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적의 적은
“저는 이미 혼인한 몸이에요.
아시잖아요.”
“어차피 이름뿐인 혼인이잖니.
없었던 일로 하는 건 어렵지 않
지. 네 중혼처럼.”
“……모나차르트 대공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중혼인 척 서
류를 꾸며,제가 티어드롭에 머물
수 있게끔 도운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큰 양보를 한 셈이니까요.”
“그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
이나, 그렇다고 모나차르트 대공
과 오르젠타 대공을 비견할 순
없어. 황가의 정통성이라면,오르
젠타 대공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오르젠타 대공은 이
미 우리의 수를 이미 읽고 있었
어. 만약 이대로 결혼을 거절하고
대립하게 된다면 꽤 오랜 싸움이
될 거다. 이기리란 보장도 없고.”
아버지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
어 들수록 내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갔다.
샤리에트를 향한 대단한 부정
으로 포장하고 있다고 한들,그
선택에는 내가 없었다.
과거,나를 버렸던 것처럼 아버
지는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했다.
“제가 혼인하면,오르젠타 대공
이 뭘 해준다고 하던가요?”
tt……샤리에트의 시신을 돌려주
기로 했단다.”
“그렇군요.”
“많은 걸 부탁할 생각은 없단
다. 그저,샤리에트의 시신을 전
달받을 수 있을 때까지만 네가
버텨주면-”
“네. 그렇게 할게요.”
아버지의 눈이 커지면서 고여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자신이 강요했음에도 되
레 당황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구나. 이런 부탁을
해서.”
내 반응이 오히려 양심을 괴롭
혔는지,아버지는 내 시선을 피했
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웃을 뿐
이었다.
애당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착한 딸 연기는 늘 해왔고,무
엇보다 아버지에게 기대도 없기
에 실망도 없었다.
이제 버릴 수 있는 건 아버지
만이 아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준비
하는 데에 잠시 시간이 걸려서
요.”
“아닙니다. 숙녀를 기다리는 건
신사의 기쁨인걸요.”
사내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나를 향해 예를 갖췄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흘끔 펠리오를
바라봤다.
오르젠타의 사신은 내가 아는
듈의 외형이었으나,정작 펠리오
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번에도 둘은 특수한 방법으
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마침 영애
께 들려드릴 이야기가 아주 많거
든요.”
둘의 작은 손짓에도 정령들이
바들바들 떨며 내 쪽으로 도망치
듯 몰려왔다.
하지만 나로선 정령이 보인다
는 것도, 듈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도 무엇 하나 티 낼 수 없었다.
그저 모른 척 예의에 맞게 인
사를 건네며 펠리오에게 나가 있
으라 명령할 뿐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몸이 다소 편찮
으셔서 제가 대신해 자리를 채우
기로 했는데,부디 기분 나쁘시지
■ ■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기분 나쁘긴요. 더
기뽑니다.
오히려 당사자끼리 편히 이야기
를 나눌 수 있어 좋지. 안 그래?”
별안간 듈이 목청을 낮췄다. 정
중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일
순 서슬 퍼런 안광이 내게 닿았
다.
“섭섭하게 모르는 척하지마. 네
게 어설픈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눈치채 달라고 일부러 어설프
게 꾸미고 온 건데,이렇게 외면
하면 슬프다고.”
듈이 말끝을 늘이며 몸을 낮췄
다.
쭉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그는
이미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
렸다는 걸 확신한 눈치였다.
나는 이에 반응하지 않고 조용
히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청혼이라니,어떻게 된
거예요?”
“널 곁에 두고 싶어서.”
“방금 그 표정은 너무한데. 진
심으로 싫다는 표정이라서,상처
입었다고.”
듈이 가슴을 부여잡았지만,나
는 이번에도 별 표정 없이 그를
홀길 뿐이었다.
“장난으로 청혼하는 사람에게
뭘 더 어쩌겠어요.”
“아무리 나라고 해서 장난으로
청혼하진 않아.”
“그렇다고 진심으로 절 사랑하
는 건 아니잖아요.”
“넌 내 유일한 동지잖아.”
듈이 몸을 낮춘 채 나를 응시
했지만,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
지 못했다.
되레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시선이 불쾌감을 느낄 뿐이었다.
“동지보다는 장난감 같던걸요.”
“그건 네가 동지인지, 아닌지
헷갈렸으니까 그렇고 지금은 다
르지.”
“그래서 티어드롭을 건드렸나
요?”
“티어드롭을 건드리는 것만큼
확실히 널 끌어내는 수가 없어서
말이지. 물론 그것도 우리가 혼인
하면 필요 없어지겠지만.”
확신 어린 어조는 내가 자신과
혼인하리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
고 있었다.
그 믿음이 괘씹해 나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제가 혼인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요?”
“받아들이기 싫어도 할 수 없
어. 싫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 거거든.”
“협박이라도 하려는 거예요?”
“내가 인간들에게 그동안 좀
배운 게 있거든. 상대에게서 원하
는 대답을 듣고 싶다면,그자에게
소중한 것을 쥐고 있으면 된다는
걸.”
“그게 협박 아닌가요?”
“맞아. 협박.”
“동지라면서요.”
“그래서 죽이는 건 대신, 협박
정도로만 끝내려는 거지.”
반박하고 싶었지만,말이 통할
얼굴이 아니었다.
다정한 척 웃고 있다 해도 상
대는 오만한 폭군이었다.
“그래서 무슨 협박을 하려고
요?,,
“모나차르트 대공의 목숨.”
U ,,
어떻게든 덤덤한 척 굴었어야
했는데 갑자기 블러쉬가 언급되
자마자 놀라 그러지 못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원래는 차기 황제로 두려고
살려둘 셈이었는데 말이야. 아무
래도 질투가 나서 말이지.”
“그래서 그냥 죽여버릴까 고민
중이야.”
u ,,
■
“물론,네가 어떻게 하느라에
따라 살려둘 수도 있지만.”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운운하
는 듈에게 화가 났지만,아무것도
합 수 없었다.
블러쉬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
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보다 이성
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혼인은 이미 받아들여졌어요.
그는 건드리지 말아요.”
“모나차르트 대공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거야?”
“속인다고 뭐 달라지나요. 당신
은 이미 알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차라리 드러내고 거래를 청하는
편이 낫겠죠.”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듈
이 몸을 빼곤 무릎을 내리치며
킬킬거렸다.
약간의 도박이었는데 다행히
통했나 보다.
나는 크게 웃어 재끼는 듈을
보며 허리를 곧게 폈다.
제대로 된 수는 다음부터였다.
“차기 황제는 모나차르트 대공
으로 해줘요.”
“티어드롭이 아니라, 모나차르
ᄐ?,,
— •
“네. 모나차르트요.”
듈은 항상 변수,그 자체였다.
잠시라도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의 언행에 따라 힘들이지 않
고 불리한 상황을 정리할 수도
있고.
“아내의 전남편을 내 손으로
황제로 만드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절 빼앗아왔으니, 그에 따른
보상은 해줘야죠. 그리고 방금 당
신 입으로 그랬잖아요. 원래 차기
황제로 모나차르트 대공을 염두
에 두고 있었다고.”
“내가 모나차르트 대공을 차기
황제로 생각했던 건 그자가 분란
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적우 ! 자라
서야.”
“ 알아요.”
둘이 순수하게 블러쉬를 마음
에 들어서 황제로 생각했을 리
없었다.
실제 내가 본 미래에서도 황제
가 된 블러쉬는 치세와 영광에
거리가 영 멀었으니까.
“그걸 알면서 그자를 황제로
만들어달라고?”
“그렇게라도 살길 바라니까요.”
나는 거친 숨을 뱉으며 두 손
을 모았다.
어떤 이유를 붙인다고 한들,결
국 내가 듈에게 이런 조건을 내
건 이유는 하나였다.
이용당하는 삶이 얼마나 끔찍
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
가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게 참 모
순적이나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
은 같았다.
나는 블러쉬가 죽지 않길 바랐
다.
어떤 모습이라 해도 그가 살아
있길 간절히 바랐다.
기회는 결국 산 자의 것이기에.
“그럼 조건은 그게 다인가?”
딱히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는
지,둘은 예상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어떤 순간에서도 승자의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사내를 빤
히 응시했다.
그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적으로 높은 목표
가 내 승부욕을 자극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을리며 두
눈을 빛냈다.
“아뇨. 하나 더 있어요.”
“하나 더?”
적의 적은 동지의 다른 말이라
고 했던가.
나는 듈이 줄기차게 불러대던
동지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천천
히 심호홉을 했다.
아버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나,
나는 이제 착한 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나를 버린 것처럼 나
역시, 얼마든지 그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더할 나위 없이 밝게 웃
는 얼굴로.
“티어드롭 공작을 처리해줬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