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입장 번복
“우리 아가씨께서는 퍽 바쁘게
움직이시 는군.”
“읍,읍!”
“이기지도 못할 싸움이라는 걸
뻔히 알 텐데. 그게 참 같잖고,또
귀엽단 말이야. 안 그렇습니까,티
어드롭 공작?”
“으읍, 읍! 읍!”
“아, 그래. 대답을 할 수 없는 상
황이었죠.”
듈이 키득거리며 제 발밑에 무릎
꿇고 있는 오베른을 내려다봤다.
오베른의 두 눈은 잔뜩 힘을 준
나머지, 실핏줄이 터져 붉게 보였
다.
하지만 입에 물린 재갈이며,온
몸을 꽉 묶은 줄로 인해 정작 그는
일말의 발버둥도 칠 수 없었다.
듈은 오베른의 어깨를 느긋하게
발로 짓누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물론 그 순간에도 입이 막힌 오
베른은 한 마디의 비명조차 내지르
지 못했다.
“너무 불쾌하지 마세요. 이마저
도 본인 업보 아닙니까. 티어드롭
공작의 이런 꼴을 보고 즐거워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니 말입니
다. 이 김에 지금껏 본인이 홀린
피를 돌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읍! 읍!”
“물론 이건 제가 할 말은 아니지
만 말입니다.”
알궂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더 얄
입다.
듈은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한
번 크게 웃고는 픽스에게 손짓했
다.
픽스는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오베른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었
다.
“네 놈,정체가 뭐지!”
“풀리자마자,그런 소리라니. 이
건 좀 멋있네. 나는 당연히 이런
소리를 할 줄 알았거든. 살려주세
요. 뭐 이런 거 말이야.”
“아아악!”
불현듯 어깨를 파고드는 날카로
운 통증에 오베른이 비명을 내질렀
다.
별안간 둘이 꽂은 검 때문이었
다.
하지만 정작 듈은 자상의 통증에
괴로워하는 오베른을 조금도 아랑
곳하지 않았다.
되레 피 묻은 검 끝을 성의 없이
대충 바닥에 닦아 내다가 그마저도
지루하다는 듯 이내 검을 바닥에
내동댕이칠 뿐이었다.
쨍그랑- 쨍- 챙!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구른 검
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 더미에
부딪히며 멈췄다.
둘은 무수히 쌓인 시체 더미를
바라보며 턱을 됐다.
언제쯤 저 위에 티어드롭 공작을
올리는 게 좋을지 가늠하기 위함이
었다.
“있지,티어드롭 공작. 당신을 이
곳으로 보낸 이가 누군지 알아?”
“이번에는 말을 아끼시겠다? 뭐,
그것도 좋은 선택이야. 덕분에 내
가 더 많이 떠들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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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니아야. 당신이 들인 양딸.
그 아이가 당신을 배신했어.”
가늘어진 듈의 눈이 오베른의 표
정 변화를 살폈다.
바로 믿을 생각은 없었는지,오
베른은 제법 굳건한 시선으로 듈을
말없이 힐난했다.
“티어드롭 전부를 갖고 싶어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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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에트의 시신을 발견했으니
까.”
“샤리에트라고?”
“음,역시 당신은 이 이야기를
해야 대화가 통하네. 참 안타까운
일이야.”
듈은 고개를 젖힌 채 짐짓 씁쓸
한 어조와는 다르게 함박웃음을 지
었다.
그 미소는 장난감을 손에 쥔 아
이를 닮아있었다.
“티어드롭 공작이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샤리에트의 시신을 가져
다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 아이가 가져간 것 같더라고.”
“요약하자면,전 이미 샤리에트
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이를
감추면서 일부러 당신에게 접근한
거야. 진짜와 가짜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가짜와 가짜는 좀 해볼 만
하잖아.”
둘의 조롱에도 오베른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으나,그는 오랜
경험으로 쉼게 공작의 변화를 알아
차렸다.
냉혈한인 티어드롭 공작도 어쩔
수 없는 아비인지,항상 제 딸 이
야기만 나오면 약해졌으니까.
“그래서 나와 손잡기로 한 거지.
물론 공작의 동생을 포함해서 말이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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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런데,갑자기 내 마음이 바뀌
었어. 심포니아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게 생각난 참
이거든.”
듈이 증대한 결심을 마쳤다는 듯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거리자,
오베른의 눈이 커졌다.
지금껏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의
뭉스러운 사내의 외형이 일순간 달
라진 탓이었다.
“……오르젠타 대공.”
“이왕이면 전하까지 붙여주는 건
어때?”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
“장난보다는 제안하는 거지.”
두 단어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을 것 같은 짓궂은 얼굴로 듈이
오베른의 이마를 검지로 꾹 눌렀
다.
덕분에 오베른의 미간이 깊어졌
지만,그런 미묘한 변화 따위는 듈
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대의 딸,샤리에트를 다시 살
려줄게.”
“그딴 게 가능할 것 같나.”
“그런 말을 하기엔 동생의 속삭
임에 흔들리지 않았나?”
둘이 턱짓으로 픽스를 가리켰다.
둘은 이미 두 티어드롭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보고 받은 바가
있었다.
오베른이 아무리 태연한 척 굴려
고 해도 둘의 눈에는 미련을 버리
지 못하는 사내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저런 이를 흔드는 건,듈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티어드롭의 주인 정도 되면,요
정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지? 비어
티어드롭의 오래된 친우.”
“그에 대한 기록이 문헌으로 남
아있다면 알 텐데,말도 안 되는
힘이 존재한다는 거.”
“……설마,그걸 노리고 있는 건
가?,,
“맞아. 그리고 그렇기에 픽스도
날 돕는 거야. 잃어버린 것들을 되
찾고 싶어서.”
듈이 시선을 돌리자 픽스는 그의
앞에 말없이 무릎을 꿇었다.
마치 신을 경배하기라도 하듯,
경건한 태도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티어드롭 공작의 딸을 죽인 건,
미안하게 되었어. 하지만 깨진 그
릇을 다시 붙일 수 있다면,이야기
가 좀 달라지잖아.”
“그러니 이제 슬슬 가면은 벗고
솔직해지는 게 어때? 사실 이미 공
작은 마음을 정했잖아.”
“그렇지 않다면,공작이 딸을 죽
인 나를 보며 억지로 화를 삼킬 이
유도 없을 테니까.”
심지어 이렇게까지 하는데 말이
지.
듈이 검지에 힘을 주며 밀자,오
베른은 별 반항 없이 그대로 뒤로
밀렸다.
그것만으로도 다른 대답은 필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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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공작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줘. 형제가 사이좋게,비슷한
목적으로 일하니 이 김에 관계 회
복을 해보는 것도 좋겠네.”
“왜? 탐탁지 않아?”
“제가 대공 전하의 뜻에 의견이
있을 리-”
“그러기엔 표정 관리를 너무 못
하는데.”
픽스의 말을 가로젠 듈이 느긋하
게 입꼬리를 끌어을렸다.
불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상황이 즐겁다는 투였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마.
나도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니까.”
“확인이요?”
“샤리에트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 아이의 존재에 대한 의
문이 생겨서 말이야.”
그에 관해 더 묻고 싶었지만,의
뭉스러운 사내는 자신이 하고 싶을
때만 원하는 대답을 꺼냈다.
그가 먼저 말해주지 않는다면 쉽
게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었
다.
그렇기에 픽스는 섣불리 묻기 대
신 대신,듈이 먼저 입을 열길 기
다렸다.
“기억하지? 그때,주술을 걸 때
분명 내가 그 아이를 제물 삼으라
고 했던 거.”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알려준 그 주술은
제물로 쓰인 아이가 사라지면 자연
스레 문제가 생기거든.”
“어떤 문제-”
“문제가 생겼다는 게 아니야. 오
히려 그 반대지. 아무런 문제도 없
어. 그 사실이 거슬리는 거야.”
또 한 번 픽스의 질문을 가로챈
듈이 턱을 됐다.
“시신이 사라졌는데도 주술이 유
지되고 있었어. 그 말은 결국,그
아이가 제물로 쓰이지 않았다는 거
지.”
“저는 분명 일러주신 대로 주술
을 시행했습니다.”
픽스가 다급하게 해명하였지만,
듈은 여전히 태연한 태도를 유지할
뿐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다른 생
각에 하느라 푹 빠져있었다는 표현
이 맞겠지만.
“널 의심하는 건 아니야. 내 충
직한 픽스가 그럴 리 없잖아. 오히
려 의심하는 건 다른 쪽이지.”
요정의 핏줄이 섞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특별한 존
재는 흔치 않았기에 그만큼 그 아
이를 대체할 만한 제물도 없었다.
만약 픽스가 약속을 어기고 섣불
리 다른 제물을 쓰려고 했다면,주
술이 발동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건 픽스가 아닌 다른
쪽을 의심해야 했다.
둘은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도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던 요정왕,
그자가 개입했다면 자신이 짐작하
는 모든 게 가능해지니까.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내 입장이 크게 달라질 거야.”
“ ,’
“그녀가 내 동지라면 귀여운 아
가씨 정도로 봐줄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봐줄 이유가 없으니까.
아니,봐주긴커녕 바로 잡아먹어
버려야지.”
듈이 양 입술을 끌어을렸다.
드러낸 입술 사이로 보이는 그의
송곳니는 유난히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