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22화 (122/204)

| 122화

122화. 악당 앞에서 방심하면

* * *

“안녕, 잘 찾아왔네?”

“찾아오게끔 만들어놓은 거 아닌가요?”

“글쎄.”

“…….”

살짝 고개를 젖힌 채, 사내가 느긋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무례하리만큼 빤히 올려다보는 내 시선이 불쾌할 만도 한데 그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되레 즐기는 모양새였다.

“무슨 짓을 한 거죠?”

“무슨 짓이라니?”

뺨에 검지를 댄 채, 사내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살짝 끝이 올라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가 엿보였다.

나는 사내의 야살스러운 미소를 뒤로 하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들 저희 쪽에 지나치리만큼 관심이 없잖아요.”

순금을 녹여 그대로 부어놓은 양, 진한 금발을 가진 사내는 보기 드문 미남자였다.

이런 사내와 현재 사교계를 가장 뜨겁게 달군 소문의 주인공인 내가 단둘이 있는 상황만큼 짜릿한 가십도 없을 텐데, 다들 너무 조용했다.

마치 이곳에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이.

“모른 척하지 마. 같은 선수끼리.”

“…….”

“뭐야. 정말 모르는 거야?”

불현듯 다가온 사내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까지 겁먹을 필요는 없는데.”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사내가 키득거렸고 나는 반대로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에게서는 저번 파티장의 실랑처럼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하기야 처음부터 신기하긴 했어. 보통 이런 상태에선 향기가 남아있을 수 없는데 말이지.”

“…….”

“아니면, 이거 때문인가.”

제멋대로 뻗어진 손에 나는 팔을 뒤로 감췄다.

“함부로 손대지 말았으면 좋겠는데요.”

“알았어. 안 할게. 그러니 일단 표정부터 펴.”

“…….”

“왜? 못 믿겠어?”

사내가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장난스레 눈매를 휘었다.

반달처럼 예쁘게 접힌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진한 녹색이었다.

나는 팔찌를 다른 손으로 감싸 쥐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사내의 눈동자 색은 내가 아는 이들이 가진 것과 같았다.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직접 듣고 싶어서 그러지. 그 예쁜 입으로 말이야.”

“…….”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약속은 지키니까. 손은 정말 안 댈 거야.”

적어도 지금은.

사내는 뒷말을 능글맞게 덧붙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여전히 그는 내가 신기한 동물이라도 되는 양 눈동자를 굴리며 구경하듯 훑어보았다.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전에 이름부터.”

“…….”

“계속 볼 사이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

나는 사내를 흘겨봤지만, 그는 내 입으로 직접 이름을 듣기 전에는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백기를 들게 되는 건 내 쪽이었다.

“심포니아 블랑 티어드롭.”

“그게 진짜 이름?”

“이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나요?”

“그거야 모르지. 가짜 신분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잖아."

“당신은 그런가 보죠?”

일부러 거만해 보이는 말투로 물었지만 이번에도 사내는 딱히 개의치 않아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웬만한 언행은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아니. 솔직히 넘어간다기보다는 내가 색다른 반응을 보이길 기대하고 있는 쪽에 가까워 보였지만.

“듈이라고 불러도 좋아. 내 친구들은 날 그렇게 부르거든.”

“…….”

“우리가 언제부터 친분이 있었냐는 눈이네.”

“첫 만남부터 이런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너무 까탈스럽게 굴지 마. 어차피 앞으로 계속 볼 사이인데,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

듈은 넉살 좋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제게 손 안 댄다고 하지 않았나요?”

“기다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악수는 이야기를 듣고 할지 말지 정하는 걸로 할게요.”

나는 팔짱을 끼며 듈과 거리를 벌렸다.

선뜻 손을 맡기기에는 찜찜했던 저번 일이 생각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능글맞게 잘도 화제를 바꾸는 걸 봐서는 이대로라면 대화가 끝나지 않을 터였으므로 더는 휘둘려서는 안 되었다.

“겁나?”

“제가 겁낼 게 있나요?”

“저번 같은 일이 있을까 봐 그런 거잖아.”

“…….”

“정작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으면서 말이지.”

웃는 낯으로 일관하고 있어도 눈치가 없지는 않나 보다.

나는 듈을 보며 짧게 심호흡을 했다.

사람의 표정을 읽는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도 눈앞의 사내는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경계 안 해도 돼. 네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맞는다면 난 네 적이 아닐 테니까.”

“그게 뭔데요?”

“너와 내가 같은 부류라는 거겠지.”

약속을 지킬 셈인지, 정작 사내는 내게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빛을 등진 채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 사내의 얼굴은 그늘져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우리 측과 손잡고 싶다고 했지? 네가 그 가짜의 역할을 대신해주겠다고.”

“그 이상도 해줄 수 있어요. 물론 당신 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부터 해봐야겠지만요.”

“확인이 필요하다면 시켜줄 순 있지만, 그러기엔 그만큼 성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원한다면 얼마든지요.”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고, 듈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면 우리로선 거절할 의사는 없어. 원래 제 역할을 못 하면 바꾸는 게 맞는 거잖아. 하지만…….”

별안간 가까워진 거리에 시선이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상대를 똑바로 노려봤다.

“너무 아깝거든. 잘만하면, 좀 더 재미있고 다양한 일에 쓰일 수도 있을 것 같고.”

“…….”

“그래서 말인데 손은 잡되, 그 여자 대용으로 일하는 거 말고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때?”

“다른 역할이요?”

“그런 역할을 하기에는 네가 너무 아까워서 그래. 어쩌면, 몇 안 되는 내 동지일 수도 있잖아.”

날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피부는 닿지 않았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내 이마를 간지럽혔다.

“싫어요.”

“왜? 복수 때문에?”

“삼촌에게 어디까지 들었나요?”

“다 들었지. 네 연인의 죽음부터 그로 인해 네가 티어드롭에게 복수하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 전부. 하지만 복수가 전부는 아니잖아.”

“제겐 전부예요.”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좋은 일이나, 그만큼 위험도 수반된다.

아직 저쪽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끝나지 않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게 전부라면, 복수가 끝난 후에는 죽을 건가?”

“거기까진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닐 텐데요.”

“네가 내 동지라면 그럴 수야 없지.”

“동지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가요?”

“말했잖아. 세상에 몇 안 된다고.”

“……그래서, 그 동지라는 게 정확히 뭔데요?”

“내 제안을 받아주면 알려줄게. 어때? 궁금하지?”

듈이 화사하게 웃으며 몸을 낮췄다.

그 와중에 그는 낚시하는 양 내 앞에서 손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어디 궁금하면 자신을 잡아보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라서요.”

“너무한걸.”

“제게 중요한 건 쓸데없는 호기심이 아니라, 복수니까요.”

“그래?”

“네.”

나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궁금해도 지금은 캐볼 시기가 좋지 않았다.

캐도 나중에 확인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별안간 듈이 내 손을 잡아 제게로 당겼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악당 앞에서 방심하면 안 된다는 걸 알려주는 거지.”

단번에 가로채져 잡힌 손에 이를 꽉 물었다.

손을 빼려 이리저리 비틀어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상하네. 왜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지?”

“…….”

“너도 아무런 느낌 없지?”

튤은 소꿉놀이라도 하는 양 내 손을 잡은 채로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저번과 다르게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착각이었나? 그게 아니라면…….”

“확인 다 했으면 그만 놔줘요.”

“아, 미안.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 튕기니까 마음이 급해져서 말이야.”

“…….”

“사과했으니까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진 마. 나도 아쉽단 말이야.”

말로는 용서를 빌었지만, 표정은 전혀 미안한 구석이 없다.

나는 아쉬움이 가득한 듈을 흘겨보며 그에게 잡혔던 손을 매만졌다.

아닌 척했지만, 실은 잡히는 순간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내의 손은 지나치리만큼 차가웠다.

‘그리고…….’

나는 눈치껏 조심스럽게 주먹을 오므렸다.

사내와 닿았던 부분이 데인 양 욱신거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