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125화. 오래된 술
* * *
“아가씨!”
미샤가 달려와 푹 내 품에 안겼다.
나는 그녀를 안으며 프로스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힘들지 않았어?”
“힘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프로스트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미샤가 있었다.
굳이 말은 안 했지만, 오는 내내 미샤에게 퍽 시달린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도움을 청하셨는데 당연히 와봐야죠!”
프로스트 대신, 내 질문에 답한 미샤가 더욱 팔에 힘을 줬다.
미샤의 반짝이는 두 눈은 열렬하게 내 관심을 바라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뭐 이상한 점은 없으셨죠?”
“그게, 일단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슬쩍 손목을 내보였다.
미샤는 어설프게 도로 엮은 팔찌가 원수라도 되는 양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 쉬었다.
“이 정도로는 괜찮아요.”
“……괜찮다고?”
나는 눈을 찡그렸다.
미샤의 단언과 달리, 여전히 내 눈에는 환영이 보이고 있었다.
“새로 만들어오기도 했고요.”
미샤는 보란 듯 품에서 팔찌 한 뭉텅이를 꺼냈다.
나는 헌 팔찌를 빼고 새로운 팔찌를 끼워주는 미샤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을 삼켰다.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서신으로 알렸다시피 샤리에트를 광증환자로 만들었어. 기억하지?”
“네. 그래서 저희를 부르신 거잖아요.”
“실제로 샤리에트는 병을 앓고 있지 않으니 치료할 건 없을 거야. 미리 정리해두었으니 그녀도 협조적일 테고.”
“그럼에도 절 부르신 데에는 이유가 있으실 거잖아요.”
“공식적으로 티어드롭 저택 안으로 들어올 방도는 그리 많지 않으니, 기회가 있으면 써먹어야지. 무엇보다 마침 손이 부족한 참이기도 하고.”
블러쉬가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 해도 한 사람으로는 움직이는 데에 제약이 많았다.
조력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내가 예정보다 미리 만남을 잡은 건 몇 가지 유의사항을 알려주기 위해서야.”
티어드롭에 엘프가 도착하기로 한 건 내일이었으나, 나는 예정보다 하루 더 일찍 그들을 불러들였다.
서신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직접 보고 서로 말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어떤 유의사항이요?”
“일단 티어드롭 공작을 적대시해.”
“그래도 되나요?”
미샤가 두 손을 모은 채 뺨을 붉혔다.
벌써부터 잔뜩 신이 난 표정이었다.
“공격이나 모욕적인 행위를 하라는 건 아니야. 그저 되도록 티어드롭 사람들과 엮이지 않게끔 해. 대답을 무시한다거나, 함께 있을 상황을 피한다거나 이런 식으로 말이지.”
“그런 식이라면, 티어드롭 공작의 자존심을 꽤나 건드리겠는걸요. 저희에 대한 반감도 커질 수 있고요.”
“괜찮아. 샤리에트의 병이 고쳐지지 않는 한, 너희들은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게 대접받을 테니까.”
엘프들의 도움이 절실해진 상황에서 예전의 기습은 불가능했다.
샤리에트가 완치되기 전까지 아버지는 엘프들을 지키면 지켰지, 결코 해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둘 다 사람을 상대하는 게 어렵지 않아?”
“음, 저는…….”
“…….”
슬쩍 곁눈질하자, 프로스트와 미샤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시선을 피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미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기에 재능이 있다면 모를까, 사람을 상대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둘을 고려하면 차라리 침묵이 더 그럴싸해 보일 것이었다.
겸사겸사 아버지를 자극시킬 수도 있고.
엘프들의 경계 어린 태도가 있는 한, 아버지는 끊임없이 플렌의 일을 상기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마음껏 무시하고 괄시해도 좋아. 그다음은 내가 맡아서 처리할 테니까.”
“비 전하를 통해서만 이야기가 오갈 수 있게 말입니까?”
“맞아. 정답이야. 어때. 할 수 있지?”
“아가씨의 부탁이라면 뭐든요.”
“전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단 두 명뿐이지만, 누구보다 든든하다.
나는 프로스트와 미샤를 보며 쭉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티어드롭 공작이라고 합니다.”
“…….”
“…….”
아버지의 인사에도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슬쩍 앞으로 나섰다.
“죄송해요. 다들 낯을 가려서요.”
“엘프들이 경계가 심하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요정과 인간이 교류한 지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하지만 저는 티어드롭입니다. 경계 같은 건-”
“티어드롭이 요정의 친구라는 건 다 옛말이니까요.”
“옛말이라뇨.”
“예전의 연을 봐서 나름대로 교류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형식적이잖아요. 오래전의 깊은 교류는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은 정해진 장소에 물건을 놓고 주고받는 게 전부죠.”
프로스트 뒤에 숨은 채로 미샤가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여과 없이 아버지를 향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멋쩍게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중간에서 말을 전할게요.”
“그래 주면 고맙겠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히 제게는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주고 있으니까요.”
내 시선이 미샤에게 닿자, 그녀의 표정이 기다렸다는 듯 누그러졌다.
미리 짜놓기 망정이지, 연기를 시켰으면 티가 났을 것이었다.
“샤리에트의 상태는 어떤가요?”
“그렇게 좋진 않아요.”
“이런.”
아버지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나는 위로하듯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치료는 가능하겠죠?”
“네.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 말씀은 치료가 가능하다는 거군요.”
“대신, 시일이 꽤 걸릴 거예요.”
“어느 정도요?”
나는 미샤의 키에 맞춰 몸을 낮추고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미샤와 프로스트, 두 사람 모두 연기에 능숙하지 않으니 중간에서 움직이는 내 역할이 중요했다.
“실제로 치료해봐야 알겠지만, 빠르면 한두 달. 심하면 일 년도 더 걸리겠죠.”
“기간이 많이 차이나는군요.”
“마음의 병이라는 게 원래 명확한 답이 없어서요.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변수들이 많죠.”
미샤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그녀의 대사는 전부 내가 미리 일러준 것들이었다.
“그래도 치료가 가능하다니 다행이네요.”
내가 조심스럽게 동조하자 미샤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저희의 의술은 가히 최고라 해도 손색이 없으니까요.”
“그러면 바로 치료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필요한 약재와 도구들이 갖춰진다는 전제하에서요.”
“가능할까요?”
나는 아버지를 돌아봤고, 아버지는 곧장 고개를 끄덕거렸다.
“필요한 건 뭐든 편히 말씀하시라고 하렴. 전부 문제없이 준비해놓을 테니.”
“그렇다고 하시는데, 어떠신가요?”
“그렇게 되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치료에 들어갈 수 있겠죠.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이죠?”
“제 처방에 토를 달지 않는다는 조건이죠.”
미샤가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처방이라면?”
“종종 어쭙잖은 지식을 들이대면서 이건 써선 안 되는 약재, 들어본 적 없는 처방이다, 이러면서 치료를 방해하는 자들이 종종 있어서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물론 그래야 할 거예요. 제가 티어드롭 공작 영애를 치료하는 건 호의지, 제가 티어드롭의 종인 건 아니거든요.”
“물론 그 부분은 잘 알고 있죠.”
“심포니아는 저와 함께 지내봤으니 잘 알고 있겠지만, 다른 이는 아닐 수도 있잖아요?”
미샤가 싸늘하게 아버지를 노려봤다.
나는 몸으로 그녀의 시선을 가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아무리 오래된 연이라고 해도 티어드롭은 요정의 친구라는 걸.”
요정의 친구.
말도 안 되는 말에 절로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며 미샤의 손을 잡았다.
미샤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슬쩍 상체를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은 내 등 뒤에 선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미샤가 경고하듯 아버지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친구와 술은 오래 두면 둘수록 좋다고 하지만, 그건 두고 봐야 하는 일이죠. 술도 그냥 오래 두었다고 좋은 게 아니거든요.”
“…….”
“아무리 좋은 재료로 골라 술을 빚었다고 한들, 제대로 관리해서 숙성시키지 않으면 먹지도 못하니 말이에요.”
“…….”
“이번 기회에 확인해보죠. 티어드롭이 잘 숙성되었는지, 아니면 과거의 영광은 옛말로 돌아가 입에 대지도 못할 정도로 썩었는지요.”
미샤는 웃었고 아버지도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아버지의 한껏 당겨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