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세상에 당연한 건
“……누가 보낸 거지?”
“전하와의 동맹이 필요한 자라고
해두죠.”
“나와의 동맹?”
황태자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나는 별 표정 없이 한껏 젖혀진
그의 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반점을
가만히 응시했다.
황태자가 약을 한 이유를 얼핏
알 것 같기 때문이었다.
“내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
오나?”
“그런 꼴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
다.”
“뭐?”
“다만,약은 예상 밖이었지만요.”
“혹시,이거 중독성 있는 약물인
가요? 그러면 좀 곤란해질 것 같은
데요.”
날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좋게 말하면 경이로움에 찬,나
쁘게 말하자면 헛소리하는 작자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다 알면서도 모
른 척 다음 말을 이었다.
“전하를 괴롭히는 증상,제가 치
료해드릴 수 있어요.”
“치료? 나를?”
“네.”
“거짓말하지 마. 이 병은 어떤
의사도-,,
“병을 퍼트린 이를 알아요.”
U ,,
황태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약에 취해있긴 하지만 눈및이 제
법 곧은 게 나쁘지 않았다.
며칠 전,회의장에서 봤던 이들
보다 이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도박을 해봐도 나쁘지 않을 듯했
다.
“……그게 누구지?”
“저희와 동맹을 약속해주시면 말
씀드릴게요.”
“그러려면 네가 누구인지부터 밝
혀야 하는 게 아닌가?”
“제 뒤에는 요정의 날개가 있죠.
그 정도면 충분하겠죠.”
“요정의 날개라면……
의심 어린 시선이 빠르게 날 훑
어내렸으나,그것으로는 진의를 파
악하기 어려운지 황태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그는 한참을 입을 꾹 다물
고 있다가 눈에 힘을 잔뜩 준 채로
겨우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라면 가만두지 않
을 테다.”
“의심은 좋은 습관이죠.”
44 차
♦
“대신,그러기 전에 제대로 이야
기를 들을 필요가 있겠지만요. 의
심만 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건 너
무 아깝잖아요.”
이에 황태자는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손에서 힘을 뻤
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잡혀있던
손목을 빼냈다.
날 내려다보는 눈은 변함없이 험
상궂었지만,나는 이미 그것보다
날 선 눈을 가진 사내를 하나 알고
있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황태자 전
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제
공해드릴게요.”
“내가 요구할 조건은?”
“필요할 때,황가의 힘을 빌려주
셨으면 해요.”
멀리 보면,나와 황태자는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손을 잡는 편이 나았다.
듈올 상대하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아군이 필요했지만,
점점 총기를 잃어가는 황제를 믿고
그와 손을 잡기에는 위험부담이 너
무 컸다.
언젠간 등을 지게 될지언정 지금
은 미숙해도 눈빛이 살아있는 황태
자 쪽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물론, 약에 취했긴 하지만 이 또
한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일 터였
다.
“황가의 힘이 필요하다면,날 찾
아오면 안 될 텐데.”
“황금 월계수의 현 주인보다 차
기 주인이 조건이 더 나아 보여서
요.”
“지나치게 겁이 없군.”
내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알아차
린 황태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날 위협하기
란 어려웠다.
“상대를 아는 거죠.”
u……날 안다?”
“황태자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선택지가 얼마 없다는 걸요.”
지금이야 황태자라 불리나, 그가
언제까지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
을지 확언할 수 없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후계자의 입지
를 지켜주는 건 외가의 권세였으
나,그렇기에 그들은 황제의 눈 밖
에 난 지 오래였다.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인 황제는
이느 순간부터 장성한 아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대신,다른 생각
을 마음에 품었으니까.
언젠간 자신의 끝이 제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을
“뭘 알고 지껄이는 건가? 아니
면,함부로 입을 놀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건가?”
“적어도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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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정부의 발병 소식에는 꽁
지 빠진 새처럼 급히 달려가셨지만
요.”
싸늘하게 날 노려보는 황태자의
시선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웃었다.
내가 아는 것을 황태자가 모른다
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모른 척하려고 애쓸
뿐이다.
그러지 않으면,자신의 칼이 결
국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뻔히 보
이 니 까.
“다들 그러죠. 부모와 자식 간에
는 특별한 유대가 존재한다고. 핏
줄로 이어진 관계는 그 무엇에도
비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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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라는 건,받은 만큼 돌려줘
야 하는 거지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상대가 애써 외면해오고 있는 현
실을 억지로 파헤치고 강조한다.
대놓고 상처를 쑤시는 듯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정신을 단번에 차리
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나만 하더라도 이미 경험해본 적
이 있었고.
“그래서, 내게 설교라도 하고 싶
은 건가?”
일그러진 얼굴에는 불쾌함이 그
득했지만,내겐 정곡을 찔려 제 발
을 저린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원래 불쾌한 진실은 누구보다 자
기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 말
이다.
“그러기엔 입 아프게 설명할 필
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아닌가요?”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더 매서
워졌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미소를
잃지 않았고,결국 시선을 피하는
건 사내 쪽이었다.
이를 꽉 문 채 몸을 일으키는 황
태자를 보며 나 역시,자리에서 일
어났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순간
무너지는 몸에 다급히 헛숨을 삼켰
다.
“이깟 약 기운도 이겨내지 못하
면서 입만 살아있군.”
동시에 뻗어진 손에 손목이 잡히
고서야 새삼스레 약의 존재가 실감
났다.
바닥에 누워있을 때와 달리, 막
상 몸을 움직이려고 하니 약 기운
이 도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부축해주시는 걸 보니,
흔들리시나 보네요.”
몸에 힘이 빠져나갔지만 말은 얼
마든지 할 수 있다.
나는 고뇌에 찬 사내의 얼굴을
보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나는 폐하께 반기 들 생각
이 없어.”
“그럼 전하께서는 이대로 죽으셔
야겠네요. 제가 보기엔 전하께서
폐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은 그것밖에 없어 보였거든요.”
“폐하께서는 현명하신 분이야.
지금은 나에 대해 오해하고 계시
나,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그러면 전하의 목숨도 더 빨리
위협받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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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면,점점 두각을 보이는
아들이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 각
인될 뿐이고,반대로 아무것도 하
지 않으면 무능하다 손가락질받게
될 테니까요.”
“결국 전하께 주어진 선택지는
페하께 잘 보이는 게 아니라,다른
거죠.”
죽거나,혹은 죽이거나.
가벼운 투로 말했으나, 농담은
아니었다.
한 번 마음에 싹튼 두려움은 사
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두려움
은 황제의 광중과 함께 무럭무럭
자라 결국 최악의 결말을 부르게
될 것이다.
“결국 치료제는 핑계로군.”
“핑계가 아닌,전하께 기회를 드
리려는 겁니다.”
“기회?”
“기회는 산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고,저희와의 동맹이 전하의
수명을 하루라도 연장시켜드릴 테
니까요.”
그리고 폐하와 싸우실지 말지,
생각할 시간도 일단 살아남아야 할
수 있잖아요.
내가 뻔뻔스럽게 웃으며 덧붙이
자,그의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
갔다.
하지만 약 기운 탓인지,분명 아
까보다 세게 움켜잡은 것 같은데
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병을 잊기 위해 피운 약인 만큼
진통 성분이 강하게 들어간 모양이
다,아니. 진통 성분만 들어간 건
아닌가.
나는 자꾸만 몽통해지는 정신에
주먹을 꽉 쥐었다.
통증이라도 느껴지면 정신이 돌
아올까 했는데,안타깝게도 진통
효과 탓에 손톱이 살을 짓눌러도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겁이 없군.
지나치다 싶으리만큼 없어도 너무
없어.”
“제 장점이죠.”
“내가 티어드롭이 반역을 꿈꾼다
고 폐하께 고발할 수도 있단 생각
은 안 해봤나?”
“어디 해보세요. 그것도 재있겠
네요.”
“이 자리에서 널 잡아 고문해 치
료제의 행방을 알아낼 수도 있고,”
“고문한다고 해서 제가 순순히
정보를 불 것 같나요?”
어차피 고문을 한두 번 당해본
것도 아닌데.
나는 뒷말은 삼키며 키득거렸다.
이번에는 내 자의로 웃었다기보
다는 그냥 웃음이 나온 탓이었는
데,반대로 황태자의 표정은 일그
러졌다.
나는 느려진 판단력으로 방금 전
일을 되짚어보고는 짧게 한숨을 뱉
었다.
실수로 삼켰어야 할 말을 뱉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