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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154화 (154/204)

154화. 세상에 당연한 건

“……누가 보낸 거지?”

“전하와의 동맹이 필요한 자라고

해두죠.”

“나와의 동맹?”

황태자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나는 별 표정 없이 한껏 젖혀진

그의 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반점을

가만히 응시했다.

황태자가 약을 한 이유를 얼핏

알 것 같기 때문이었다.

“내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

오나?”

“그런 꼴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

다.”

“뭐?”

“다만,약은 예상 밖이었지만요.”

“혹시,이거 중독성 있는 약물인

가요? 그러면 좀 곤란해질 것 같은

데요.”

날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좋게 말하면 경이로움에 찬,나

쁘게 말하자면 헛소리하는 작자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다 알면서도 모

른 척 다음 말을 이었다.

“전하를 괴롭히는 증상,제가 치

료해드릴 수 있어요.”

“치료? 나를?”

“네.”

“거짓말하지 마. 이 병은 어떤

의사도-,,

“병을 퍼트린 이를 알아요.”

U ,,

황태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약에 취해있긴 하지만 눈및이 제

법 곧은 게 나쁘지 않았다.

며칠 전,회의장에서 봤던 이들

보다 이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도박을 해봐도 나쁘지 않을 듯했

다.

“……그게 누구지?”

“저희와 동맹을 약속해주시면 말

씀드릴게요.”

“그러려면 네가 누구인지부터 밝

혀야 하는 게 아닌가?”

“제 뒤에는 요정의 날개가 있죠.

그 정도면 충분하겠죠.”

“요정의 날개라면……

의심 어린 시선이 빠르게 날 훑

어내렸으나,그것으로는 진의를 파

악하기 어려운지 황태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그는 한참을 입을 꾹 다물

고 있다가 눈에 힘을 잔뜩 준 채로

겨우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라면 가만두지 않

을 테다.”

“의심은 좋은 습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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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그러기 전에 제대로 이야

기를 들을 필요가 있겠지만요. 의

심만 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건 너

무 아깝잖아요.”

이에 황태자는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손에서 힘을 뻤

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잡혀있던

손목을 빼냈다.

날 내려다보는 눈은 변함없이 험

상궂었지만,나는 이미 그것보다

날 선 눈을 가진 사내를 하나 알고

있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황태자 전

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제

공해드릴게요.”

“내가 요구할 조건은?”

“필요할 때,황가의 힘을 빌려주

셨으면 해요.”

멀리 보면,나와 황태자는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손을 잡는 편이 나았다.

듈올 상대하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아군이 필요했지만,

점점 총기를 잃어가는 황제를 믿고

그와 손을 잡기에는 위험부담이 너

무 컸다.

언젠간 등을 지게 될지언정 지금

은 미숙해도 눈빛이 살아있는 황태

자 쪽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물론, 약에 취했긴 하지만 이 또

한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일 터였

다.

“황가의 힘이 필요하다면,날 찾

아오면 안 될 텐데.”

“황금 월계수의 현 주인보다 차

기 주인이 조건이 더 나아 보여서

요.”

“지나치게 겁이 없군.”

내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알아차

린 황태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날 위협하기

란 어려웠다.

“상대를 아는 거죠.”

u……날 안다?”

“황태자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선택지가 얼마 없다는 걸요.”

지금이야 황태자라 불리나, 그가

언제까지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

을지 확언할 수 없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후계자의 입지

를 지켜주는 건 외가의 권세였으

나,그렇기에 그들은 황제의 눈 밖

에 난 지 오래였다.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인 황제는

이느 순간부터 장성한 아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대신,다른 생각

을 마음에 품었으니까.

언젠간 자신의 끝이 제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뭘 알고 지껄이는 건가? 아니

면,함부로 입을 놀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건가?”

“적어도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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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정부의 발병 소식에는 꽁

지 빠진 새처럼 급히 달려가셨지만

요.”

싸늘하게 날 노려보는 황태자의

시선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웃었다.

내가 아는 것을 황태자가 모른다

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모른 척하려고 애쓸

뿐이다.

그러지 않으면,자신의 칼이 결

국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뻔히 보

이 니 까.

“다들 그러죠. 부모와 자식 간에

는 특별한 유대가 존재한다고. 핏

줄로 이어진 관계는 그 무엇에도

비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데.”

U

“관계라는 건,받은 만큼 돌려줘

야 하는 거지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상대가 애써 외면해오고 있는 현

실을 억지로 파헤치고 강조한다.

대놓고 상처를 쑤시는 듯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정신을 단번에 차리

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나만 하더라도 이미 경험해본 적

이 있었고.

“그래서, 내게 설교라도 하고 싶

은 건가?”

일그러진 얼굴에는 불쾌함이 그

득했지만,내겐 정곡을 찔려 제 발

을 저린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원래 불쾌한 진실은 누구보다 자

기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 말

이다.

“그러기엔 입 아프게 설명할 필

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아닌가요?”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더 매서

워졌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미소를

잃지 않았고,결국 시선을 피하는

건 사내 쪽이었다.

이를 꽉 문 채 몸을 일으키는 황

태자를 보며 나 역시,자리에서 일

어났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순간

무너지는 몸에 다급히 헛숨을 삼켰

다.

“이깟 약 기운도 이겨내지 못하

면서 입만 살아있군.”

동시에 뻗어진 손에 손목이 잡히

고서야 새삼스레 약의 존재가 실감

났다.

바닥에 누워있을 때와 달리, 막

상 몸을 움직이려고 하니 약 기운

이 도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부축해주시는 걸 보니,

흔들리시나 보네요.”

몸에 힘이 빠져나갔지만 말은 얼

마든지 할 수 있다.

나는 고뇌에 찬 사내의 얼굴을

보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나는 폐하께 반기 들 생각

이 없어.”

“그럼 전하께서는 이대로 죽으셔

야겠네요. 제가 보기엔 전하께서

폐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은 그것밖에 없어 보였거든요.”

“폐하께서는 현명하신 분이야.

지금은 나에 대해 오해하고 계시

나,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그러면 전하의 목숨도 더 빨리

위협받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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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면,점점 두각을 보이는

아들이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 각

인될 뿐이고,반대로 아무것도 하

지 않으면 무능하다 손가락질받게

될 테니까요.”

“결국 전하께 주어진 선택지는

페하께 잘 보이는 게 아니라,다른

거죠.”

죽거나,혹은 죽이거나.

가벼운 투로 말했으나, 농담은

아니었다.

한 번 마음에 싹튼 두려움은 사

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두려움

은 황제의 광중과 함께 무럭무럭

자라 결국 최악의 결말을 부르게

될 것이다.

“결국 치료제는 핑계로군.”

“핑계가 아닌,전하께 기회를 드

리려는 겁니다.”

“기회?”

“기회는 산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고,저희와의 동맹이 전하의

수명을 하루라도 연장시켜드릴 테

니까요.”

그리고 폐하와 싸우실지 말지,

생각할 시간도 일단 살아남아야 할

수 있잖아요.

내가 뻔뻔스럽게 웃으며 덧붙이

자,그의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

갔다.

하지만 약 기운 탓인지,분명 아

까보다 세게 움켜잡은 것 같은데

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병을 잊기 위해 피운 약인 만큼

진통 성분이 강하게 들어간 모양이

다,아니. 진통 성분만 들어간 건

아닌가.

나는 자꾸만 몽통해지는 정신에

주먹을 꽉 쥐었다.

통증이라도 느껴지면 정신이 돌

아올까 했는데,안타깝게도 진통

효과 탓에 손톱이 살을 짓눌러도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겁이 없군.

지나치다 싶으리만큼 없어도 너무

없어.”

“제 장점이죠.”

“내가 티어드롭이 반역을 꿈꾼다

고 폐하께 고발할 수도 있단 생각

은 안 해봤나?”

“어디 해보세요. 그것도 재있겠

네요.”

“이 자리에서 널 잡아 고문해 치

료제의 행방을 알아낼 수도 있고,”

“고문한다고 해서 제가 순순히

정보를 불 것 같나요?”

어차피 고문을 한두 번 당해본

것도 아닌데.

나는 뒷말은 삼키며 키득거렸다.

이번에는 내 자의로 웃었다기보

다는 그냥 웃음이 나온 탓이었는

데,반대로 황태자의 표정은 일그

러졌다.

나는 느려진 판단력으로 방금 전

일을 되짚어보고는 짧게 한숨을 뱉

었다.

실수로 삼켰어야 할 말을 뱉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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