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104화. 샤리에트
“제가 아는 심포니아는 생각이 많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 허투루 두지 않고, 의문점이 생기면 당연히 해결하러 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프들에 관해선 딱히 생각하려 들지 않더군요.”
날카로운 시선이 비수처럼 날아와 오롯이 내게 꽂혔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엘프들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애정과 관심이 과하다 생각하면서도 그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냥 별생각 없이 넘겨왔다.
평소의 나라면, 그럴 리 없는데도 요정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자연스레 회피해버렸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에 쉽게 의문을 품을 수 없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그들을 믿어요. 보셨잖아요. 제게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저 역시, 나쁜 뜻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뭔가 감추고 있죠.”
“…….”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블러쉬는 별 감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덩달아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블러쉬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에 되레 머릿속이 차분히 정리되었다.
내겐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분노보다 먼저 앞서는 감정이 있었다.
“돌아가면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도 방법입니다.”
“어째서요?”
“세상에는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일도 있으니까요. 특히 지금까지 엘프들이 보여왔던 태도를 생각하면, 당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이 클 테니까요.”
“그걸 알면서 말씀하신 거잖아요.”
“제가 아는 여자는 모르는 것보다 아는 걸 선택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뺨을 감싸는 손길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선택할지는 심포니아의 몫이겠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제 입장은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
“그러니 편히 선택하셔도 됩니다.”
“제가 뭘 선택하실지 이미 아시면서.”
굳이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다정한 시선 속, 나는 손목을 어루만졌다.
내가 찬 팔찌는 미샤가 부적이라며 만들어준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껏 내가 봐온 미샤의 애정은 진심이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예의상 물어보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상대가 약해졌을 때야말로 꼬여내기 좋은 시기도 하고요.”
귓불이 살짝 깨물렸다.
얼굴을 감싼 손이 내려와 허리를 감쌌다.
나는 달아오르는 뺨이 무색하리만큼 재빨리 손을 뻗었다.
뒤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이 새는 줄 모른다는데, 나 역시 그짝이었다.
내심 정숙하게 굴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막상 이런 순간이 되면 도무지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무조건 넘어가기보다는 적당히 빼며 안달 나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아무리 머릿속에서 곱씹어도 겹쳐지는 입술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까.
“하아, 하…….”
나는 차오르는 숨에 애꿎은 사내의 옷깃만 꽉 쥐었다.
변명 같이 들리겠지만, 유혹에 약한 건 내 탓만이 아니었다.
금욕적인 얼굴과 별개로, 정염으로 들끓는 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홀렸다.
금방이라도 날 부숴 버릴 듯 우악스럽게 밀려들 것 같으면서도 애써 본능을 억누르는 시선을 볼 때마다 등골이 오싹한 동시에 입 안에 침이 고이기 마련이었으니까.
츄읍, 츱, 읍.
입술이 겹쳐졌다가 떨어지며 바람 빠지는 듯 소리가 났다.
그렇게 몇 번씩 입을 겹치다 보면, 처음 시작은 그일지라도 이제 누가 먼저 입을 맞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서로를 탐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했다.
마차는 컸지만, 그건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잠시만.”
입술이 겹쳐진 채 발음하는 게 얼마나 자극적인지 모르나.
예상치 못한 자극에 찡그릴 새도 없이 몸이 가볍게 들어 올려졌고, 나는 붕 뜬 몸에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줬다.
다행히 몸이 떠오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어느덧 내려보게 된 사내의 얼굴을 생각하면 다행히 아닐지도.
꿀꺽.
들리지 않길 바랐으나, 그럴수록 침 삼키는 소리는 선명했다.
내가 앉은 곳이 사내의 허벅지라는 걸 깨닫고 뒤늦게 뒷걸음을 쳐봤자 소용없었다.
노련한 사냥꾼은 한 번 잡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 법이었다.
“이, 이러면-”
“안 됩니까?”
“마차는 이동을 위한 수단이지, 이런 일을 하기 위한 건 아니니까요.”
“상식적인 대답이긴 하나, 눈먼 연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죠.”
“여, 연인이요?”
“그럼 아닙니까?”
“물론 맞긴, 꺅!”
덜컹거리는 마차에 흔들린 몸이 그대로 사내에게 넘어갔다.
나는 얼떨결에 블러쉬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시야가 차단된 탓인지, 아니면 뭉게뭉게 피어나는 몹쓸 생각 때문인지 괜히 몸이 풀 먹인 천처럼 빳빳해졌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괜찮아요!”
목덜미를 스치는 거친 손에 등골이 오싹해 황급히 일어나려는데, 또 한 번 마차가 덜컹거렸다.
나는 한 번 더 사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게 된 나머지 급히 숨을 삼켰다.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살갗을 통해 쿵쿵 전해지는 사내의 맥박이 기묘했고,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치마가 자꾸만 신경 쓰여서 미칠 것 같았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다른 것이었지만.
나는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블러쉬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줬다.
촉.
그때였다.
말캉거리는 뭔가가 목덜미를 스쳤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차마 고개를 들 순 없었다.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드러난 살갗마다 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떨어진 입술은 부드러운 동시에 노골적이었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가죠.”
어차피 수도로 가는 내내 이곳에는 저희 둘 뿐이고, 시간도 많으니까요.
끈적하게 귓가를 맴도는 사내의 기대 어린 음성이 그러하듯.
* * *
“충분히 예쁘시니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 문제가 아니잖아요. 다른 것보다…….”
차마 뒷말은 더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더 말해봤다 내 얼굴만 달아오를 것이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마부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도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몇 번이고 옷을 단정히 하고, 이어서 블러쉬의 차림도 확인한 후에야 겨우 마부에게 문을 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열린 문으로 보이는 티어드롭 저택의 풍경을 쭉 살핀 후,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심 돌아온 후를 걱정했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별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꽤 오래간만이네요.”
“어떤 기분이십니까.”
“으음, 글쎄요. 솔직히 말하면, 생각보다 별거 없달까요.”
나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설원의 날씨에 익숙해진 탓인지, 이제는 반대로 수도가 덥게만 느껴졌다.
“심포니아.”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버지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곧장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려다가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괜찮단다.”
내 시선이 어딜 향했는지 알아차린 아버지가 먼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제야 몸에 힘을 풀며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잘 지내셨나요?”
“전부 네 덕분이지.”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부녀간의 재회라, 꽤 보기 좋군.”
“대공 전하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아버지는 내 손을 잡은 채, 내 뒤에 선 블러쉬에게 대충 예를 갖췄다.
나와 함께 움직이겠다는 블러쉬의 고집을 꺾지 못했으나, 아버지의 입장에서 썩 달가운 손님일 리 없었다.
“형식적인 인사치레는 됐으니, 일단 쉬고 시작하지. 우리 방은 어디지?”
“방은 별도로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런 번거로운 수고를 할 필요가 있으려나.”
블러쉬가 노골적으로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버지의 양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아직 제대로 혼인을 한 건 아니니까요. 제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게 먼저입니다.”
“그마저도 곧 끝나겠지. 어차피 티어드롭의 핏줄은 하나뿐이지 않나.”
블러쉬는 삐딱하게 고개를 세웠다.
그의 시선 끝에는 염탐하는 소동물처럼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굴리고 있는 은발의 여자가 있었다.
샤리에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