라는 건 시간이 흐르고 많
은 사람을 거치게 되면서 와전되거
나,몸집이 달라짐에 따라 점차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아직은 모나차르트에 대
한 평이 그리 좋지 않았다.
모나차르트의 사정이 예전과 같
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쉽게 움직이
지 않을 터였다.
하물며 너무 적극적이면 되레 반
감이 생길 수 있으니,우리 입장에
서는 도리어 천천히 퍼지는 게 좋
았다.
은근한 소문은 비교적 티도 덜
나 견제가 덜한 데다가 수많은 사
람의 귀에 들어갔을 때는 누구도
쉽게 주워담을 수 없을 테니 말이
다.
“그럼 어디까지 소문이 퍼진 거
죠?”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소문을
일부러 한 번에 내지 않고 여러 소
문이 겹칠 수 있게 해두었기에 다
른 소문에 비해 퍼지는 속도가 빨
랐습니다. 시기 영향도 있고요.”
“아무래도 곧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니, 다들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긴 하겠죠.”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니,더욱
예민하고 날이 설 수밖에 없죠. 쉽
게 접근할 문제는 아닙니다.”
나 역시도,블러쉬가 경고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그만큼 목소
리는 물론, 문제도 커질 수밖에 없
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희에겐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이 필요해요, 모두가 버
린 병자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서
신뢰를 얻어야 하죠.”
이건 도의적인 문제를 떠나,모
나차르트의 미래와도 연관이 깊었
다.
위기 속 구원자 노릇은 모나차르
트에 대한 편견을 부수기도 하겠지
만,동시에 모나차트르의 발전을
도울 것이었다.
모나차르트는 개개인별로 보면,
여러모로 신체 조건은 좋은 편이
나,타 지역에 비해 인구수가 월등
히 적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각지에서 몰려드는 병
자들을 거둬들여 몸집을 부풀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후,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치
료를 위해 모나차르트를 방문한 이
들이 모두 남는다고 확신할 순 없
지만,남은 이들은 모나차르트의
부흥을,그리고 떠난 이들은 모나
차르트에 대한 편견을 바꿔줄 테니
말이다.
“이번에 받아들인 무리도 합류하
면 좀 더 빠르고 확실하게 소문이
퍼질 겁니다.”
“네. 이미 소문이 퍼진 상황에서
모나차르트인이 아닌,다른 이들이
치료 사례를 입증해주기 시작하면
더욱 마음을 흔들 테니까요. 하지
만 그렇게 되기 위해선……
어떤 공격이 와도 모나차르트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모두를 지킬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야
만 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블러쉬를 바라
봤다.
전투 쪽으로는 지식이 부족하다
고 해도 내가 요구하는 것이 말처
럼 쉽지는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
이었다.
그런 내 걱정 어린 시선을 알아
차린 걸까. 블러쉬의 손이 내 손올
찾아 꽉 잡았다.
“모나차르트는 약하지 않습니
다.”
“배워먹지 않은 용병 무리라 오
인당하기도 하나,실은 모나차르트
의 자랑은 방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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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없었다면, 저 혼자 나을
일도 없었을 테고요. 맹세컨대,모
두가 무너진다고 한들 모나차르트
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겁니
다.”
고작해야 나를 안도시키고자 하
는 이야기임에도, 그 속에 확신과
온기가 더해져서인지 나지막한 목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
다.
나는 블러쉬가 그랬던 것처럼 그
의 손을 마주 잡으며 시선을 위로
옮겼다.
아직 다음 이야기가 남아있기 때
문이었다.
그리고 다행인지,불행인지 눈치
빠른 사내는 금세 내 시선의 뜻을
알아차렸다.
“일단 제가 모든 걸 아는 건 아
니라는 건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금기가 걸려 있기도 했고, 요정들
이 모르는 부분도 있었으니까요.”
“네. 감안하고 들을게요.”
“일단 심포니아와 요정왕과 혈연
관계인지 말하자면,그 부분은 아
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라고요?”
“하지만,이건 인간의 기준일 뿐
입니다.”
“인간의 기준이라는 건……
나는 제대로 질문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다음 내용을 알 것 같지만, 차마
내 입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요정의 기준은 좀 다르다고 하
더군요. 요정은 사람들처럼 모체에
게 잉태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식
으로 태어나 혈연만으로 모든 걸
따질 수 없다고요.”
“네,그 부분은 알고 있어요.”
“그래서,요정의 기준으로 말하
자면 심포니아는 요정왕과 관련된
게 맞습니다.”
“다만,요정왕 본인이 직접 언급
했거나, 심포니아가 따로 기억하는
게 없다 보니 정확히 어떤 관계인
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요정에
게 인간의 잣대를 들이밀어 딸이라
고 표현할 뿐이죠.”
요정에 대해선 나 역시도 완벽히
이해하는 바는 아니기에 깊게 파고
들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의문이 생
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요정왕이죠?”
“엘프에게 당신을 맡겼던 게 그
자니까요. 그래서,다들 심포니아를
당연하게 요정왕의 아이로 생각했
던 모양입니다.”
“엘프가 절 맡을 리가요. 그랬다
면,제가 왜 티어드롭 공작의 손에
서 키워졌겠어요.”
나는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엘프가 나를 키웠고,그들과 함
께 지냈다면 내가 굳이 티어드롭
저택으로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를 유별날 만큼 특별하게 여기
던 엘프들이 나를 버렸을 리는 절
대 없기도 하고,혹시라도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렸다면 더 먼저 발
벗고 나서서 날 찾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내게 그런 이야기
는 하지 않았다.
나와 가장 가까이서 지낸 플렌조
차 일정한 선을 지키며 인간과 요
정의 삶이 다름을 새삼스러울 정도
로 계속 깨닫게 해줬을 뿐이었다.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사정이요?”
“잃어버린 기억이 있지 않습니
까.”
“그리고,요정 친구와 했다는 계
약,역시.”
블러쉬가 나를 응시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비친 여자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