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55화 (155/204)

155화. 일그러졌지만

“……정말이지, 네 주인이 누군

지는 몰라도 참 괴상한 물건을 보

냈구나.”

“원래 괴상한 것일수록 사람을

홀리곤 하죠.”

“말 한마디도 지지 않는 걸 보니

성격도 그리 좋진 않고.”

“딱히 굽힐 필요성을 못 느껴서

요.”

좀 더 멋스럽게 표현하고 싶었는

데,온전하지 않은 정신으로는 떠

올릴 수 있는 단어에 한계가 있었

다.

나는 최대한 허튼소리를 하지 않

게 다음에 해야 할 이야기를 미리

미리 떠올려가며 제대로 언급하는

연습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가장 중요한 건 겁이 너무 없다

는 거겠지. 귀하게 큰 영애답지 않

게 말이야.”

“아니, 말뿐인 영애라서 그런

가?”

얼굴이 잡혔다,아니 그럴 줄 알

았다.

나는 들어 을려진 은빛 머리카락

과 그걸 쥔 채 입꼬리를 비틀고 있

는 황태자를 보며 혀를 찼다.

아까 황태자에게 붙들려 넘어지

면서 가발이 살짝 벗겨진 모양이었

다.

“진한 녹색 눈동자에 은색 머리

카락이라니,너무 뻔한 조합 아닌

가. 티어드롭 공작 영애.”

“이런,들켰네요.”

“별 감홍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

고 있으면서 놀란 척은.”

“지금이라도 놀란 척해드릴까

요?”

음,이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군.

나는 불만에 찬 사내의 표정으로

대답을 유추하며 느릿하게 숨을 뱉

었다.

오기로 참아보려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름이 뭐지?”

“티어드롭이죠.”

“그런 걸 물은 게 아닐 텐데.”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요.”

내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차피 언

젠간 적이 되어야 한다.

깊게 정을 줄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마음속 깊이 곱

씹으며 눈을 감았다.

좀 더 버티고 싶었는데, 딱 여기

까지가 한계였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꽃잎

이 춤을 춘다.

나는 꽃잎을 따라 걷다가 나무

밑동에 앉아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는 쪼르르 달려갔다.

창백하단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새

하얀 낯빛의 사내는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세요! 얼른요!”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

던 것처럼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잠든 사내의 옷깃을 꽉 쥐

고 흔들었지만,그는 쉽게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이번

에는 사내의 얼굴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사내의 얼굴에 비해 한참 작은

손은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아이

의 것이었다.

“이런. 내가 또 잠이 들었나 보

구나.”

그렇게 한참을 깨우고서야 사내

의 무거운 눈꺼풀이 을라갔다.

“제가 얼마나 깨웠는지 아세요?”

“미안하구나.”

사내가 불만으로 가득 차 빵빵해

진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유난히도 진한 녹색 눈동자

를 보며 입을 삐쭉거리다가 두 팔

을 벌리는 사내에 결국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이번만

용서해드리는

거 예요.

다음부터는 안 돼요. 아셨죠?”

“왜 대답 안 해주세요?”

“알잖니.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그럼 계속 이렇게 늦잠 주무실

거라는 거예요?”

사내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웃

기만 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답은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빠요.”

“그러니까 미워할래요.”

“괜찮아. 내가 널 좋아하니까.”

“……아니에요. 미안해요. 거짓말

이에요. 안 미워해요.”

사내와의 다툼은 항상 이런 식이

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냥 웃기

만 하는 사내였기에,나는 칭얼거

리기를 포기하고 대신 품에 넣어온

꽃송이를 한 움큼 꺼냈다.

“오늘도 꽃을 가져온 거야?”

“장로님이 꽃을 따지 말라고 해

서 주워왔어요.”

넣어둔 꽃 때문에 가슴팍이 붉게

물들었지만,그보다는 꽃송이를 자

랑하는 게 먼저였다.

나는 하나로 땋아 내린 그의 머

리카락에 꽃을 한 송이,한 송이

꼼꼼하게 꽂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

었다.

지금껏 만져본 무엇보다 곱고 부

드러웠던 사내의 머리카락은 언제

부턴지 점차 색이 바래고 거칠어지

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가져오기

시작한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내와 내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다음에는 더 예쁜 꽃을 가져올

게요.”

“그래. 기대하마.”

꽃도 예쁘지만 역시, 가장 예쁜

건 사내다.

나는 가슴께가 뿌듯한 기분을 느

끼며 이가 보일 정도로 웃었고,사

내는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

다듬어주었다.

그에게선 나무 냄새가 났다.

그건 숲에서 가장 커다랗고 오래

된 고목과 같은 냄새였다.

나는 사내의 품을 파고들었고,

그는 자연스레 나를 끌어안고 내

등을 다독였다.

“아가.”

“네.”

“나와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약속? 그게 무슨 약속이더라?

되묻고 싶었지만 여긴 내 의지대

로 움직이는 세상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질문 대신,

새끼손가락을 사내에게 내밀며 씨

익 웃는 것뿐이었다.

이번에도 듈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거친 숨을 뱉었다.

방 안이 어두운 걸로 봐선 밤인

가 싶었다가 마주친 눈에 미간올

좁혔다.

뒤늦게야 내가 어디서 쓰러졌던

건지 깨달은 덕분이었다,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죠?”

“다섯 시간.”

“이런.”

나는 혀를 차며 일어나려다가 내

가 짚은 바닥이 푹신거린다는 사실

을 인지하고 또 한 번 인상을 썼

다.

내가 누워있는 곳은 다름 아닌,

황태자의 침대였다.

“전하께서 옮겨주신 건가요?”

“일단 내 책임도 있으니까. 그리

고,영애는 치료제가 있다고 했으

니 병이 옮는 것 정도는 상관없잖

아.”

책임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내

려다본 내 손목에는 검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가뜩이나 예민한 피부라 쉽게 자

국이 남는 편인데,워낙 세게 움켜

쥐어 피멍처럼 자국이 남은 모양이

었다.

거기에 진통 효과가 사라지면서

넘어졌던 몸도 뻐근하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블러쉬와 재회하기 전까진 낫겠

지?’

시도 때도 없이 욱신거리는 통증

은 익숙해지기 어렵지만, 그보단

걱정할 사람들이 더 먼저 떠올랐

다.

“난 그저 침입자를 제압했을 뿐

이야.”

이런 내 시선을 오인했는지,황

태자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의 뒤편에는 열린 창문들이 보

였다.

아무래도 내가 기절한 사이,황

태자가 연기를 모두 환기시킨 모양

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가늘어진 눈메는 불신을 담고 있

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약에 취해 고

문을 당했다고 이야기했던 전적이

있긴 했었지.

물론 내가 언급한 고문이란 건,

지금이 아닌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서 겪었다는 점에서 다소 다르긴

하지만.

나는 오해를 풀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황태자가 오해를 하든,안 하든

간에 나와는 별 상관없는 문제였

다.

되레 이 김에 동정표라도 살 수

있으면 더 좋고.

“그것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해

보는 건 어떠세요?”

“깊은 이야기?”

“저희 계획에 관한 것과 서로의

신뢰를 높일 수 있는 방도에 관해

서 말이죠.”

“계획은 둘째치고, 신뢰는 뭐

지?,,

황태자가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

게 섰다.

나와 손잡는 게 썩 유쾌하진 않

지만,그래도 이야기는 들어보겠단

심산이었다.

“티어드롭이 자선 단체도 아니고

무작정 전하에게 내줄 수 없잖아

요. 거래를 위한 담보 정도는 있어

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영애의 제안을 무조건 수

용할 거라고 믿은 모양이군.”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없잖아

요.”

“……그래서 될 원하는 거지?”

“귀족들이 신뢰를 주고받는 방법

으론 가장 고전적인 게 있잖아요.”

“나와의 혼인이라도 원하나?”

황태자가 슬쩍 침대 쪽으로 다가

왔다.

찡그려진 눈을 보아하니 아무래

도 내가 그와 결혼한다고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가슴에 손을 을리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질색하지 않으셔도 돼요. 신부

는 제가 아니니까요.”

“……영애가 아니라고?”

기뻐하는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

데,황태자는 여전히 떨떠름한 얼

굴이다.

물론 그건 곧 언급될 여자의 이

름을 들으면 바뀌겠지만.

황태자에게 있어서 티어드롭은

혼인 상대로 나쁜 조건이 아니었

다.

어설픈 소국의 공주와 결혼할 바

에는 차라리 티어드롭이 나을 만

큼,티어드롭의 명성은 무시할 만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점점 기반이 약해지고 있는 황태

자로선 이름뿐인 공작 영애가 아

닌,진짜 공작 영애를 아내로 맞이

한다는 것에 기삐할 수밖에 없었

다.

“샤리에트 블랑 티어드롭.”

“그게 이제부터 전하의 약혼녀가

될 여자의 이름이에요.”

내 예상과 달리,샤리에트의 이

름을 들은 사내의 얼굴은 더 일그

러 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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