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기억했다
“지금은 조금 쉴 수 있게 해드려
야겠어.”
나를 갈구하는 손이 보였지만 잡
고 싶진 않았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모른 척하며
나는 방을 나섰고,펠리오는 눈치
껏 내 뒤를 쫓았다.
“받아온 임상 약이 효과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아무래도 엘프들의 도움이 큰
듯합니다. 만약 저희 측에서 모나
차르트가 강탈해간 엘프들을 되찾
아온다면-”
“허튼 생각 하지 마.”
나는 펠리오의 말을 단호히 자르
며 그를 노려봤다.
말 잘 듣는 개라 해도 결국 진짜
내 편은 아니었다.
방심하면 엄마든지 역으로 물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됐다.
“엘프들을 빼앗긴 모나차르트 대
공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만약 치료제가 저희 쪽으로 확
보되면,더는 아가씨께서 모나차르
트 대공에게 끌려다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솔직히 지금도 아가씨의
안위를 두고 모나차르트에 막대한
자금이 흘러 들어가고 있지 않습니
까.”
“티어드롭이 가진 것에 비하면
적은 돈이야. 어차피 다시 우리의
것이 될 테고.”
“돈도 돈이나, 그보다 더 걱정되
는 건 모나차르트 대공의 변심입니
다. 만약 그자가 한 빈 더 아가씨
를 납치하기라도 한다면……
“그러지 않기 위해 네가 있는 거
잖아. 설마 고작 야만인 따위를 이
기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그때는 그저 방심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상관없잖아. 네가 날
지킬 테고,아버지도 곧 깨어나실
테니까. 눈앞의 위기에 겁먹고 바
보같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배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나는 펠리오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있다.
무작정 차갑게 굴지만은 않는다.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줘가면서
마음을 흔들 뿐이었다.
“지금이야 우리가 모나차르트 대
공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야. 아버지께서
정신을 차리시면,모든 게 제자리
로 돌아갈 테니 말이야.”
“그러니 지금은 말을 아껴. 불안
정한 치료제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
서 다들 눈에 불을 켜도 달려들 테
니까. 알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모나차르트에서 진행되
는 치료제 연구가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숨죽이고 기다려야 해. 괜
히 다른 세력이 끼어들면 잘 진행
되던 연구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면 아버지는……
착한 딸을 연기하는 건 이제 익
숙했다.
나는 적당히 걱정 어린 표정과
한탄을 쏟아내며 펠리오의 입을 굳
게 닫았다.
블러쉬의 답이 오기 전까지는 치
료제를 전면에 드러낼 수 없었다.
약을 가지고 있는 건 크나큰 힘
이었지만,동시에 독이기도 했다.
모나차르트가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보일
반응은 뻔했다.
조금이라도 제 잇속을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안달한 자들이
사이좋게 치료제를 나눠가질 리 없
었다.
무엇보다 돌림병을 치료한다고
한들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돌림병은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그들을 제물
삼기 위한 도구였다.
돌림병이 별 효과가 없다는 사실
을 알아차리게 되면 듈은 다음 학
살을 준비할 것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치료제를 확
보한 돌림병이 나았다.
최악 대신,차악을 선택하는 것
일 뿐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그만큼
대처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최대한 빨리 일이 정리
되면 좋겠는데.’
각자의 영지로 돌아간 대공들은
병의 치료를 핑계로 감염자들을 모
을 것이다.
그렇게 치료를 가장한 학살이 시
작될 테고, 동시에 지옥도 또한 펼
쳐지리라.
황제는 자신이 감염되지 않을 거
라 확신하고 사람들을 모았겠지만,
병은 신분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이제 곧 늘 회의장에 있던 이들
중 셋이 돌림병으로 쓰러질 터였
고, 황제는 다행히 전염을 빗겨나
가지만 끝내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
인다.
샤리에트를 광증 환자로 몰았지
만,사실 내가 본 미래에서 광증을
앓게 되는 건 황제였다.
최악의 미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다시금 시간이 되돌아간다
면,그때도 나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건 고작 한 번의
생이었다.
그 정도로 확률을 운운하기에는
어려웠고 그만큼 속이 답답했다.
만약 내 예상대로 듈이 시간을
반복적으로 되돌리는 거라면,이번
에 실패해도 다시 싸울 기회는 주
어진다.
하지만,만에 하나 내가 다음 생
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걸로 끝이
었다.
모두가 쳇바퀴를 돌리는 쥐처럼
끔찍한 지옥을 반복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고심에 빠져있는데,닫혀
있던 문이 별안간 열렸다.
나는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
샤리에트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
웃거렸다.
“무슨 일이죠?”
“그게 좀,묻고 싶은 게 있어서.”
샤리에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크
게 심호흡을 했다.
말끝을 흐리며,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 그녀는
평소답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펠리오에
게 자리를 비켜달라 명령했다.
샤리에트는 펠리오가 멀어지는
걸 확인하자마자,재빨리 복도로
나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런 건 아닌데……
“미안하지만,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서요.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면,다음에 해요.”
“그 사람이 투옥되었다고 들었
어.”
그 사람. 샤리에트는 직접 실명
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그녀가 누굴 말하는지 알고 있었
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벗어나기로 했던 게 아니었나
요?”
“벗어날 거야. 하지만 소식 정도
는 물어볼 수 있는 거잖아.”
“월 해달라는 건 아니야. 그저,
무사한지만 알고 싶어서……
샤리에트는 차마 나를 보지 못하
겠는지 고개를 획 돌렸다.
나는 입술을 짓이기고 있는 그녀
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하필 나와 닮은 얼굴로 그런 표
정을 짓는 건 반칙이었다.
“무사해요. 물론 살아도 있고요.”
“정말?”
“미리 말해두지만 다른 마음이
있는 거 아냐! 그냥……
“삼촌이 그렇게 좋아요?”
나는 샤리에트를 가만히 응시했
다.
“안 좋아해. 하지만……
“어쨌든 내 반쪽은 그자가 물려
준 거잖아- 그것뿐이야.”
샤리에트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게 지지 않기 위해 고집스럽게
목소리를 높이고,눈에 바짝 힘을
주던 그녀는 제 친부와 관련된 사
안에는 한없이 약해졌다.
그 사실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삼촌은 거세당해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네 친부는 삼촌이 아닌 다른 사
람이라고.
“너무 마음 쓰지 마요.”
“ 어?,’
“핏줄이라는 건,의외로 대단하
지 않거든요. 버리긴 어려워도 마
음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면 내가
이런 것에 왜 집착했나 싶을 정도
로 금세 아무렇지 않아질 거예요.”
결국 나는 입을 닫는 것을 선택
했다.
괜한 말로 샤리에트가 혼들고 싶
지 않았다.
동맹을 맺었다고 한들,우리 사
이는 정해져 있었다.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 속에서 감
정 하나만으로 일을 그르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당분간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있어요. 조만간 영애가 할 일이 생
길 테니,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해
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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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뀐 건 아니죠?”
일부러 샤리에트를 도발하기 위
해 나는 그녀를 짐짓 비웃었다.
다행히 샤리에트는 내 비아냥에
발끈할 뿐,내가 비밀을 감췄다고
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너야말로 마음 바꾸지 말고 제
대로 해.”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어설프게 착하게 굴기에는 내게
도 이제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생
겨버렸거든요.
나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목구
멍으로 감추며 샤리에트의 가는 목
을 응시했다.
모두를 지킬 수 없었다면,지켜
야 하는 것과 버려도 되는 것을 명
확하게 나눌 수밖에.
“그래서 말인데,오늘부터 언니
라고 불러도 되죠?”
“……뭐?”
“뭘 그렇게 놀라요.”
“그야, 네가 징그러운 소리를 하
니까……
“징그럽긴요. 아버지가 깨어나시
면,사이 좋은 자매 융내를 내어야
할 텐데 미리 연습해둬도 나쁘지
않잖아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겼다.
물론 이제 와서 새롭게 관계를
쌓을 마음은 없었다.
눈앞의 샤리에트는 예전과 달랐
고,때론 귀엽게 보일 때도 있었지
만 그뿐이었다.
샤리에트가 과거와 달리 얌전해
진 건,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일 뿐 그녀의 천성은 그대로였
다.
샤리에트 또한 펠리오와 크게 다
를 바 없었다.
그녀는 진짜 내 편이 아니었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나를 물 준
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다신 내가 그녀에게 당하는
미래는 없을 테지만.
샤리에트가,나를 물고자 하기 전
에 내가 먼저 그녀를 찢어 발겨버
릴 테니까.
나는 여전히 내가 겪었던 끔찍한
순간들을 기억했다.
나를 비웃던 샤리에트를 그저 을
려다볼 수밖에 없던 지난날이 얼마
나 비참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