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120화 (120/204)

| 120화

120화. 이상한 불청객

* * *

“공작 각하께 이런 따님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내보이기 부족해서 그렇죠.”

“영애께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시면 여기 있는 다른 이들은 어쩌라고요. 겸손이 과하면 그것도 좋지 않은 겁니다.”

“영식께서는 말씀을 참 재밌게 하시네요.”

티어드롭의 덕을 보고자 하는 이들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새로운 공작 영애를 향한 호기심은 무엇이든 간에 나쁠 게 없으니까.

나는 부채를 팔랑거리며 눈매를 휘었다.

원래 이곳은 샤리에트가 초대받은 파티였지만, 정작 그녀는 여기 없었다.

샤리에트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나타난 새로운 티어드롭 공작 영애만이 있을 뿐이었다.

“다음번에는 저희 가문의 파티에 오시죠. 티어드롭 공작 영애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말입니다.”

“그보다는 저희 가문의 파티에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큰 영애와 함께 오시면 더 좋고 말입니다.”

티어드롭 공작이 먼 친척을 딸로 입적한 정도로 알려두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날 향한 관심은 지대했다.

귀족이 순수한 의도로 자식을 입적하는 경우는 드무니, 다들 티어드롭 공작이 다른 주머니를 찰 생각을 하고 있다 여기는 듯 보였다.

무엇보다 나는 지나칠 만큼 아버지를 닮았으니까.

호사가들 사이에선 사생아 소리가 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사생아를 먼 친척이라 속이고 입적하는 일은 귀족들 사이에서 드물지 않았다.

“심포니아.”

“아버지.”

다가온 아버지에 내 주위에 있던 이들이 급히 예를 갖췄다.

나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아버지의 팔짱을 꼈다.

“파티는 즐겁니?”

“덕분에요. 다음에는 샤리에트 언니와 함께 와야겠어요.”

“두 아가씨를 에스코트할 기회가 오면 기쁘겠구나.”

“저희를 감당하지 못하시고 버거워하시는 건 아니고요.”

“이래 보여도 이 아비는 한창이라서 말이다.”

“정말인가요? 그러면 다음 파티 때도 아버지의 에스코트를 받아야겠네요.”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며 나는 아버지에게 더욱 몸을 기댔다.

물론 사이좋은 부녀처럼 보이기 위함이었다.

* * *

“힘들지 않니?”

“이 정도는 괜찮아요.”

“…….”

“아버지께서 마실 걸 가져다주시면 더 괜찮아지겠지만요.”

내가 웃자, 아버지의 표정도 풀어졌다.

“금방 다녀오마. 기다리렴.”

나는 최대한 미소를 유지하다가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표정을 풀었다.

연기라 해도 계속 웃으니 얼굴 근육이 뻐근하다 못해 아팠다.

‘발도 아프고.’

슬쩍 고개를 내려보니 발이 살짝 부어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장을 누비며 춤을 췄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급한 데뷔탕트는 샤리에트를 향한 관심을 뺏어오기 위함이었고, 최대한 많은 곳에 나를 노출시키고 사람들의 시선을 몰리도록 해야 했으니까.

나는 구두를 벗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난간에 몸을 기댔다.

벗으면 다시 신기 어려울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혼자 있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 찾아온 휴식을 조금이라도 즐겨야 했다.

“보고 싶다…….”

이때, 옆에 블러쉬가 있으면 마사지라도 해줬을 텐데. 아니지. 마사지가 뭐야. 그라면 아예 내 발이 이렇게 퉁퉁 부을 때까지 가만두지 않았을걸.

몸이 축축 처질 정도로 녹초가 되어있었음에도 블러쉬를 생각하자 입가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껏 블러쉬보다 잘생긴 사내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문제는 그래서 더 보고 싶어졌다는 거지만.

이럴 때일수록 블러쉬가 저 문을 열고 짠하고 나타나 주면 좋을 텐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상상만으로도 좋아서 다시 슬금슬금 웃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진짜 블러쉬는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하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이다.

나는 열리는 문에 꿀꺽 숨을 삼켰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인이시네요.”

“…….”

“제가 달가운 손님은 아닌가 봐요.”

불쑥 들어선 불청객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불청객은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영애였다.

“죄송하나, 이곳에는 이미 자리가 있습니다만.”

“알고 들어온 거예요.”

“그렇다면 더 이야기가 쉽겠네요.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주시겠어요? 아버지가 금방 오실 거라서요.”

“하기야 티어드롭 공작께 들키면 좋을 게 없죠.”

영애가 능청맞게 웃으며 품에서 쪽지를 하나 건넸다.

나는 그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눈치 주는 데에도 버티고 있는 걸 보아하니, 내가 쪽지를 받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을 참으로 보였다.

“다시 만날 때에는 티어드롭 공작은 계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은걸요.”

“영애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렇게 되겠죠. 물론 그러지 않으시겠지만.”

“…….”

“저희 측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는데 아닐까요?”

영애가 웃었고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비로소 그녀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제게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요.”

“관심이 없기에는 흥미로운 일들을 많이 벌여주셔서 말입니다. 접근할 시기를 지켜보고 있었죠.”

“그랬으면 좀 더 일찍 접근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영애께서 저희의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 판단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영애는 생글생글 잘 웃었지만 그 미소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촌을 통해 언질을 줬음에도 지금껏 잠자코 있던 이였다.

설마 이런 곳에서 모습을 드러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심부름꾼인가요?”

“비슷합니다.”

“비슷이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저희가 아직 거기까지는 가깝지 않지 않으니까요.”

영애가 또다시 쪽지를 내밀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쪽지를 받으려다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손이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따끔했다.

“이건…….”

놀란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영애가 빤히 날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일 뿐 그녀는 이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거라면 더 먼저 찾아뵈었을 텐데요.”

“…….”

“영애를 다시 뵈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요.”

단지 웃는 것뿐인데, 등골이 오싹한 이유는 뭘까.

나는 긴장한 티를 감추기 위해 손안의 쪽지를 꽉 쥐었다.

상대는 어디에서나 볼 법한 흔한 외형을 한 여자였다.

대단한 특징 없이, 다른 사람들과 있으면 있는지도 모르고 스쳐 지나갈 법한 그런 사람.

‘그런데, 왜…….’

블러쉬와 처음 마주쳤을 때조차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나는 유달리 새까만 여자의 눈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의 감각이 섬뜩해 목이 탔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정작 날 이렇게 만든 영애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지만.

“겁먹을 필요 없어요. 잡아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

“아니, 없진 않나.”

영애가 내게 손을 뻗으려던 그 순간, 닫혔던 문이 도로 열렸다.

나는 그제야 반사적으로 참았던 숨을 쉬며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지의 등장이 이토록 반갑게 느껴진 건 오래간만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새, 손님이 와있었군.”

“란쉬 백작의 여식이 티어드롭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란쉬 백작의 이름은 익히 들어봤다만, 그 여식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영애와 말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 욕심을 부린 탓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가 나타난 후부터 한순간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철없는 영애 흉내를 내는 여자를 바라보며 겨우 심호흡을 했다.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은 걸까. 언제 자신이 포식자처럼 굴었냐는 듯,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히는 모습이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떨리는 심장을 감출 수 없었다.

아버지께 사과하고 자리를 떠나는 와중에도 그녀는 내 쪽을 바라보는 걸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나는 손안의 쪽지를 품으로 감추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