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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108화 (108/204)

| 108화

108화. 규칙적으로

“지금으로선 어느 쪽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결국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거나, 혹은 대단한 뒷배를 두고 있어 정말로 아무렇지 않거나요.”

“…….”

“이미 의심하고 있는 작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직은 의심일 뿐이에요.”

나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았다.

샤리에트의 뒤에 있는 인물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확신을 갖기에는 아직 몇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럼 이번 기회에 확인해보면 되겠군요.”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야, 심포니아가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괜찮습니다. 잘 해내실 겁니다.”

블러쉬의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유려하게 휘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미소였다.

내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힘이 되었다.

* * *

“어떠니?”

“솔직히 썩 좋진 않네요. 처음이야 너도, 나도 좋다고 배를 타기 위해 달려들었다고 해도 슬슬 질릴 때잖아요.”

나는 살펴본 서류를 내려놓고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티어드롭에 머무는 내내, 조력자를 자처하고 나선 덕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니?”

“당연히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해야죠.”

“해결할 수 있겠니?”

“물론이죠.”

나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도움을 청한 관광용 배 사업은 원래 내가 구상하던 것이었다.

여러 변수를 고려하고 따져가는 걸 좋아해 예전부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해결 방법을 미리 해뒀던 만큼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딱히 어렵지 않았다.

“문제점은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신선함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배의 동선이 너무 뻔해요. 이런 식이라면 그나마 남은 손님들도 금세 질려버릴 거예요.”

“운하의 구조상 어쩔 수 없지. 수로의 위치를 멋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달라지지 않는 배의 꾸밈새나, 비슷한 뱃사공과 계속 반복하는 노래, 심지어 내오는 간식들도 매번 뻔하잖아요. 솔직히 저라도 몇 번 타면 질렸을 거예요.”

아이디어는 훔쳐서 쓸 수 있을지언정, 그걸 고안해내기 위해 쓰인 노력까지는 훔칠 수 없었다.

노트에 적힌 내용으로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내고, 그걸 구상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자료 등 얼마나 많은 것들이 소요되었는지 모를 테니까.

내가 왜 배에 차양을 씌웠는지조차 제대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았을 이가 문제점을 파악하고 수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점은 나도 파악하고 있단다. 그래서, 뱃사공도 바꿔보기도 하고 배의 장식을 바꿔보기도 했지.”

“그래서 결과가 좋았나요?”

“아니. 딱히. 이미 뱃놀이는 유행에서 벗어나고 있어서 말이다. 변화를 줘도 썩 반응이 좋지 않더구나.”

아버지의 표정이 부쩍 어두워졌다.

고작 사업 몇 개를 말아먹는다고 해서 티어드롭이 망할 리는 없었지만, 관광용 배 사업은 데뷔탕트 이후, 큰 성과를 내지 못했던 샤리에트의 대표적인 업적이었다.

사업 자체가 벌어들이는 수익도 수익이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쉽게 포기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네게 물어보는 거란다. 사실 네게도 의견이 없으면, 아예 사업을 접을 생각도 하고 있어서 말이다. 한때이긴 하나, 수익이 나쁘지 않아서 적자는 아니거든.”

“하기야, 가능성이 없다면 일찍 포기하고 정리하는 편이 낫죠. 그것만 사업이 아니잖아요. 부족한 점은 다른 걸로 메꾸면 되죠.”

어차피 최근 샤리에트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었다.

사업이 성공하는 시기만 잘 맞춘다면, 관광용 배 사업은 정리되더라도 샤리에트의 업적 중 하나로만 기억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당분간 관광용 배 사업은 좀 더 유지되어야만 했다.

“그래도 저라면 이번 사업은 접지 않을 거예요.”

“방법이 있니?”

“계절별로 배를 운항하는 건 어때요?”

“계절별로?”

“매번 장식을 바꿔 달 순 없잖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아예 시기를 정해놓고 그때에 맞춰서 장식을 다르게 하는 편이 나을 거예요.”

“매번 장식을 바꿔 달아도 반응이 그저 그런데, 계절에 맞춰 바꾼다고 해서 다른 게 있겠니?”

“그야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게 있잖아요.”

말은 어떻게 꾸며내기 마련이라고.

내 대답에 아버지의 만면에 미소가 감돌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덧붙일 셈이니?”

“특정 계절에만 탈 수 있다는 걸 강조할 셈이에요. 해당 시기가 끝나면 더는 같은 배는 탈 수 없다고요. 한때만 누릴 수 있는 희귀한 것이 되는 거죠.”

“그리고?”

“모든 걸 계절에 맞춰서 준비하는 거예요. 해당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던지, 노래 같은 걸 말이죠.”

“나쁜 생각은 아니구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거다.”

아버지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래서 뱃사공을 이용할까 해요.”

“뱃사공?”

“자료를 살펴보니, 저희 배를 이용하는 손님은 대다수가 여성이더군요.”

“그게 의미가 있니?”

“뻔한 뱃놀이로 전략하고 있는 와중에도 꾸준히 수요가 있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죠.”

“…….”

방금 전까지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던 아버지의 눈빛이 달라졌다.

슬슬 내 이야기가 새롭게 들리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정숙은 귀족 여성들에게 중요시되는 거죠. 젊고 잘생긴 청년을 가까이서 볼 일은 파티장에서 춤을 출 때나, 이런 일을 제외하면 그리 많지 않아요. 대놓고 몇 번 만남을 가졌다간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게 귀족 사회잖아요.”

“그렇지.”

“그럼에도 이성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어요. 겉으로는 쉬쉬하는 분위기를 피해 오히려 좀 더 은밀하게 행해졌을 뿐이죠.”

“은밀하다고?”

“듣기로는 음지에서는 연애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심지어 그 수요는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층까지 펴져 있고요.”

“그런 거라면 더 위험하지 않니? 네 주장대로 바꿨다가는 티어드롭이 문란한 분위기를 조장한다면서 세간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어.”

티어드롭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귀족 가문이 명예를 중시한다.

제정신이 박힌 귀족이라면 백만금을 준다 한들, 문란하다는 꼬리를 스스로 달리 없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죠. 애당초 뱃놀이가 진행되는 곳은 수도 전역에 있는 운하예요. 보는 눈들이 무척 많다고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그들은 그저 뱃놀이를 즐기고 있을 뿐이에요.”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애당초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는 건 한둘이니 아니니까요. 폐하께서 극찬하셨다는 오페라 가수들이 사랑받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잖아요. 뱃사공이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죠.”

“재미있는 생각이구나.”

“뱃사공이 오페라 가수와 같은 파급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면, 더 재밌어질 거예요.”

“오페라 가수와 같은 파급효과라면……. 뱃사공을 문화의 선도주자로 만들 셈이구나.”

“그들이 다니는 길목은 뻔하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고, 그만큼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 이보다 더 좋은 홍보 효과가 어딨겠어요. 두고 보세요. 조만간 뱃사공들이 유행을 주도하는 날이 올 거예요.”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괜히 뱃사공을 젊고 잘생긴 청년으로 구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럴듯한 외모만큼 사람을 쉽게 홀리는 게 없다는 걸 계산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구나. 뱃사공을 대놓고 꾸미기 시작하면 의도가 뻔히 보일 텐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보수적인 귀족 가문의 반감을 살 수도 있을 거야.”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 상관없지 않나요? 가면으로 탑승객들의 얼굴을 가리는 거죠.”

“얼굴?”

“가면무도회가 인기 있는 건, 결국 익명성이 지켜지기 때문이잖아요. 한 장의 가면이 비밀을 지켜주는 거예요. 배에 타는 순간만큼은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요.”

어때요?

나는 기대 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구태여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한껏 호선을 그리고 있는 아버지의 입술은 만족감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알아차렸다.

내 제안은 통과될 것이었고, 조만간 수도에는 내 제안대로 꾸며진 배들이 오갈 터였다.

똑똑-

그때였다.

별안간 들린 노크 소리에 나는 시계를 찾았다.

어느덧 시침은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이 시간만 되면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문밖에는 간식을 들고 선 샤리에트가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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