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103화. 본질을 흐리는 주술
* * *
“표정이 썩 좋지 않으시군요. 돌아가는 게 달갑지 않으신 겁니까?”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요?”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샤와 관련된 일이에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좀 기분이 이상해서요.”
“이상이요?”
“처음에는 단지 절 걱정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자꾸 걸리는 게 있어서요.”
미샤는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으니 충분히 걱정할 만했다.
딱히 이상한 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경이 쓰였다.
나는 두 팔로 끌어안듯 스스로를 감쌌다.
“뭐가 걸리시는 겁니까?”
“미샤는 계속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짐작 가시는 부분은 없으십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정 궁금하시면 출발하기 전에 물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요.”
“물론 그랬죠. 하지만 영 말을 안 해주더라고요.”
미샤는 내게 비밀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금기에 걸려 말하지 못한 경우만 제외하면, 뭐든 흔쾌히 대답해줬다.
그런 그녀가 이제 와서 말을 아끼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심포니아가 물어보는데도 말입니까?”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는 거예요. 뭔가 굉장히 망설이는 것처럼 보여서.”
미샤는 그리 오래 생각하고 움직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한 문제로 고심하는 모습은 정말로 드물었다.
“어쩌면 비밀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일 수도 있죠.”
“비밀이요?”
“엘프들이 괜히 심포니아를 따르는 게 아닐 테니까요.”
“그건 제가 요정의 계약자라서 그래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요정을 불러낸 적이 있다고요.”
그러고 보니 그때도 마차에서 요정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는 말을 마치면서도 흘끔 마차 안을 살폈다.
그때와 다른 마차이고 목적지도 정반대였지만, 자연스레 예전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썩 이해되진 않는걸요. 원래 모든 요정이 요정의 계약자에게 모두 잘해주는 겁니까?”
“글쎄요. 저는 저 외의 계약자는 못 봐서 그 부분은 모르겠네요.”
“그렇습니까?”
단지 천천히 턱 끝을 어루만졌을 뿐인데, 그 모습이 괜히 야살스럽게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일까.
나는 손끝을 꼼지락거리면서 어설프게 헛기침을 했다.
“요정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요. 엘프처럼 눈에 보이는 요정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요정도 많기도 하고요. 덕분에 요정의 계약자는 꽤 드문 존재죠.”
“그렇다면 이상한 건 아니군요. 희귀한 존재이니, 그만큼 특별 대우를 했다 생각하면 그만이니까요.”
“네. 맞아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있습니다.”
“어떤 점이요?”
“심포니아는 이제 요정의 계약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심지어 전에 이야기 한대로라면, 당신의 잘못으로 계약이 깨진 것 같던데.”
블러쉬가 빤히 나를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과 길게 찢어진 눈매만 봐서는 오해하기에 십상이지만, 그와 시선을 마주하면 비난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고마운 거죠. 계약이 깨졌음에도 절 대하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거든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죠.”
“다른 이유요? 어떤 이유요?”
“그야, 그건 저도 모르죠.”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그럴싸한 이야기나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당황해 눈만 껌벅거렸다.
물론 블러쉬는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그들이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비밀이라면…….”
“솔직히 제 기준으로 엘프들이 심포니아에게 보이는 태도는 너무 과하거든요. 요정의 계약자, 심지어 파기된 계약의 주인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죠.”
“…….”
“엘프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딱히 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잠자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의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요.”
“뭐가 의심스러우신데요?”
“의심스러운 구석이야 아주 많죠.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죠.”
블러쉬는 말을 아끼며 뒤로 물러났다.
날 위한 배려라는 걸 알았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반복한 후,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눈앞의 사내는 눈치가 빠르기도 했지만, 예리하기도 했다.
“의심스러운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의심스러운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걸 좋아해서요.”
“그렇다면 편하게 말씀해도 되겠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블러쉬가 입을 연 건 한참 후였다.
“그자와는 어떻게 만난 겁니까?”
“그자라면…….”
“그 혼혈 엘프 말입니다.”
이름을 알면서도 굳이 부르지 않는 심보는 뭘까.
나는 의도적으로 플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블러쉬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정작 그는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만났어요. 그는 꽤 오랫동안 티티아나 상단에 있었거든요.”
“오래라면 얼마죠?”
“제가 어릴 때부터 있었으니까, 정확한 햇수는 세어봐야겠지만 대충 추려도 10년도 훌쩍 더 넘었을 거예요.”
플렌과 만난 햇수를 세기 위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다가 결국 주먹 쥔 손을 보며 나는 감탄했다.
따로 세본 적은 없어서 몰랐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플렌을 오랜 시간을 알아 왔었다.
“그럼 둘 다 어린아이였을 때 본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엘프의 피 때문인지, 플렌은 처음 만난 후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았거든요.”
“나이를 먹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여긴 이가 없었나 보군요.”
“주술이 걸려 있어서 그래요.”
“주술이요?”
“본질을 흐리게 하는 주술이라는데, 자세한 건 저도 잘 몰라요. 그저 그런 주술이 있어 들키지 않고 인간들 틈에서 살 수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 뿐이죠.”
나는 얼핏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뾰족한 엘프의 귀를 감추는 것도 비슷한 방법이라고 들을 바가 있었다.
“그럼 요정과 계약한 후, 그를 만난 겁니까?”
“네. 아무래도…….”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도로 손을 펴고, 하나둘 날짜를 세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날짜를 세어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십니까?”
내 반응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블러쉬가 물었다.
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그저 블러쉬와 접은 손을 번갈아 가며 바라볼 뿐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네?”
“플렌과 정확히 몇 년 전에 만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어릴 적이니까요. 충분히 혼동이 올 수 있죠.”
“아뇨. 단순히 어릴 적 일이라서 기억을 못 한다기보다는 좀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그게…….”
이마를 짚은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는 플렌을 요정과 계약한 후에 만났다.
지금껏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플렌과 처음 만나던 날, 정원에는 장미가 흐드러지게 펴있었어요.”
“장미요?”
“그런데, 티어드롭의 정원에는 장미가 없어요. 정확히는 있었다가 사라졌죠.”
내가 아무것도 모르던 백치였던 시절에 장미 넝쿨에 걸려 호되게 당했던 날 이후, 티어드롭에선 장미가 사라졌다.
장미가 흐드러지는 곳에서 플렌과 처음으로 만나는 건 시기상 불가능했다.
“그것 말고 다른 건요?”
“그게…….”
지금껏 깊게 생각하지 않아서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억지로 떠올리려고 한껏 애써야 겨우 드문드문 희미한 기억이 떠오를 뿐이었다.
“플렌이 그런 말도 했었어요. 무척 예뻐졌다고요.”
“…….”
“별거 아니라는 거 아니는데…….”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별거 아닌 인사치레였다.
오래된, 스쳐 가듯이 했던 말이었다.
그럼에도 거슬렸다.
“처음 만났을 때 하지 않는 말이군요. 처음 본 사람에게는 예뻐졌다는 말 대신, 예쁘다고 말하니까요.”
“착각일 수도 있죠. 오래된 기억은 그만큼 변질되기 쉬우니까요. 아니면, 말실수를 했을 수도 있고요.”
“반대로 아닐 수도 있고요.”
일순간 붉은 눈에서 안광이 감돌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심포니아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본질을 흐리는 주술이 있다고.”
“……엘프들이 제게 주술을 썼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예요?”
내 목소리는 감출 수 없으리만큼 떨리고 있었다.
“그건 다음 질문을 확인해보면 확실해지겠죠.”
“……무슨 질문이요?”
“어떤 존재였습니까?”
“어떤 존재라뇨?”
“심포니아가 불러냈다는 요정 말입니다.”
“그냥 요정이었어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요정.”
“평범한 요정이 뭐죠?”
“그러니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돌이켜보면, 평범한 요정이라는 말은 애당초 성립될 수 없었다.
요정은 포괄적인 표현인 만큼, 그 범주에 포함되는 이들도 다양했으니까.
각기 다른 모습을 한 요정들에게 평범하다는 기준을 세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헛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멍하니 눈만 껌벅거렸다.
망치로 몇 대 맞은 양 머리가 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