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64화 (164/204)

164화. 말보다 행동

“어떻게 당신이 온 거예요? 혹시

안 좋은 생긴 건 아니죠?”

“숨 쉬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 ,,

“원래는 보고 싶다고 말할 셈이

었는데.”

블러쉬의 시선이 조금 전 칼날을

쥐었던 내 손에 닿았다.

나는 뒤늦게서야 서둘러 손을 뒤

로 감췄지만 이미 들켜버린 후였

다.

“제가 더 일찍 왔어야 했습니

다.”

“아니. 그보다는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습니다.”

한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돌

아오는 건 걱정과 분노에 찬 표정

이다.

나는 블러쉬의 살기 어린 눈이

기절한 강도 무리를 향하는 걸 보

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오해를 한 모양이다.

“실은 이 상처는 제가 낸 거예

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그

러면 저들과 대화가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나는 강도와 마주한 순

간, 새로운 계획이 떠올랐기에 더

더욱 그들의 생존 여부가 중요했

다.

“저들은 진짜 강도가 아니에요.

일반인이죠. 그걸 확인하려고-”

“확인하는 방법이 그것만은 아니

었을 텐데요.”

U

“혹시 제가 없던 사이 계속 이랬

던 겁니까?”

“그게…….,,

평소에는 잘만 떠들다가도 어째

서인지 블러쉬 앞에선 말문이 막힌

다.

나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슬쩍 눈

을 피했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한소리를 들

을 만한 상황이 생각났기 때문이었

다.

“이야기는 조금 있다 하고 일단

자리부터 옮기죠. 여기 계속 있다

간 눈에 띄고 말 테니까요.”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임에도 블

러쉬는 말없이 복면을 고쳐 썼다.

나는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

피다가 나를 끌어안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익숙했지만,동시에 그리운 온기

였다.

* * *

“이곳 정도면 될 것 같군요.”

먼저 앞장선 블러쉬가 내게 손수

건을 건네고, 손으로 대충 거미줄

을 치워냈다.

낡디 낡은 건물은 오랫동안 사람

의 손이 닿지 않아 조금만 눈을 돌

려도 거미줄이며,먼지가 그득했다.

나는 엉망인 방 안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의자를 찾아 가리켰다.

그리고는 조금 전 블러쉬에게 부탁

해 연행한 인질을 곁눈질했다.

“일단 인질은 저기 앉힐까요?”

“이자는 왜 데리고 온 겁니까?”

“아무래도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아서요.”

그 전에 일단 정신부터 차려야

하겠지만.

나는 블러쉬가 기절해 축 처진

사내를 의자에 내려놓고,결박하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

다.

내가 먼저 입을 열 입장은 아니

나,그가 말하기까지 기다리기에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

예요? 아직 당신은 여기 을 시기가

아니잖아요.”

“심포니아를 데리러 온 겁니다.”

저를요?”

“요정들을 다그쳐 이야기를 들었

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어봤

죠.”

당신이 요정왕의 딸은 아니냐고.

붉은 눈이 나를 향한다.

내게 대답을 바란다기보다는 이

미 뭔가를 확신한 눈이었다.

“제가 요정왕의 딸이라뇨.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 질문에 요정들은 부정도,긍

정도 하지 못하더군요.”

‘‘ ,,

“정확히는 어느 쪽도 정답이 아

니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죠?”

“이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지 한

참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곧

깨닫고 말았습니다.”

이 비밀에 관한 선택과 결정은

제 몫이 아니라는 걸.

블러쉬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얼굴을 가린 복면을 내렸다.

그리고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

쌌다.

“다만,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제

가 계속 옆에 있을 거라는 걸요.”

“제가 아는 심포니아는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서요.지금처럼.”

블러쉬가 손수건을 꺼내 내 손을

덮고,꼼꼼히 상처를 묶었다.

투박한 손과 어울리지 않게 조심

스러운 손길이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

나,전 계속 같은 자리에 있을 겁

니다.”

“아무 일도……

습관처럼 괜찮다는 말이 튀어나

오려다가 그대로 삼켜졌다.

사실 알고 있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자꾸 이상한 꿈을 꿔요. 심지어

알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르고,나도

모르는 새 감정에 흔들릴 때가 있

어요.”

"그런데,아무리 생각해도 제 생

각엔 그게 샤리에트의 것 같아요.”

u n

“그리고 듈이 말하길,그게 사람

을 잡아먹은 것에 대한 부작용이라

고 하더라고요.”

나는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겨우

움직여 설명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

다.

차마 눈을 뜰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눈을 떴을 때,날 보는 블러쉬의

눈이 혐오로 물들어 있을까 두려웠

다.

“어쩌면,아니 아마도 제가 샤리

에트를 잡아먹었던 것일지도 몰라

요.”

“그렇군요.”

덤덤하게 덧붙인 목소리에 순간

허탈함이 밀려와 반사적으로 고개

를 들었다.

“그게 다예요?”

“저는 제가 보고 판단한 것만 믿

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정도

로 혼들릴 거라면,시작도 안 했을

테고요.”

H

“혼자 속앓이하지 않으셔도 됩니

다. 그러려고 옆에 있고자 한 거니

까요.”

외면하려 해도 줄곧 날 괴롭혀왔

던 문제가 한순간에 눈 녹듯 녹아

버린다.

나는 블러쉬를 올려다보다가 조

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쥐었다.

역시, 나는 이 사람이 좋았다.

저 곧은 시선이 있으면,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거예

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더는 몸

을 스스로 상하게 하실 일은 하지

않으실 테니.”

“그건……

“혐오였겠죠. 다르게 말하면, 죄

책감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걸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

다.”

말문이 막혀 애꿎은 손끝만 매만

지는데,블러쉬는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상처를 감싼 손수건을 한 번 더

확인해주면서.

“물론 그건 저보다 심포니아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보

단 당신이 현명하지 않습니까.”

u……그러기엔 제 안에는 생각들

이 너무 많은걸요.”

“그럼 같이하죠. 아무리 많아도

같이 풀다 보면 답이 보일 테니까

요.”

혹여나 상처가 터질까,부드럽게

잡아 오는 배려 섞인 손길이 좋다.

나는 헤실헤실 홀러나오려는 웃

음을 삼키다가 문득 느껴지는 인기

척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절한 사내가 깨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아직 블러쉬에게 더 물어

볼 게 있었는데.

아쉬움이 남았지만 인질 앞에서

괜한 소리를 할 순 없었다.

“왜 내가,아! 너! 귀족!”

날 발견한 사내가 다가오려 했지

만, 그의 몸은 이미 의자에 묶여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내는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이

내 분노해 거친 몸짓으로 버둥거렸

다.

얼마나 날뛰는지 까딱 잘못했다

간 낡은 의자가 부서질 것 같았다.

“이봐요, 진정해요.”

“사람을 납치해 잡아다 놓고는

진정? 하, 아까부터 당당하다 싶었

는데 그게 다 뒷배가 있어서 그랬

구만?”

“그게 말-”

“몰래 숨어서 기습을 하다니 비

겁한 자식!”

“대낮에 강도질하다 잡힌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닥쳐!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

나?!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 너희

둘 다 가만 안 둬!”

진정시키고 대화로 잘 풀어보려

는데,이미 사내는 흥분할 대로 홍

분해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니었

다.

“이대로는 영 대화가 안 될 것

같은데,방도가 없을까요?”

“도와드릴까요?”

턱을 쥔 채 고심하는데,블러쉬

가 슬쩍 앞으로 나섰다.

“방도가 있나요?”

나는 기대 어린 눈으로 블러쉬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그에 답하듯 가법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후회하게 될 거다! 아주 후회하

게 될,히이익!”

검을 빼는 것은 보지 못했는데,

눈 깜박할 새 날카로운 칼끝이 사

내의 목에 겨눠져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

키며 두 사내의 대치를 구경했다.

정확히 말하자면,대치라고 말하

는 게 무색할 정도 한쪽이 일방적

일만큼 우세했지만.

“내가 이딴 걸 두려워할 것

더욱 거리를 좁혀온 칼끝에 사내

는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블러쉬는 딱히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광견병 걸린 양 날뛰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사내

의 낯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있었

다,

그건 단순히 겨누진 검 때문이

아니었다.

굳이 티 내지 않아도 블러쉬가

내뿜는,겨눠진 칼보다 예리한 분

위기는 쉬이 무시할 수 있는 게 아

니었다.

결국 백기를 든 건 사내 쪽이었

다.

“이제 가능할 겁니다.”

나는 무던하게 내 쪽으로 몸을

돌리는 블러쉬에 웃어 보였다.

“이건 방도가 아니라,협박 아닌

가요?”

“때론 말보다 행동이 도움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블러쉬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검

을 거뒀다.

많이 놀란 모양인지, 사내는 상

황이 정리되었음에도 숨을 혈떡이

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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