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말보다 행동
“어떻게 당신이 온 거예요? 혹시
안 좋은 생긴 건 아니죠?”
“숨 쉬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 ,,
“원래는 보고 싶다고 말할 셈이
었는데.”
블러쉬의 시선이 조금 전 칼날을
쥐었던 내 손에 닿았다.
나는 뒤늦게서야 서둘러 손을 뒤
로 감췄지만 이미 들켜버린 후였
다.
“제가 더 일찍 왔어야 했습니
다.”
“아니. 그보다는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습니다.”
한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돌
아오는 건 걱정과 분노에 찬 표정
이다.
나는 블러쉬의 살기 어린 눈이
기절한 강도 무리를 향하는 걸 보
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오해를 한 모양이다.
“실은 이 상처는 제가 낸 거예
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그
러면 저들과 대화가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나는 강도와 마주한 순
간, 새로운 계획이 떠올랐기에 더
더욱 그들의 생존 여부가 중요했
다.
“저들은 진짜 강도가 아니에요.
일반인이죠. 그걸 확인하려고-”
“확인하는 방법이 그것만은 아니
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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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제가 없던 사이 계속 이랬
던 겁니까?”
“그게…….,,
평소에는 잘만 떠들다가도 어째
서인지 블러쉬 앞에선 말문이 막힌
다.
나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슬쩍 눈
을 피했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한소리를 들
을 만한 상황이 생각났기 때문이었
다.
“이야기는 조금 있다 하고 일단
자리부터 옮기죠. 여기 계속 있다
간 눈에 띄고 말 테니까요.”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임에도 블
러쉬는 말없이 복면을 고쳐 썼다.
나는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
피다가 나를 끌어안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익숙했지만,동시에 그리운 온기
였다.
* * *
“이곳 정도면 될 것 같군요.”
먼저 앞장선 블러쉬가 내게 손수
건을 건네고, 손으로 대충 거미줄
을 치워냈다.
낡디 낡은 건물은 오랫동안 사람
의 손이 닿지 않아 조금만 눈을 돌
려도 거미줄이며,먼지가 그득했다.
나는 엉망인 방 안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의자를 찾아 가리켰다.
그리고는 조금 전 블러쉬에게 부탁
해 연행한 인질을 곁눈질했다.
“일단 인질은 저기 앉힐까요?”
“이자는 왜 데리고 온 겁니까?”
“아무래도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아서요.”
그 전에 일단 정신부터 차려야
하겠지만.
나는 블러쉬가 기절해 축 처진
사내를 의자에 내려놓고,결박하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
다.
내가 먼저 입을 열 입장은 아니
나,그가 말하기까지 기다리기에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
예요? 아직 당신은 여기 을 시기가
아니잖아요.”
“심포니아를 데리러 온 겁니다.”
저를요?”
“요정들을 다그쳐 이야기를 들었
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어봤
죠.”
당신이 요정왕의 딸은 아니냐고.
붉은 눈이 나를 향한다.
내게 대답을 바란다기보다는 이
미 뭔가를 확신한 눈이었다.
“제가 요정왕의 딸이라뇨.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 질문에 요정들은 부정도,긍
정도 하지 못하더군요.”
‘‘ ,,
“정확히는 어느 쪽도 정답이 아
니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죠?”
“이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지 한
참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곧
깨닫고 말았습니다.”
이 비밀에 관한 선택과 결정은
제 몫이 아니라는 걸.
블러쉬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얼굴을 가린 복면을 내렸다.
그리고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
쌌다.
“다만,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제
가 계속 옆에 있을 거라는 걸요.”
“제가 아는 심포니아는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서요.지금처럼.”
블러쉬가 손수건을 꺼내 내 손을
덮고,꼼꼼히 상처를 묶었다.
투박한 손과 어울리지 않게 조심
스러운 손길이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
나,전 계속 같은 자리에 있을 겁
니다.”
“아무 일도……
습관처럼 괜찮다는 말이 튀어나
오려다가 그대로 삼켜졌다.
사실 알고 있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자꾸 이상한 꿈을 꿔요. 심지어
알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르고,나도
모르는 새 감정에 흔들릴 때가 있
어요.”
"그런데,아무리 생각해도 제 생
각엔 그게 샤리에트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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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듈이 말하길,그게 사람
을 잡아먹은 것에 대한 부작용이라
고 하더라고요.”
나는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겨우
움직여 설명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
다.
차마 눈을 뜰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눈을 떴을 때,날 보는 블러쉬의
눈이 혐오로 물들어 있을까 두려웠
다.
“어쩌면,아니 아마도 제가 샤리
에트를 잡아먹었던 것일지도 몰라
요.”
“그렇군요.”
덤덤하게 덧붙인 목소리에 순간
허탈함이 밀려와 반사적으로 고개
를 들었다.
“그게 다예요?”
“저는 제가 보고 판단한 것만 믿
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정도
로 혼들릴 거라면,시작도 안 했을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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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속앓이하지 않으셔도 됩니
다. 그러려고 옆에 있고자 한 거니
까요.”
외면하려 해도 줄곧 날 괴롭혀왔
던 문제가 한순간에 눈 녹듯 녹아
버린다.
나는 블러쉬를 올려다보다가 조
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쥐었다.
역시, 나는 이 사람이 좋았다.
저 곧은 시선이 있으면,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거예
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더는 몸
을 스스로 상하게 하실 일은 하지
않으실 테니.”
“그건……
“혐오였겠죠. 다르게 말하면, 죄
책감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걸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
다.”
말문이 막혀 애꿎은 손끝만 매만
지는데,블러쉬는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상처를 감싼 손수건을 한 번 더
확인해주면서.
“물론 그건 저보다 심포니아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보
단 당신이 현명하지 않습니까.”
u……그러기엔 제 안에는 생각들
이 너무 많은걸요.”
“그럼 같이하죠. 아무리 많아도
같이 풀다 보면 답이 보일 테니까
요.”
혹여나 상처가 터질까,부드럽게
잡아 오는 배려 섞인 손길이 좋다.
나는 헤실헤실 홀러나오려는 웃
음을 삼키다가 문득 느껴지는 인기
척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절한 사내가 깨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아직 블러쉬에게 더 물어
볼 게 있었는데.
아쉬움이 남았지만 인질 앞에서
괜한 소리를 할 순 없었다.
“왜 내가,아! 너! 귀족!”
날 발견한 사내가 다가오려 했지
만, 그의 몸은 이미 의자에 묶여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내는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이
내 분노해 거친 몸짓으로 버둥거렸
다.
얼마나 날뛰는지 까딱 잘못했다
간 낡은 의자가 부서질 것 같았다.
“이봐요, 진정해요.”
“사람을 납치해 잡아다 놓고는
진정? 하, 아까부터 당당하다 싶었
는데 그게 다 뒷배가 있어서 그랬
구만?”
“그게 말-”
“몰래 숨어서 기습을 하다니 비
겁한 자식!”
“대낮에 강도질하다 잡힌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닥쳐!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
나?!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 너희
둘 다 가만 안 둬!”
진정시키고 대화로 잘 풀어보려
는데,이미 사내는 흥분할 대로 홍
분해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니었
다.
“이대로는 영 대화가 안 될 것
같은데,방도가 없을까요?”
“도와드릴까요?”
턱을 쥔 채 고심하는데,블러쉬
가 슬쩍 앞으로 나섰다.
“방도가 있나요?”
나는 기대 어린 눈으로 블러쉬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그에 답하듯 가법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후회하게 될 거다! 아주 후회하
게 될,히이익!”
검을 빼는 것은 보지 못했는데,
눈 깜박할 새 날카로운 칼끝이 사
내의 목에 겨눠져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
키며 두 사내의 대치를 구경했다.
정확히 말하자면,대치라고 말하
는 게 무색할 정도 한쪽이 일방적
일만큼 우세했지만.
“내가 이딴 걸 두려워할 것
더욱 거리를 좁혀온 칼끝에 사내
는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블러쉬는 딱히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광견병 걸린 양 날뛰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사내
의 낯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있었
다,
그건 단순히 겨누진 검 때문이
아니었다.
굳이 티 내지 않아도 블러쉬가
내뿜는,겨눠진 칼보다 예리한 분
위기는 쉬이 무시할 수 있는 게 아
니었다.
결국 백기를 든 건 사내 쪽이었
다.
“이제 가능할 겁니다.”
나는 무던하게 내 쪽으로 몸을
돌리는 블러쉬에 웃어 보였다.
“이건 방도가 아니라,협박 아닌
가요?”
“때론 말보다 행동이 도움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블러쉬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검
을 거뒀다.
많이 놀란 모양인지, 사내는 상
황이 정리되었음에도 숨을 혈떡이
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