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96화. 훌륭한 핑계
* * *
“실은 모나차르트 대공의 도움을 받았어요.”
“……대공이라고?”
“최대한 감추고 싶었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았으니까요.”
“…….”
“죄송해요.”
나는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자, 곧장 아버지의 다정한 눈길이 다가왔다.
“왜 네가 미안해하니.”
“만약 절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네 잘못은 없단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날 이곳까지 부른 건 결국 나 때문이었잖니.”
아버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편지에 적어두었던 내용은 플렌의 죽음을 내가 안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을 내 손으로 직접 은폐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나를 공범자라 여기고 있었다.
“돌아오렴.”
“…….”
“네가 아무리 잘 숨길 수 있다고 해도 언제까지 속이긴 어려울 거다. 특히나 그들과 함께 움직이면 더 그럴 거야.”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나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잡힌 손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내게 네가 꼭 필요하다 하더라도?”
“아버지.”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단다. 사람은 너무 쉽게 죽어.”
“…….”
“조금이라도 운이 나빴다면 나는 그대로 죽었겠지. 그 잘난 내 기사들조차 대자연의 앞에선 무의미했거든.”
몸이 약해지면 자연스레 마음도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접근하는 것도 더욱 쉬웠다.
나는 머뭇거리는 척 굴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아버지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네 말대로 샤리에트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오늘처럼 또 한 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
“이번은 그저 우연일 뿐이었어요.”
“우연이라 해도 위험했던 건 사실이지.”
“…….”
“널 샤리에트의 대신으로 키운 건 부정하지 않으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간이 거짓이었던 건 아니었단다.”
평생 실패라곤 모르고 살아왔던 아버지였던 만큼 이번 사고가 꽤나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나는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기꺼이 눈을 적셨다.
“알아요. 그래서, 제가 잊지 못하는 거잖아요.”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거 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도 알아.”
“…….”
“하지만 한 번만 날 도와줄 순 없겠니?”
아버지의 말이 온통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그 이면에는 날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긴 할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씩 따져보기 시작하면 그 이면은 다정하지만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나를 티어드롭으로 끌어들이기로 한 데에는 내가 티어드롭을 노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니까.
“……제가 뭘 하길 바라시는 건데요?”
“이렇게 되니 알겠구나. 내가 사라지면 티어드롭도 끝날 거라는 거.”
“…….”
“솔직히 대단한 일은 아니야. 샤리에트는 미숙하고, 심지어 곁에는 그 아이 것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 득실거리지.”
“…….”
“이번은 사고였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어요.”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버지의 입가에는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심포니아, 내 딸.”
“…….”
“나는 네가 얼마나 다정한 아이인 줄 알아. 그리고, 누구보다 티어드롭을 사랑한다는 것도.”
“…….”
“그러니 이렇게 부탁할 수 있는 거란다. 내가 믿고 티어드롭을 맡길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아버지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나는 떨리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욕심부리게 되면요?”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아. 너는 누구보다 다정한 아이잖니.”
“아버지는 절 믿으세요?”
“물론.”
아버지의 대답은 곧장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마저도 마지못해 수락하는 양.
“……생각해볼게요.”
“정말이니?”
“네. 그러니, 아버지께서는 회복하시는 데에만 집중해주세요. 무리하시다가 괜히 상처가 덧나면 어떻게 해요. 의사도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는걸요.”
나는 걱정을 감추지 않으며 아버지의 몸에 덮인 이불을 고쳐줬다.
이 모습만 보면, 우리는 꽤나 다정한 부녀 같을 것이다.
나는 끝까지 아버지의 이부자리를 살피고 빠진 게 없나 꼼꼼히 살폈다.
물론 이 모든 건 펠리오가 대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서 한 행동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펠리오가 다가섰다.
“가시는 겁니까?”
“날 찾는 사람이 있어서.”
“찾는 사람이라면…….”
나는 일부러 대답 대신, 처연한 미소만 지었다.
* * *
“제가 약속을 지켜드렸으니 뭘 주실 겁니까?”
“…….”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티어드롭 공작을 감춰주는 조건으로 뭐든 해주시기로.”
블러쉬가 허리를 굽혔고, 나는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이런 식이면 될까요?”
“네. 제가 협박당하고 있다는 걸 펠리오가 눈치챌 정도면 충분해요.”
입 모양만으로 의사 표현을 나누며 헤실헤실 웃었다.
내심 그의 몸에 얼굴이 가려진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표정이 드러났다면 이 모든 게 연기임이 여과 없이 드러났을 테니까.
“뭐, 뭘 원하시는데요?”
나는 웃고 있으면서도 말로는 겁먹는 척 목소리를 떨었다.
저 잘생긴 얼굴을 보면서 공포에 질린 아가씨를 흉내 내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다 아시면서.”
블러쉬는 낮게 중얼거리면서 더욱 몸을 낮췄다.
더욱 가까워진 거리에 숨이 그대로 느껴졌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죠.”
“하, 하지만 여기서 이러는 건…….”
“곱게 자란 아가씨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저는 태생이 야만인이라서 되레 이런 게 자극적으로 느껴져서 말이죠.”
“그, 그건…….”
뻔뻔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너무 연기를 잘하는 거 아닌가.
나는 능청맞게 구는 블러쉬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나도 나름 연기를 잘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데, 블러쉬가 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처럼 느껴졌다.
“뭐든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건 영애였습니다만.”
아니, 어쩌면 연기라기보다는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낮게 깔리는 목소리와 별개로 블러쉬의 미소는 진해졌다.
나는 다가오는 사내를 밀어내려다가 그대로 손목이 잡혔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 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 못 하시겠다 하시면 저도 약속을 지킬 이유는 없겠죠.”
“아, 안 돼요!”
“그럼 약속을 지키시던지요.”
“…….”
나는 머뭇거리며 힘겹게 블러쉬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입술이 겹쳐졌다.
처음도 아니었음에도 입안을 파고드는 감각은 변함없이 섬뜩했다.
야금야금 잡아먹힌다는 생각을 도무지 지울 수 없었다.
물고, 깨물리고, 씹히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먹잇감이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흣.”
그리고, 이제는 반대로 내가 잡아먹는다는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고.
곤란하다는 듯 일그러진 사내의 눈을 보며 나는 팔에 더욱 힘을 줬다.
보여주기였기에 진짜로 입을 맞출 필요는 없었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일과 연애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훌륭한 핑계였다.
* * *
“하아, 아직도 있, 어요?”
“아뇨.”
“네?”
“인기척은 예전에 사라졌죠.”
“그, 그럼 진작에 말씀해주셨어야죠.”
나는 불만을 토로하며 블러쉬를 밀어냈다.
하지만 사내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출 뿐 물러나진 않았다.
“이럴 때 욕심을 채워야죠.”
“하여간…….”
입술을 삐죽 내밀자, 이번에는 입술에 짧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나는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뜨면서도 뺨을 붉혔다.
실은 맞춰온 입술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원하시는 바는 얻으셨습니까?”
“이제 곧 얻겠죠. 슬슬 그만 빼고 제안을 받아들일 참이라서요. 솔직히 너무 빼는 것도 매력 없잖아요. 이 정도로 애를 태웠으니 웬만한 조건은 전부 맞춰주겠죠.”
아시다시피 저는 귀한 몸이거든요.
나는 오래전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장난스레 눈매를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