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정체
“다들 모인 것 같으니,슬슬 회
의를 시작해도 되겠지.”
황제는 거만하게 턱을 추켜세우
며 자리에서 일어났고,옆에 서 있
던 공작들도 자세를 바로 했다.
사태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들
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고,특
유의 오만한 품위 또한 잃지 않았
다.
“얼른 가지. 먼저 와있는 손님들
도 있거든.”
“사대공이 모두 오셨다는 이야기
는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순간 날카롭게 변하는 황제의
눈빛에 투르잔 소공작은 서둘러 말
끝을 흐렸다.
쓰러진 노령의 아버지 대신,갑
자기 가문을 떠안게 된 젊은 소공
작은 아직 해선 안 되는 말을 구분
하지 못했다.
“황실은 아무런 문제가 없네.”
“물론입니다.”
투르잔 소공작이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투르잔 소공작이 황태자
의 병을 언급하려 했다는 걸 알아
차린 황제의 심기는 이미 상한 후
였고,그 모습을 바라보는 바란 공
작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번졌
다.
우스운 광경이었으나,이게 현실
이었다.
모두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조차
함부로 내뱉어선 안 됐다.
하루가 다르게 확진자가 느는데
도 귀족 중 환자가 나왔다는 소식
이 드문 것처럼.
그건 귀족들이 특별해서가 아니
었다.
그저 다들 쉬쉬하며 감추기 때문
이었다.
황태자가 병에 걸렸음에도 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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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
77次,
지 않은 것처럼 연극하며 행동하는
지금처럼 말이다.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네. 대공
들 앞에서 떠들었으면 정말로 큰일
이었을 텐데.’
나는 어깨가 축 처진 투르잔 소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동맹할 만한 수준이 될지 기대했
건만,아쉽게도 그는 탈락이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적어도 지금은 너무 어리고 미숙했
다.
‘그렇다면,다음 후보는•…“
나는 바란 공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공작은 투르잔
소공작의 친부와 비슷한 나이대임
에도 여전히 정정했다.
얼핏 봐도 몇 년은 더 거뜬하게
공작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쪽도 결국 만족스러운
후보는 되지 못했다.
햇병아리를 보는 듯한 시선도 시
선이지만,무엇보다 바란 공작은
티어드롭을 증오했다.
그는 지금껏 티어드롭과의 권력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
다.
아쉽기는 하나,바란 공작과는
동맹보다는 그에게 공격당하지 않
게끔 견제하는 게 먼저일 듯했다.
'이렇게 되면,결국 대공들밖에
없으려나.’
이미 대공들은 편이 분명하게 나
뉘어 있으니, 공작들 쪽을 살펴본
건데 할 수 없었다.
아군 삼아 동맹을 맺는 건 포기
하고 필요에 따라 적당히 저들을
이용해가면서 이득을 차지하는 게
가장 영리할 듯했다.
어차피 회의장에는 내 편이 먼저
와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회의장 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내게 익숙한 얼굴부터
찾았다.
따지고 보면, 떨어져 있던 시간
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보는 눈이 많아 평소처럼
알은체를 하며 다가갈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가장 앞에 서, 시야를 가리고 있
는 황제가 장애물처럼 느껴지는 건
덤이고 말이다.
“올해는 처음 보는 이들도 있을
테니,먼저 소개부터 해야겠군. 자
아,다들 인사부터 하게. 이쪽은 티
어드롭 공작 영애라네.”
내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건지,황
제가 슬쩍 옆으로 비켰다.
제국의 예범상 인사는 윗사람에
게 먼저 아랫사람을 소개하고,이
후 통성명을 하기에 가장 지위가
낮은 나부터 먼저 인사를 하는 게
옳았다.
나는 황제의 손짓에 맞춰 허리를
살짝 굽힌 후,사대공에게 인사하
고자 입을 열었다,아니. 그러고자
했다.
날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
내만 없더라면.
“티어드롭 공작 영애.”
“아,죄송합니다. 이야기로만 듣
던 분들을 실물로 된 건 처음이라
제가 긴장했나 봅니다. 심포니아
블랑 티어드롭. 티어드롭 공작의
여식입니다.”
황제의 재촉에 겨우 인사를 끝마
쳤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다음으로 인사할 투르잔 소
공작을 위해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
면서도 한 곳에 시선을 떼지 못했
다.
잘못 본 것이길 간절히 빌었는데
소용없었다.
듈은 여전히 긴 탁자 앞에 앉아
날 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저자가 여기 있는
거지?’
둘은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였지
만,나는 전혀 아니었다.
만약 보는 눈만 없었더라면 당장
이라도 그에게 다가가 따졌을 것이
었다.
“을해는 젊은 피가 더 많군요.
하기야,슬슬 세대교체가 이뤄질
때이기도 하죠.”
듈이 나와 투르잔 소공작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고,나와 소공작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황제와 바
란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이 자리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
지지 않은 건 두 사람뿐이었다.
"오르젠타 대공 전하의 농은 여
전하십니다.”
M ,,
바란 공작의 말에 순간 혀를 씹
을 뻔했다.
나는 누가 봐도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노공작을 멍하니 보다
가 고장 난 기계처럼 뻣뻣한 음직
임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를 싸하게 가라앉혔음에도
둘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콧노래
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괴리감이 컸고,그
만큼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정말로 저자가 오르젠타 대공이
라고?’
절로 얼굴이 찌푸려질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내가 익히 들어오던 오르젠타 대
공은 저렇게 가볍지 않았다.
탁월한 정치 수완에 원하는 것은
뭐든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드
는 노련한 대공일 뿐이었다.
‘어쩌면,대역일지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어봤
지만,이 자리의 누구도 듈이 오르
젠타 대공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설령 듈이 대역이었다 해도 오랫
동안 오르젠타 대공으로서 살았다
는 의미였다.
그 사실에 온몸에 소름이 확 돋
았다.
그 순간,내 머릿속에서는 여러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그는 언제부터 오르젠타
대공이었던 건지. 그리고 그가 오
르젠타 대공의 자리를 앗았다면 진
짜 오르젠타 대공은 어디로 간 것
인지.
“다들 빈 자리에 가서 앉게나.
바로 회의를 시작할 테니.”
사람들의 인사가 오가는 내내,
넋을 놓고 있다가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에 나는 가까스로 상념에서
깨어났다.
나는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
고자 표정을 갈무리하며 빈자리에
앉기 위해 걸음을 됐다.
그때 였다.
“티어드롭 공작 영애는 이쪽에
앉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듈이 자신의 옆자리,펠라시온
대공이 앉아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날 향해 씨익 웃었다.
“……저 말씀이신가요?”
“네,티어드롭 공작 영애께 말씀
드린 겁니다.”
듈의 돌발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나는 듈과 내 사이를 번갈아 오
가는 시선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
다.
당연히 거절할 셈이었으나,거절
한다고 해도 날 보는 시선이 지금
과 달라지진 않을 것이었다.
다들 나와 오르젠타 공작이 어떤
관계일지 궁금해하며 머릿속 주판
을 두드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배려는 감사하나, 저는-”
“아니면,저쪽이 좋으려나요.”
둘이 눈매를 휘었다.
그가 검지로 가리킨 방향에는 무
표정한 얼굴의 블러쉬가 앉아있었
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에게나 그
렇게 보일 뿐,나는 이제 얼굴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
세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블러쉬의 차갑게 식은 두 눈은
듈에게 조용히 경고하고 있었다.
내가 뭔하면 언제든 이 자리를
박찰 준비가 된 자의 눈이었다.
그걸 알기에 더욱 애가 탔다.
“제가 더 잘생기긴 했으나,가끔
취향이 독특한 분들도 있어서 말이
죠.”
취향이 독특하긴. 누가 봐도 내
남편이 이곳에서 가장 잘생겼건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잘도 늘어
놓는 듈을 향해 속으로 욕을 하며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할 수만 있다면 뺨이라도 한 대
날려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몸을 사
릴 때였다.
“말씀은 감사하나,제 자리는 정
해져 있어서요.”
“자리에 이름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름이 쓰여 있진 않아도 눈치라
는 게 있다.
정식 티어드롭 공작도 아니고,
위치도 애매한 내가 상석에 앉아봤
자 받을 수 있는 건 눈총뿐인데 좋
다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멍청
한 짓이었다.
가뜩이나 주인도 있는 자리라면
더욱더.
나는 누구보다 열렬한 시선으로
날 응시하고 있는 펠라시온 대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헛소리를 하는 건 듈인데,불똥
은 왜 내게 튀는 건지.
나는 듈을 향한 욕지거리를 되새
김질하듯 속으로 꼭꼭 씹있다.
억울했지만 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만만한 건 나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