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56화 (156/204)

156화. 초상화

“그렇게 황실과의 연을 꺼리던

티어드롭 공작이 이제 와서 나와의

결혼을 추진한다고?”

“그래서 더 믿을 수 있는 거 아

닌가요? 그만큼 마음을 굳혔다는

거니까요?”

“나는……

“혹시 걸리시는 게 있으신가요?”

황태자의 시선이 잠깐 내게 머물

렸다가 이내 멀어졌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가만히 그

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가 입을 여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없어,그런 건,

“아무렴 그렇겠죠. 전하께 나쁜

조건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나쁜 조건은 아니야. 오

히려 좋은 조건이지.”

“그렇다면,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도 되겠네요.”

기나긴 이야기가 될 게 분명하

나,황실에 조력자가 생긴다면 꽤

든든해질 것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침

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영애가 한 말이 허풍은 아닌 모

양이야.”

“도움이 될 거라고 했잖아요.”

아버지가 그랬듯,황태자의 병도

빠르게 호전되었다.

꾸준하게 치료제만 투여받는다면

굳이 진통제를 쓰지 않아도 마음껏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었다.

“아팠을 때는 몰랐는데,몸이 성

해지니 가만히 있으니 좀이 쑤시는

군.”

“그래도 자중하셔야 해요. 전하

께서는 아직 환자로 남아계셔야 하

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굳이 설명해주

지 않아도 돼.”

황태자가 새침하게 말하고는 휙

고개를 돌리자,그 반동으로 미약

한 등불이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그는 더는 약은 피우지 않았지

만,여전히 커튼을 다 쳐놓고 박쥐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불그림자가 일렁이는 사내

의 얼굴을 보다가 품에서 가져온

물건을 꺼냈다.

“저번보다 더 많이 가져왔군.”

“이제 당분간은 저희 볼 일이 없

으니까요. 최대한 넉넉하게 신문을

모아 왔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언제까지 하녀 흉내를 내며 머

물 수 없잖아요. 저도 제 할 일을

해야죠.”

계약은 무사하게 체결되었다.

화약은 다 깔아놓은 셈이나 마찬

가지니,남은 건 포탄을 터트리기

위한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것뿐이

었다.

“날 두고 가겠다고?”

“왜요? 막상 헤어진다고 하니 아

쉬우신가요?”

“그럴 리가.”

“하기야,말이 한 달이지,실제로

만난 날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되

니 그리워할 이유도 없겠네요.”

아무리 아버지의 도움이 있다 해

도 황태자 궁을 제집 드나들듯 오

가는 건 어려웠다.

처음에 치료제를 전달하고,나눠

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 자주 방문

했다지만,이제는 그럴 필요는 없

었다.

황태자와 협력해 따로 연락책도

터 두었고,그의 침실 비밀공간에

여분의 치료제도 충분히 채워두었

다.

당분간 만나지 않아도 별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월동 준비를 마친 다람쥐처

럼 뿌듯함을 느끼며 방 내부를 한

번 쭉 살폈다.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고 슬슬 돌

아갈 심산이었다.

“……그래서,끝까지 이름은 안

알려주는 건가?”

“소식에 귀 기울이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이름인걸요.”

“그런 거라면,곧장 알려줘도 되

지 않나.”

나는 대답 대신,그냥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이름을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았

지만,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봤던 미래에서 나는 황태자

와 엮일 상황이 없었기에 그만큼

별 감정도 없었지만,그는 결국 황

제가 될 블러쉬의 앞길을 막을 장

애물이 될 터였다.

나로선 황태자를 무작정 미워하

기도,반대로 호감을 느끼기에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그냥 지금처럼 얼굴 정

도만 아는 사이에서 그쳤으면 했

다.

애매한 입장 속, 굳이 통성명까

지 했다가 최후의 날이 오면 이래

저래 심란한 기분만 들게 될 거라

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으니

까.

이 순간,날 좇는 황태자의 눈빛

이 처음과는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알아차리게 된 것처럼.

* * 米

“아가씨는 괜찮으시겠지?”

“잘하실 거야.”

“그래도 이왕이면 우리가 옆에

있는 게 더 도움 되지 않을까?”

“아가씨의 계획을 망치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M ,,

블러쉬는 아까부터 제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하는

미샤를 한 번,그리고 그 옆에서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플렌을 한

번 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걱정으로 일

이 손에 안 잡히는 건 블러쉬도 마

찬가지 였다.

자신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

니라 주장하는 심포니아를 이기지

못하고 먼저 모나차르트로 돌아오

긴 했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가시

는 건 아니었다.

되레 눈에 보이지 않은 심포니아

를 그리느라 속이 답답할 뿐이었

다.

따지고 보면,부부로 지낸 시간

이 그리 얼마 되지 않는데,요정의

장난처럼 사람을 현혹시키는 작은

여자 덕분에 무심한 사내는 하루가

다르게 눈 밑이 시퍼렇게 물들어가

고 있었다.

몰랐을 때는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지만,지금은 아니었다.

사내는 여자를 알았다.

레몬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사내의

입장도 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수줍어하면서도 제 할 말을 다

하는 여자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분명 얼굴을 붉

히며 어쩔 줄 몰라 할 텐데.’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진 여자

의 얼굴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알게

된 사내는 음험한 상상을 하면 했

지,이제 여자가 없던 시간을 떠올

리진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모든 일이 끝나길

바라게 되는 것도,지금이라도 당

장 심포니아에게 달려가고 싶음에

도 참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기

도 했고.

블러쉬는 느릿하게 숨을 뱉고는

다시 펜을 들었다.

영 일할 기분은 아니었지만,기

다림을 한시라도 줄이기 위해선 이

럴 때일수록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가 들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드디어 왔군.”

예전 같았으면 창문으로 훌쩍 넘

어 들었을 텐데,이제 답지 않게

문을 쓴다.

블러쉬는 집무실로 들어온 프로

스트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과 책상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

지 않았으나,소식만을 기다리던

사내 입장에선 그 짧은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엘프들도 마찬가지

였는지,프로스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미샤가 불쑥 튀어나왔다.

“횐둥아,아가씨는!”

“미샤,제발 이럴수록 진정하라

고 했지.”

“사과는 나중에 할 테니까,아가

씨 소식부터 전해줘! 아가씨는 괜

찮아?”

“네,무사하십니다.”

프로스트가 대답하자마자,동시

다발적으로 사방에서 안도의 한숨

이 홀러나왔다.

프로스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익숙하지 않은 관심에 우물쭈물하

며 서둘러 품을 뒤졌다.

하지만 그의 급한 마음과 달리

당황한 손은 영 갈피를 잡지 못하

고 품에 있던 종이 뭉치를 전부 꺼

내고야 말았다.

“답답하긴! 이리줘 봐!”

프로스트를 지켜보다 참지 못한

미샤가 그가 들고 있던 종이 뭉치

를 가로했고,그사이에 끼워져있던

작은 종이가 펄럭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플렌은 그 모습에 짧게 한숨 쉬

고는 몸을 낮춰 미샤가 떨어트린

종이를 주웠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종이를 확

인한 플렌은 그대로 멈칫했다.

“왜 그래? 설마 그게 아가씨의

편지야?”

플렌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긴 미

샤가 종이 뭉치를 블러쉬에게 넘기

고는 잽싸게 몸을 굽혔다.

그러고는 플렌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쪼그린 채로 그대로 굳어버

렸다.

“뭐길래 그럽니까.”

혹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걸까.

블러쉬가 플렌의 손에서 종이를

가로챘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꼬깃

꼬깃 구겨진 흔적이 완연한 종이는

심포니아의 편지가 아니었다.

듈의 초상화일 뿐이었다.

“흰둥아,이거 뭐야?”

“그게 제가 그린 오르젠타 대공

의 초상화인데……

“오르젠타 대공이라고? 이게?”

프로스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미샤는 얼굴을 구기며 블러쉬의 손

에서 도로 초상화를 빼앗았다.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

지만, 종이를 꾹꾹 누르는 작은 엄

지는 초조하다 못해 더없이 불안해

보였다.

“그럴 리 없어. 오르젠타 대공이

면,우리의 적이잖아. 그런데……

“이자를 압니까?”

“당연히 알죠. 이분을 어떻게 몰

라요.”

“이분?”

블러쉬의 한쪽 눈썹이 위를 향했

다.

미샤가 웬만하면 저런 정중한 표

현을 쓰지 않는다는 걸, 그는 그간

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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