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112화. 자극
* * *
“괜찮니, 심포니아? 몸은? 어디 더 다친 곳은 없고?”
“네. 전 괜찮아요.”
“괜찮긴. 만약, 그자가 아니었으면 너는…….”
아버지는 거친 숨을 토하며 말끝을 흐렸다.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란 모양인지, 아버지의 얼굴은 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래도 무사하잖아요.”
“…….”
“죄송해요. 제가 너무 방심했었나 봐요. 설마 샤리에트가 그렇게까진 할 줄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지. 광증이 그 정도로 심해졌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버지가 자신을 책망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나저나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에요.”
“이 와중에도 그런 것부터 생각하는 거니?”
“샤리에트가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잖아요. 저도 이렇게 무사하니 됐고요. 오히려 걱정되는 건 샤리에트 쪽이죠. 저희 예상보다 증상이 심한 것 같아서요.”
“그런 건 나중에 걱정해도 되니, 일단 너는 회복하는 것부터 먼저 생각하렴. 지금은 그게 우선이야.”
애틋한 눈으로 날 응시하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속으로 만족스러운 승리감을 느꼈다.
이번 사건으로 아버지는 샤리에트가 미쳤다는 걸 부인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겠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샤리에트의 일인걸요.”
“네 마음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지. 그래도 지금은 쉬는 게 우선이야.”
“쉬는 편이 더 불안해요. 샤리에트의 병은 의사에게 보일 수도 없잖아요. 의사에게 보인다고 해서 명확한 치료법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심포니아.”
“뭔가 해야 해요. 샤리에트가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게-”
달칵-
그때였다.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로 인해 대화가 끊겼다.
아버지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며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내, 블러쉬를 노려봤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생명의 은인 정도 되었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심포니아는 아직 쉬어야 합니다.”
“그러니 더욱 내가 옆에 있어야지.”
블러쉬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와 보란 듯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저절로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참아내며 블러쉬를 바라봤다.
“대공 전하,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로 감사하면 이름을 불러주지 그래? 매번 이름을 불러달라 말해도 영 듣기 힘들어서 쓰러질 지경이니 말이야.”
연기를 하는 건데, 본심을 드러낸 성싶은 건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나는 언제나 그랬듯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내에 감탄하며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안 돼. 너는 아직 더 쉬어야 해.”
“저 멀쩡해요.”
“내 덕분에 말이지.”
“…….”
다시금 끼어든 블러쉬의 무례한 태도에 불쾌한 듯 아버지의 양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구해주신 것에 대해 대공 전하께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상황 설명도 하고요.”
“하지만…….”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하지만, 아버지의 입이 마지 못해 꾹 다물려졌다.
하인들은 어찌어찌 힘으로 누른다 해도 모나차르트 대공은 아니었다.
이 오만한 사내의 입을 닫게 하는 건 아버지에게도 큰 숙제였다.
나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다음 말을 꺼냈다.
“전 정말로 괜찮으니, 아버지께서는 얼른 샤리에트에게 가보세요.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예요.”
“…….”
“얼른요.”
연거푸 이어진 내 재촉에 결국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먼저 자리에서 떠났고, 그제야 아버지가 있던 내내 거만한 자세를 유지하던 블러쉬의 표정이 달라졌다.
“설마 제가 방해한 건 아니겠죠?”
“아뇨. 딱 좋았어요. 연기도 잘하시고요. 연극배우로 일하셔도 되겠어요.”
“그건 제가 할 말이죠.”
오고 가는 농담 속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병상 신세를 지기에는 지나치게 멀쩡한 몸을 일으켜 블러쉬 쪽으로 붙였다.
보는 눈이 많다 보니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처럼 둘만 있을 기회가 쉽게 오진 않았던 터라 아쉬웠던 참이었다.
“그래서 확인하셨습니까?”
“픽스 블랑 티어드롭을 언급하니 반응이 있었어요. 그쪽과 연관된 건 확실해요.”
“그럼에도 썩 기쁜 표정은 아니군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요.”
샤리에트의 뒷배로 의심되는 인물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회귀 전의 과거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었고,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가며 모든 경우의 수를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쉽게 용의자를 추릴 수 있었다.
티어드롭의 사정을 잘 아는 내부인인 동시에, 의심스러운 현금 흐름이 보이는 등 여러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이번에 샤리에트가 보인 반응 덕분에 확신하게 되기도 했고.
하지만 그 정도로 모든 의심을 정리하기에는 어딘가 애매했다.
픽스 삼촌은 야욕은 많으나, 그리 체계적이진 못한 사람이었다.
이번 계획을 혼자 벌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황실일까요?”
“지금으로선 그쪽이 가장 의심스럽지만…….”
“다른 의견이 있으신 겁니까?”
“귀족에게 핏줄은 중요하잖아요. 특히 황족이면 더 그렇죠.”
“눈으로 피를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요?”
나는 가만히 손목을 내려다봤다.
하얀 피부 아래로 푸르스름한 혈관이 비치고 있었다.
한 꺼풀 벗겨보면 다들 똑같이 붉은 피가 흐르나, 그 가치는 동등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기야 그들은 핏줄을 유독 따지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긴 하겠군요. 모나차르트처럼 되고 싶진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런 농담은 하나도 안 웃겨요.”
나는 단호히 표정을 굳혔다.
블러쉬는 옅게 웃으며 내 눈꼬리를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그렇습니까? 아쉽네요.”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긴 하네요.”
“어떤 의심 말입니까?”
“핏줄을 일부러 더럽힐 목적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요. 모나차르트라는 선례가 있으니, 충분히 해볼 만한 생각일 수 있지 않나요?”
보통 선례가 있으면 그만큼 비슷한 생각을 내는 게 쉬워졌다.
나만 하더라도 날 곤란케 하기 위해 자해하던 샤리에트나, 쉽게 성을 타고 오르던 프로스트를 보며 테라스에서 떨어질 계획을 세울 수 있었으니까.
두 사람의 선례가 없었으면, 블러쉬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오르젠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황실과 대등하게 대립하는 세력이잖아요.”
개인적으로 찜찜한 점도 있고.
나는 과거를 되짚으며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일렀다.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일단 여러 세력을 고려해봐요. 한창 시끄러운 시기잖아요. 저희처럼 숨죽이고 있는 자들이 한둘이 아닐 수도 있죠.”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고요?”
“저희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상대가 누가 되었든 간에 처리해야 하니까요.”
아닙니까?
블러쉬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해 보이는 태도였다.
하지만 블러쉬를 보는 나로선 흡족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네요. 어차피 처리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죠. 특히 오늘 얻은 조력자 덕분에 일이 보다 쉬워지기도 할 테니까요.”
지금쯤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으려나.
나는 못된 장난이 떠오른 아이처럼 양 입술을 끌어올렸다.
* * *
“영애가 벌인 사건은 실수로 처리되었으니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
“티어드롭 공작 영애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람을 떨어트려서 죽일 뻔했다는 소문 같은 게 퍼지면 안 좋잖아요.”
“…….너, 잘도 거짓말을 했더라?”
“저번부터 쭉 그랬지만, 영애께서는 아무래도 예의를 지킬 생각은 없어 보이네요.”
“내 말에 대답부터 해.”
샤리에트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하나, 나는 그녀의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져온 봉투를 내밀 뿐이었다.
“대답은 이걸로 대신 할게요. 기억나죠? 얼마 전, 제가 당신에게 보여줬던 거요.”
“…….”
“별 건 아니고, 관광 배 사업에 대해 논의한 걸 정리해둔 거였어요.”
나는 보란 듯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시켜줬다.
다소 더러워지긴 했으나, 봉투 안에는 며칠 전 추락 사고 때와 같은 내용물이 들어 있었다.
“영애를 테라스 쪽으로 끌어당길, 그리고 영애가 날 밀친 것처럼 보이게끔 하려던 미끼였던 거죠.”
“하…….”
“아, 그리고 하나 더 고백하자면, 영애가 가짜라는 증거도 없어요.”
나는 일부러 생글생글 웃었다.
이럴수록 샤리에트를 더 자극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