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초상화
“그렇게 황실과의 연을 꺼리던
티어드롭 공작이 이제 와서 나와의
결혼을 추진한다고?”
“그래서 더 믿을 수 있는 거 아
닌가요? 그만큼 마음을 굳혔다는
거니까요?”
“나는……
“혹시 걸리시는 게 있으신가요?”
황태자의 시선이 잠깐 내게 머물
렸다가 이내 멀어졌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가만히 그
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가 입을 여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없어,그런 건,
“아무렴 그렇겠죠. 전하께 나쁜
조건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나쁜 조건은 아니야. 오
히려 좋은 조건이지.”
“그렇다면,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도 되겠네요.”
기나긴 이야기가 될 게 분명하
나,황실에 조력자가 생긴다면 꽤
든든해질 것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침
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영애가 한 말이 허풍은 아닌 모
양이야.”
“도움이 될 거라고 했잖아요.”
아버지가 그랬듯,황태자의 병도
빠르게 호전되었다.
꾸준하게 치료제만 투여받는다면
굳이 진통제를 쓰지 않아도 마음껏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었다.
“아팠을 때는 몰랐는데,몸이 성
해지니 가만히 있으니 좀이 쑤시는
군.”
“그래도 자중하셔야 해요. 전하
께서는 아직 환자로 남아계셔야 하
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굳이 설명해주
지 않아도 돼.”
황태자가 새침하게 말하고는 휙
고개를 돌리자,그 반동으로 미약
한 등불이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그는 더는 약은 피우지 않았지
만,여전히 커튼을 다 쳐놓고 박쥐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불그림자가 일렁이는 사내
의 얼굴을 보다가 품에서 가져온
물건을 꺼냈다.
“저번보다 더 많이 가져왔군.”
“이제 당분간은 저희 볼 일이 없
으니까요. 최대한 넉넉하게 신문을
모아 왔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언제까지 하녀 흉내를 내며 머
물 수 없잖아요. 저도 제 할 일을
해야죠.”
계약은 무사하게 체결되었다.
화약은 다 깔아놓은 셈이나 마찬
가지니,남은 건 포탄을 터트리기
위한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것뿐이
었다.
“날 두고 가겠다고?”
“왜요? 막상 헤어진다고 하니 아
쉬우신가요?”
“그럴 리가.”
“하기야,말이 한 달이지,실제로
만난 날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되
니 그리워할 이유도 없겠네요.”
아무리 아버지의 도움이 있다 해
도 황태자 궁을 제집 드나들듯 오
가는 건 어려웠다.
처음에 치료제를 전달하고,나눠
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 자주 방문
했다지만,이제는 그럴 필요는 없
었다.
황태자와 협력해 따로 연락책도
터 두었고,그의 침실 비밀공간에
여분의 치료제도 충분히 채워두었
다.
당분간 만나지 않아도 별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월동 준비를 마친 다람쥐처
럼 뿌듯함을 느끼며 방 내부를 한
번 쭉 살폈다.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고 슬슬 돌
아갈 심산이었다.
“……그래서,끝까지 이름은 안
알려주는 건가?”
“소식에 귀 기울이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이름인걸요.”
“그런 거라면,곧장 알려줘도 되
지 않나.”
나는 대답 대신,그냥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이름을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았
지만,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봤던 미래에서 나는 황태자
와 엮일 상황이 없었기에 그만큼
별 감정도 없었지만,그는 결국 황
제가 될 블러쉬의 앞길을 막을 장
애물이 될 터였다.
나로선 황태자를 무작정 미워하
기도,반대로 호감을 느끼기에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그냥 지금처럼 얼굴 정
도만 아는 사이에서 그쳤으면 했
다.
애매한 입장 속, 굳이 통성명까
지 했다가 최후의 날이 오면 이래
저래 심란한 기분만 들게 될 거라
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으니
까.
이 순간,날 좇는 황태자의 눈빛
이 처음과는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알아차리게 된 것처럼.
* * 米
“아가씨는 괜찮으시겠지?”
“잘하실 거야.”
“그래도 이왕이면 우리가 옆에
있는 게 더 도움 되지 않을까?”
“아가씨의 계획을 망치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M ,,
블러쉬는 아까부터 제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하는
미샤를 한 번,그리고 그 옆에서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플렌을 한
번 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걱정으로 일
이 손에 안 잡히는 건 블러쉬도 마
찬가지 였다.
자신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
니라 주장하는 심포니아를 이기지
못하고 먼저 모나차르트로 돌아오
긴 했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가시
는 건 아니었다.
되레 눈에 보이지 않은 심포니아
를 그리느라 속이 답답할 뿐이었
다.
따지고 보면,부부로 지낸 시간
이 그리 얼마 되지 않는데,요정의
장난처럼 사람을 현혹시키는 작은
여자 덕분에 무심한 사내는 하루가
다르게 눈 밑이 시퍼렇게 물들어가
고 있었다.
몰랐을 때는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지만,지금은 아니었다.
사내는 여자를 알았다.
레몬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사내의
입장도 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수줍어하면서도 제 할 말을 다
하는 여자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분명 얼굴을 붉
히며 어쩔 줄 몰라 할 텐데.’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진 여자
의 얼굴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알게
된 사내는 음험한 상상을 하면 했
지,이제 여자가 없던 시간을 떠올
리진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모든 일이 끝나길
바라게 되는 것도,지금이라도 당
장 심포니아에게 달려가고 싶음에
도 참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기
도 했고.
블러쉬는 느릿하게 숨을 뱉고는
다시 펜을 들었다.
영 일할 기분은 아니었지만,기
다림을 한시라도 줄이기 위해선 이
럴 때일수록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가 들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드디어 왔군.”
예전 같았으면 창문으로 훌쩍 넘
어 들었을 텐데,이제 답지 않게
문을 쓴다.
블러쉬는 집무실로 들어온 프로
스트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과 책상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
지 않았으나,소식만을 기다리던
사내 입장에선 그 짧은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엘프들도 마찬가지
였는지,프로스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미샤가 불쑥 튀어나왔다.
“횐둥아,아가씨는!”
“미샤,제발 이럴수록 진정하라
고 했지.”
“사과는 나중에 할 테니까,아가
씨 소식부터 전해줘! 아가씨는 괜
찮아?”
“네,무사하십니다.”
프로스트가 대답하자마자,동시
다발적으로 사방에서 안도의 한숨
이 홀러나왔다.
프로스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익숙하지 않은 관심에 우물쭈물하
며 서둘러 품을 뒤졌다.
하지만 그의 급한 마음과 달리
당황한 손은 영 갈피를 잡지 못하
고 품에 있던 종이 뭉치를 전부 꺼
내고야 말았다.
“답답하긴! 이리줘 봐!”
프로스트를 지켜보다 참지 못한
미샤가 그가 들고 있던 종이 뭉치
를 가로했고,그사이에 끼워져있던
작은 종이가 펄럭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플렌은 그 모습에 짧게 한숨 쉬
고는 몸을 낮춰 미샤가 떨어트린
종이를 주웠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종이를 확
인한 플렌은 그대로 멈칫했다.
“왜 그래? 설마 그게 아가씨의
편지야?”
플렌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긴 미
샤가 종이 뭉치를 블러쉬에게 넘기
고는 잽싸게 몸을 굽혔다.
그러고는 플렌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쪼그린 채로 그대로 굳어버
렸다.
“뭐길래 그럽니까.”
혹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걸까.
블러쉬가 플렌의 손에서 종이를
가로챘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꼬깃
꼬깃 구겨진 흔적이 완연한 종이는
심포니아의 편지가 아니었다.
듈의 초상화일 뿐이었다.
“흰둥아,이거 뭐야?”
“그게 제가 그린 오르젠타 대공
의 초상화인데……
“오르젠타 대공이라고? 이게?”
프로스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미샤는 얼굴을 구기며 블러쉬의 손
에서 도로 초상화를 빼앗았다.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
지만, 종이를 꾹꾹 누르는 작은 엄
지는 초조하다 못해 더없이 불안해
보였다.
“그럴 리 없어. 오르젠타 대공이
면,우리의 적이잖아. 그런데……
“이자를 압니까?”
“당연히 알죠. 이분을 어떻게 몰
라요.”
“이분?”
블러쉬의 한쪽 눈썹이 위를 향했
다.
미샤가 웬만하면 저런 정중한 표
현을 쓰지 않는다는 걸, 그는 그간
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