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53화 (153/204)

153화. 고명한 황태자

“나는 그 사람이 아니야.”

“물론 알고 있습니다.”

아슬아슬 내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이 멀어진다.

잘못을 지적받은 아이처럼 처진

프로스트의 어깨를 보다가 이내 손

을 내밀었다.

"그래도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이번 일이 끝나고 천천히 들려

줘. 그 사람에 대해서.”

tt그리고,너에 대해서.”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프로스트가 말을 더듬거리며 고

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

데도 그의 창백한 얼굴은 눈에 띄

게 새빨개져 있었다.

“괜찮아. 앞으로 시간은 많을 테

니까.,,

U

“기다려줄 수 있지?”

“네.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날 내려다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어여쁘다.

나는 괜히 가슴께가 뻐근해지는

기분에 씨익 웃었다.

프로스트의 키가 조금만 더 작거

나,어렸다면 머리라도 쓰다듬어줬

을 것이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

게 잘 지내고 있어야 해. 다치지

말고.”

“그건 저보다 비 전하가-”

“대답.”

‘‘아,네! 잘 지내겠습니다.”

“잘했어.”

“아……广

“선물 잘 쓸게.”

나는 수줍게 미소 짓는 프로스트

를 보며 선물 받은 호루라기를 꼭

쥐었다.

작은 나뭇조각이었음에도,어떤

선물보다 든든한 건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리본을 점검하

고는 거울 앞에 비친 내 모습을 바

라봤다.

혹시나 티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

는데,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톤 낮은 남색 면 드레스에 앞치

마까지 두르고, 머리까지 말끔하게

하나로 올려묶으니 제법 하녀처럼

그럴싸하게 보였다.

눈에 띄는 머리카락 색을 감추기

위해 쓴 가발의 덕도 톡톡히 보았

고,무엇보다 내 가슴팍에는 황실

하녀를 상징하는 금색 배지가 달려

있었으니까.

세세하게 보면 부드러운 손이며

자세 같은 부분에서 티가 나겠지

만,많고 많은 하녀를 일일이 신경

쓰는 이는 드물었다.

굳이 소란을 피우지 않는 이상,

들킬 위험은 없을 터였다.

“준비는 다 끝냈니?”

준비를 끝마치고 뒷문으로 빠져

나오는데,이미 입구에는 먼저 온

이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마주친 녹색 눈에 새삼스레

놀란 척 굴며 입고 있던 망토를 새

로이 여였다.

“벌써 거동하셔도 되는 거예요?”

“네가 준 약이 효과가 좋은 모양

이다. 나날이 몸이 나아지고 있어.”

아버지는 웃었지만,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예전보다 부

쩍 노쇠해진 아버지의 손을 잡았

다.

소매 아래로 살짝 드러난 아버지

의 손목에는 돌림병의 증상 중 하

나인 반점이 희미하게나마 자리 잡

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시면 안 돼

요. 아시죠?”

내가 아버지에게 투여하고 있는

약은 반쪽짜리이지만,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치료제에는 증세를 약화시킴과

동시에 주변의 감염을 막아주는 효

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효과일 뿐

이었다.

진짜 치료제와 달리 약을 지속해

서 투여할 때만 볼 수 있었고,반

대로 그러지 못한다면 언제든 증상

이 다시 발현될 수 있었다.

“나보다는 네 걱정부터 먼저 하

렴.”

“저는 괜찮아요. 무려 아버지께

서 손을 써주셨잖아요.”

아버지는 항상 티어드롭이 최고

가 되길 바랐고, 그 욕망의 마지막

목표에는 황실이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황실을 견제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은밀히 사

람들을 풀어놓은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내가 도

울 수 있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께 폐 끼치는 일은 되도

록 없도록 할게요.”

평소처럼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

을 했을 뿐인데,이번에는 조금 달

탔다.

아버지는 그저 아무런 말 없이

날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으

면 좋겠구나.”

“내겐 다른 것보다 네가 무사히

돌아오는 게 큰 기쁨일 테니까.”

이제 와서요?

나도 모르게 반박할 뻔했지만 겨

우 참았다.

고작 내가 불쾌하단 이유로 지금

껏 쌓아온 계획을 수포로 돌릴 수

없었다.

내 기분이 어떻든 간에,나는 끝

까지 착한 딸을 연기해야만 했다.

황제는 정말로 황태자를 이대로

죽게 할 셈일까.

나는 비교적 한적한 경비를 살피

며 조심스럽게 복도로 빠져나왔다.

이미 황태자의 위치를 알고 있었

던 터라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

지만,황태자가 기거하는 궁과는

걸맞지 않게 소홀한 관리 태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피로 이어진

부모와 자식 관계는 참 질긴 것이

었는데,황실 부자에게서만큼은 그

런 끈덕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

으니까.

물론 그 덕분에 쉼게 황태자 궁

으로 침입할 수 있었지만.

끼이익-

나는 주변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으며 황태자가 있을 침실의 문을

열었다.

빛 한 점 들게 두지 않겠다는

듯,꼼꼼하게 커튼을 쳐둔 방은 어

두웠다.

방 안에서 조명이란 침상 옆 탁

상 램프뿐이었는데,그마저도 연료

가 다한 것인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어두운 침실과 깜박이는 조명이

나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 내가 일

순 숨을 멈춘 데는 다른 이유가 있

었다.

오랫동안 환기를 하지 않은 건

지,등불의 기름 냄새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퀴퀴한 악취가 뒤섞여 코

를 찔렀고,안개 같은 희뿌연 연기

가 벌레처럼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

었다.

나는 멍하니 그 괴이한 풍경을

보다가 아찔해지는 정신에 서둘러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방 안을 떠도는 연기가 무엇인지

는 모르나,본능적으로 한 가지 사

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저걸 마시면 위험해질 거라는

걸.

‘도대체 황태자의 방에 이런

게……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

다.

나는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황태

자가 누워 있을 침대로 향했다.

사위가 어두워 황태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수상쩍다 못

해 비정상적으로 부푼 이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불룩하게 튀어나온 이불을

보면서 뒷걸음을 쳤다.

이불을 들춰 황태자가 정말 살아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

지만,그보다는 머릿속을 울리는

경보음이 더욱더 요란스러웠다.

그렇게 몇 걸음을 뒤로 물러났던

그 순간,손쓸 새도 없이 몸이 휙

하고 뒤로 넘어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지르

려다가 거칠게 내 입을 막아오는

단단한 손아귀에 눈을 크게 떴다.

쿵!

바닥에 그대로 부딪힌 몸이 통증

을 내질렀지만,나를 옭아매는 힘

에 소리 하나 지를 수 없었다.

나는 입과 코를 막았던 손수건이

허공에서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모

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읍 동읍1 읍1”

온몸으로 반항하려 했지만 영 소

용이 없었다.

자신의 무게를 활용해 날 제압하

고 있는 작자는 나보다 체격이 좋

은 사내인데다가 체술에 능숙했다.

제대로 정정당당하게 싸운다고

한들,어설픈 솜씨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하물며 지금처럼 완전히 제압당

한 상태에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

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저항은

의미 없는 행동이라 판단되었다.

나는 곧장 몸에서 힘을 축 늘어

뜨리며 항복 의사를 표했다.

다행히 내 의사가 받아들여졌는

지,잡힌 손에 희미하지만 힘이 풀

리는 게 느껴졌다.

“소리를 지르면 그대로 목을 꺾

어버릴 거다.”

“알았나?”

사내의 눈매가 험악해졌다.

그는 진심이었다.

나는 꽤 골치 아픈 상황에 휘말

렸다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나마 말이 통해서 다행이군.”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내가 분

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했을

텐데.”

사내가 거칠게 숨을 뱉었다.

아직 날 완전히 신뢰하진 못하겠

는지,그는 힘을 약간 풀었을 뿐

계속해서 날 제압하고 있었다.

나는 사내가 그러하듯,가만히

그를 훑어봤다.

습격당했을 때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으나,막상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나를 응시하는 사내의 얼굴에는

군데군데 황제의 흔적이 엿보였으

니까.

“말을 못 하나?”

안타깝게도 황태자는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나는 찡그린 사내의 얼

굴을 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고민 중이에요.”

“고민?”

“황태자 전하와 손을 잡는 일이

과연 저희에게 도움이 될지,안 될

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

“설마 고명한 황태자 전하께서

약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거든요.”

눈치껏 의심 가는 것을 말했는데

정답인가보다.

나는 사내의 손에 완전히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눈매를 휘었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고 한

들,소용없었다.

사내의 동공은 이미 흐릿해져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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