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60화 (160/204)

160화. 적의 적은

“저는 이미 혼인한 몸이에요.

아시잖아요.”

“어차피 이름뿐인 혼인이잖니.

없었던 일로 하는 건 어렵지 않

지. 네 중혼처럼.”

“……모나차르트 대공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중혼인 척 서

류를 꾸며,제가 티어드롭에 머물

수 있게끔 도운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큰 양보를 한 셈이니까요.”

“그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

이나, 그렇다고 모나차르트 대공

과 오르젠타 대공을 비견할 순

없어. 황가의 정통성이라면,오르

젠타 대공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오르젠타 대공은 이

미 우리의 수를 이미 읽고 있었

어. 만약 이대로 결혼을 거절하고

대립하게 된다면 꽤 오랜 싸움이

될 거다. 이기리란 보장도 없고.”

아버지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

어 들수록 내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갔다.

샤리에트를 향한 대단한 부정

으로 포장하고 있다고 한들,그

선택에는 내가 없었다.

과거,나를 버렸던 것처럼 아버

지는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했다.

“제가 혼인하면,오르젠타 대공

이 뭘 해준다고 하던가요?”

tt……샤리에트의 시신을 돌려주

기로 했단다.”

“그렇군요.”

“많은 걸 부탁할 생각은 없단

다. 그저,샤리에트의 시신을 전

달받을 수 있을 때까지만 네가

버텨주면-”

“네. 그렇게 할게요.”

아버지의 눈이 커지면서 고여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자신이 강요했음에도 되

레 당황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구나. 이런 부탁을

해서.”

내 반응이 오히려 양심을 괴롭

혔는지,아버지는 내 시선을 피했

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웃을 뿐

이었다.

애당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착한 딸 연기는 늘 해왔고,무

엇보다 아버지에게 기대도 없기

에 실망도 없었다.

이제 버릴 수 있는 건 아버지

만이 아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준비

하는 데에 잠시 시간이 걸려서

요.”

“아닙니다. 숙녀를 기다리는 건

신사의 기쁨인걸요.”

사내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나를 향해 예를 갖췄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흘끔 펠리오를

바라봤다.

오르젠타의 사신은 내가 아는

듈의 외형이었으나,정작 펠리오

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번에도 둘은 특수한 방법으

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마침 영애

께 들려드릴 이야기가 아주 많거

든요.”

둘의 작은 손짓에도 정령들이

바들바들 떨며 내 쪽으로 도망치

듯 몰려왔다.

하지만 나로선 정령이 보인다

는 것도, 듈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도 무엇 하나 티 낼 수 없었다.

그저 모른 척 예의에 맞게 인

사를 건네며 펠리오에게 나가 있

으라 명령할 뿐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몸이 다소 편찮

으셔서 제가 대신해 자리를 채우

기로 했는데,부디 기분 나쁘시지

■ ■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기분 나쁘긴요. 더

기뽑니다.

오히려 당사자끼리 편히 이야기

를 나눌 수 있어 좋지. 안 그래?”

별안간 듈이 목청을 낮췄다. 정

중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일

순 서슬 퍼런 안광이 내게 닿았

다.

“섭섭하게 모르는 척하지마. 네

게 어설픈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눈치채 달라고 일부러 어설프

게 꾸미고 온 건데,이렇게 외면

하면 슬프다고.”

듈이 말끝을 늘이며 몸을 낮췄

다.

쭉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그는

이미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

렸다는 걸 확신한 눈치였다.

나는 이에 반응하지 않고 조용

히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청혼이라니,어떻게 된

거예요?”

“널 곁에 두고 싶어서.”

“방금 그 표정은 너무한데. 진

심으로 싫다는 표정이라서,상처

입었다고.”

듈이 가슴을 부여잡았지만,나

는 이번에도 별 표정 없이 그를

홀길 뿐이었다.

“장난으로 청혼하는 사람에게

뭘 더 어쩌겠어요.”

“아무리 나라고 해서 장난으로

청혼하진 않아.”

“그렇다고 진심으로 절 사랑하

는 건 아니잖아요.”

“넌 내 유일한 동지잖아.”

듈이 몸을 낮춘 채 나를 응시

했지만,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

지 못했다.

되레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시선이 불쾌감을 느낄 뿐이었다.

“동지보다는 장난감 같던걸요.”

“그건 네가 동지인지, 아닌지

헷갈렸으니까 그렇고 지금은 다

르지.”

“그래서 티어드롭을 건드렸나

요?”

“티어드롭을 건드리는 것만큼

확실히 널 끌어내는 수가 없어서

말이지. 물론 그것도 우리가 혼인

하면 필요 없어지겠지만.”

확신 어린 어조는 내가 자신과

혼인하리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

고 있었다.

그 믿음이 괘씹해 나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제가 혼인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요?”

“받아들이기 싫어도 할 수 없

어. 싫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 거거든.”

“협박이라도 하려는 거예요?”

“내가 인간들에게 그동안 좀

배운 게 있거든. 상대에게서 원하

는 대답을 듣고 싶다면,그자에게

소중한 것을 쥐고 있으면 된다는

걸.”

“그게 협박 아닌가요?”

“맞아. 협박.”

“동지라면서요.”

“그래서 죽이는 건 대신, 협박

정도로만 끝내려는 거지.”

반박하고 싶었지만,말이 통할

얼굴이 아니었다.

다정한 척 웃고 있다 해도 상

대는 오만한 폭군이었다.

“그래서 무슨 협박을 하려고

요?,,

“모나차르트 대공의 목숨.”

U ,,

어떻게든 덤덤한 척 굴었어야

했는데 갑자기 블러쉬가 언급되

자마자 놀라 그러지 못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원래는 차기 황제로 두려고

살려둘 셈이었는데 말이야. 아무

래도 질투가 나서 말이지.”

“그래서 그냥 죽여버릴까 고민

중이야.”

u ,,

“물론,네가 어떻게 하느라에

따라 살려둘 수도 있지만.”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운운하

는 듈에게 화가 났지만,아무것도

합 수 없었다.

블러쉬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

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보다 이성

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혼인은 이미 받아들여졌어요.

그는 건드리지 말아요.”

“모나차르트 대공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거야?”

“속인다고 뭐 달라지나요. 당신

은 이미 알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차라리 드러내고 거래를 청하는

편이 낫겠죠.”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듈

이 몸을 빼곤 무릎을 내리치며

킬킬거렸다.

약간의 도박이었는데 다행히

통했나 보다.

나는 크게 웃어 재끼는 듈을

보며 허리를 곧게 폈다.

제대로 된 수는 다음부터였다.

“차기 황제는 모나차르트 대공

으로 해줘요.”

“티어드롭이 아니라, 모나차르

ᄐ?,,

— •

“네. 모나차르트요.”

듈은 항상 변수,그 자체였다.

잠시라도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의 언행에 따라 힘들이지 않

고 불리한 상황을 정리할 수도

있고.

“아내의 전남편을 내 손으로

황제로 만드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절 빼앗아왔으니, 그에 따른

보상은 해줘야죠. 그리고 방금 당

신 입으로 그랬잖아요. 원래 차기

황제로 모나차르트 대공을 염두

에 두고 있었다고.”

“내가 모나차르트 대공을 차기

황제로 생각했던 건 그자가 분란

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적우 ! 자라

서야.”

“ 알아요.”

둘이 순수하게 블러쉬를 마음

에 들어서 황제로 생각했을 리

없었다.

실제 내가 본 미래에서도 황제

가 된 블러쉬는 치세와 영광에

거리가 영 멀었으니까.

“그걸 알면서 그자를 황제로

만들어달라고?”

“그렇게라도 살길 바라니까요.”

나는 거친 숨을 뱉으며 두 손

을 모았다.

어떤 이유를 붙인다고 한들,결

국 내가 듈에게 이런 조건을 내

건 이유는 하나였다.

이용당하는 삶이 얼마나 끔찍

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

가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게 참 모

순적이나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

은 같았다.

나는 블러쉬가 죽지 않길 바랐

다.

어떤 모습이라 해도 그가 살아

있길 간절히 바랐다.

기회는 결국 산 자의 것이기에.

“그럼 조건은 그게 다인가?”

딱히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는

지,둘은 예상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어떤 순간에서도 승자의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사내를 빤

히 응시했다.

그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적으로 높은 목표

가 내 승부욕을 자극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을리며 두

눈을 빛냈다.

“아뇨. 하나 더 있어요.”

“하나 더?”

적의 적은 동지의 다른 말이라

고 했던가.

나는 듈이 줄기차게 불러대던

동지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천천

히 심호홉을 했다.

아버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나,

나는 이제 착한 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나를 버린 것처럼 나

역시, 얼마든지 그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더할 나위 없이 밝게 웃

는 얼굴로.

“티어드롭 공작을 처리해줬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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