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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123화 (123/204)

| 123화

123화. 이상현상

저자는 멀쩡한데, 왜 나만 이런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본능적으로 티를 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그 팔찌가 문제인가?”

“더 이상 무례를 범하면-”

“악당에게 그런 소리를 해봤자, 썩 와닿지 않아서.”

성큼 다가온 사내가 그대로 내 손목을 잡아챘다.

거친 손짓에 절로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참아냈다.

기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놔주시죠.”

“이 와중에도 표정 하나 안 바뀌네.”

“놓으라고 했습니다.”

“팔찌의 문양을 보아하니 라타 숲의 일족 솜씨인데?”

“…….”

“나탼이라고 알아? 나랑 아는 사이거든. 그 녀석도 이런 걸 잘 만들었는데, 혹시 그 녀석 솜씨인가?”

사내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팔찌 줄을 보란 듯 당기는 손짓은 험하기 짝이 없었다.

손 안에 나비를 쥔 아이처럼 한껏 들뜬 얼굴을 보며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쉽게 끊어버릴 수 있는데도 굳이 그러지 않고 내 반응을 살피는 걸 보니 성격 한번 더럽구나 싶었다.

“걱정하지 마. 이것만 확인하고 다음부터는 안 건드릴 테니까.”

“…….”

“아, 그리고 우리 편에도 넣어줄게. 어때? 그러니까 화 풀어.”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 거라면, 차라리 친절한 척 굴지 말든지.

선량한 척 웃는 낯으로 일관하는 사내에 헛웃음만 나왔다.

“왜 웃지?”

“그쪽이 웃으니까요.”

“흐음, 좋아. 그런 태도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면, 그 손부터 떼지 그래요?”

“떼면?”

듈이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렸다.

나는 팽팽하게 늘어난 팔찌 줄을 응시했다.

부탁대로라면 벗어선 안 되는 거지만 저 열렬한 눈빛을 보아하니 쉽게 넘어가진 못할 듯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잠시라도 팔찌를 빼는 편이 나았다.

“얌전히 벗어드리죠. 기껏 받은 선물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러면-”

“내 취향은 아니지만.”

투두둑-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듈이 팔찌를 움켜쥐며 사납게 뜯어냈다.

허망하리만큼 쉽게 끊어진 팔찌에 어처구니가 없어 절로 조소가 튀어나왔다.

“딱히 기대는 안 했는데, 역시 별 효과는 없는 것 같네. 하기야 이딴 장난감으로 가릴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

“…….”

“뭐, 덕분에 향기가 진해져서 좋긴 하다. 이런 향은 쉽게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듈이 개처럼 킁킁거리며 내 주위를 돌았다.

나는 듈의 발에 무참히 짓밟히는 팔찌에서 애써 시선을 떼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제 다 확인했으니 된 거죠?”

“뭐, 일단은.”

“손을 잡는 건은요?”

“티어드롭에 머무는 개를 통해 얼마든지 연락해.”

기다리고 있을게.

듈이 몸을 낮추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기이하게도 뺨을 스치는 사내의 숨은 차가웠다.

* * *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나는 책 끝을 접은 후, 다음 책장을 넘겼다.

독서에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자꾸만 열어놓은 창문으로 시선이 갔다.

그렇게 몇 번 고개를 들었다가 숙이기를 반복했을까.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나는 불현듯 나타난 사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무사히 뒤를 밟았고, 소재지 파악도 끝났습니다.”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넘어 들어온 블러쉬가 옅게 웃었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얼핏 보긴 해도 딱히 다친 구석은 없는 듯했다.

“손목이 부으셨군요.”

상태를 확인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블러쉬가 내 손을 가리켰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약간 부은 것뿐이에요. 아시다시피 피부가 약한 편이라서요.”

“…….”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건 그 정도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 그자의 뒤를 쫓는 편이 효과적이라 생각했을 뿐이고요.”

“물론 그러시겠죠.”

블러쉬가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아닌 척해도 그의 심기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위험하다 싶으면 신호를 주기로 했음에도 내가 끝까지 버텼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당신, 아니 블러쉬가 옆에 있어 줘서 당당하게 굴 수 있었던 거예요.”

“…….”

“대공께서 잠입에 능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

“이대로 평생 저랑 말 안 할 거예요?”

두 손을 모은 채 간절히 눈을 빛내자, 결국 블러쉬는 한숨을 뱉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옆에 붙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추적은 성공했습니다만,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이상한 점이요?”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고 살다 보면, 예민해지죠. 사람의 숨소리나, 심장박동, 이런 사소한 것조차 기척으로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그 사내는 심할 정도로 고요했습니다.”

“고요하다는 건…….”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인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자는 인간보다 엘프들과 더 흡사했거든요.”

“당신도 저와 같은 생각인가 보네요.”

나는 책 끝을 접어둔 페이지를 펼쳤다.

내가 보고 있었던 책은 선대 티어드롭들이 만난 요정에 대해 기록한 것이었다.

“듀라한?”

“정확한 건 아니고, 일단 후보로 의심되는 요정 위주로 꼽아보고 있어요. 엘프는 요정의 일부일 뿐, 깊게 들어가면 더 많은 종이 있거든요. 듀라한도 그중 하나고요.”

“그자가 요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애당초 그자는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던걸요.”

나는 제멋대로 굴던 사내를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알아도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겠죠.”

“맞아요. 솔직히 그자는 계속 장난하는 것처럼만 보였거든요. 제대로 상대해주는 느낌은 아니었죠.”

나는 순순히 고개를 까닥거렸다.

“여기 있는 설명만 봐선 장난이 어울리는 요정처럼은 안 보이지만 말입니다.”

블러쉬가 내가 들고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말을 탄 채 중갑을 입은 기사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밑으로는 세세한 설명이 달려있었다.

“아무래도 듀라한은 죽음을 예고하는 요정이니까요.”

“죽음이라…….”

“일단 모나차르트에 연락을 해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요정에 관해선 저희보다 전문가일 테니까요. 그리고 이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요.”

나는 처참히 끊어진 팔찌를 품에서 꺼냈다.

블러쉬는 눈살을 찌푸려졌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네. 딱히 문제 되는 건 없어요.”

나는 보란 듯 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미샤의 당부와 달리, 팔찌를 빼도 딱히 내 몸에는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는 느릿하게 숨을 참았다가 도로 뱉었다.

“요정과 사람은 다르게 느껴진다고 했죠?”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죠.”

“……그럼 저는요?”

“…….”

“저는 어떻게 보여요?”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솔직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블러쉬의 말대로 요정과 인간은 다른 존재니까.

하지만 듈과의 만남 이후 한 번 떠오른 의문은 틈만 나면 나를 초조케 했다.

“그자가 말하길 제가 자신의 동지일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요?”

“엘프들이 절 특별히 챙겨주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는 과거의 기억이 없잖아요. 혹시라도 제가-”

“요정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붉은 눈이 빤히 날 응시했다.

나는 겨우 꽉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온기가 담긴 양 다정한 눈빛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아나, 그럴 리 없습니다.”

블러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없다고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요정과 사람은 다르다고요.”

블러쉬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강조했다.

“심포니아가 엘프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을 때도 저는 한눈에 그자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고요.”

“…….”

“그런 제가 판단한 심포니아는 분명 사람이었습니다.”

“……정말인가요?”

“제겐 거짓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블러쉬가 이번에도 힘있게 대답했다.

그는 분명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아까의 찌릿했던 감각이 잊지 않았을뿐더러, 그 후 자꾸만 환영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단지 일시적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계속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불현듯 예고도 없이 희뿌연 물체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듈과 닿았던 손이 화상 입은 양 따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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