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95화. 기뻤다
* * *
“아버지는 어떠셔? 괜찮으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지만, 그나마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나는 한숨을 뱉으며 펠리오에게 가져온 물건을 건넸다.
그는 당황해하다가 이내 내가 건넨 물건을 받았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갈아입을 옷가지와 이것저것을 챙겨왔어.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챙기지 못했을 거 아니야.”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이런 것 가지곤.”
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위기 상황이라서 그런지, 날 바라보는 펠리오의 경계는 부쩍 줄어들어 있었다.
특히 지금 그들은 모나차르트 안에서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티 내지 않아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적당히 그의 눈치를 살피며 두 손을 깍지꼈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래도 티어드롭에서 사람이 오는 건 어려울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각하께서 이렇게 쓰러지셨는데-”
“진정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요?”
“수도로 가는 길목 쪽에 눈폭풍이 치고 있어.”
“눈폭풍이요?”
“모나차르트에서 매해 일어나는 자연재해야. 폭풍처럼 일어나는데, 여긴 눈이나 얼음이 더해져서 눈폭풍이라고 부른다고 하더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실제로 눈폭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신도 아니고 원하는 시간대와 장소에서 멋대로 눈폭풍을 일으킬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척을 해서 이방인의 눈을 속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폐쇄된 땅은 그만큼 통제가 쉬웠으니까.
눈폭풍으로 인해 거리가 통제되었다 거짓을 말한다고 한들,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것이 특히 설원이 낯선 이방인이라면 더욱더.
“정확한 건 조사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이번 사고도 아마 그래서 난 것 같아. 눈폭풍이 오기 전이면 지반이 약해진다고 하더라고.”
“…….”
“특히 이번 눈폭풍은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일어나기도 했고.”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예상 못 하다뇨.”
“원래 눈폭풍은 북쪽에서 잘 일어나지, 이쪽에서는 일어나지 않거든. 그래서 다들 예상치 못한 피해에 복구하느라 난리지.”
나는 눈치껏 아버지를 흘끔 바라봤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후에도 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는지 잘 살펴봐 줘.”
“각하께요?”
“단지 미신일 수도 있지만, 막상 이런 일이 벌어지니 괜히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
요정을 해한 자는 불행해진다.
일부러 언급하지 않아도 어두운 사내의 얼굴은 이미 오래된 미신을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애당초 충직한 부관이 아버지가 한 일을 모를 리 없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미샤였다.
“각하께서 괜찮으신지 상태를 보러 왔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아, 물론입니다.”
“그럼 제가 잠시 살펴볼게요.”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미샤의 품에는 약병이 가득했다.
펠리오는 꼬막손으로 이리저리 아버지의 상태를 살피며 약을 제조하던 미샤를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요정을 해한 자가 요정에게 치료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일지 그의 눈에도 아주 잘 보일 테니까.
* * *
“공작은 언제까지 재워두면 되는 거예요?”
“한 일주일만 더?”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대로 죽여버리는 것도-”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엄하게 말하자, 미샤는 금세 풀이 죽어 입을 삐죽거렸다.
“알았어요. 대신, 혹시라도 공작을 죽일 일이 있으면 제가 가장 먼저 죽일 거예요. 아셨죠?”
딱히 죽일 일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눈을 빛내며 의욕을 불태우는 미샤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도 충분히 잘 참아내며 내 뜻에 따라주고 있는 그녀였다.
굳이 반감을 살 이유는 없었다.
“티어드롭 쪽은 어때?”
“예상대로 슬슬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더군요.”
시비스는 정리해둔 서류를 내게 건넸다.
“당연히 그렇겠지. 수를 쓰기엔 딱 좋은 시기잖아.”
나는 아버지의 형제들을 떠올리며 느긋하게 서류를 넘겼다.
아버지가 가문을 물려받은 이후부터 아버지의 형제들은 전부 권력 구도에서 배제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형제들을 멍청하다 여기며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 하기 일쑤였으니까.
지금처럼 어설픈 후계자가 있는 상황을 기회라 여기고 있는 마당에 아버지의 부재는 여러모로 유혹적으로 느껴질 것이었다.
이때야말로 샤리에트에게 접근하기 가장 좋은 시점이기도 하니까.
“티어드롭 공작 영애는 소소한 것에도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니, 못 해도 한 번 이상은 외부와의 접촉이 있겠지.”
“어리석은 판단이군요.”
“맞아. 어리석지.”
나는 느긋하게 턱을 괬다.
잘 숨길 수 있으리라 여길 순 있어도 그러기란 어려웠다.
아버지는 자신이 부재할 때, 자신의 형제들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고 있었다.
수도로 귀환한 후, 가장 먼저 형제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것이었고 어떻게서든 샤리에트의 행동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또 한 번 샤리에트를 고립시킬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관계가 무너지면 결국 티어드롭 공작 영애는 다른 끈을 찾을 수밖에 없어. 예를 들면-”
“황실이겠죠.”
시비스가 재빨리 내 말을 가로챘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티어드롭의 다른 혈족들을 믿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지. 사실상 그들이 티어드롭 공작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한 수준이고.”
“황가와 티어드롭의 결합으로 거대한 세력이 완성될 겁니다.”
“그게 진짜 결합이라면 그렇겠지만, 우리는 알잖아. 그럴 수 없다는 거.”
“가문끼리의 결합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핏줄이니까요. 가짜라는 게 밝혀지면 사실상 끝이죠.”
지금 샤리에트가 누리고 있는 모든 건 오직 티어드롭의 핏줄이기에 얻었던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티어드롭의 이름을 지우면 모든 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었다.
“단순히 끝이라는 말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렇지만은 않잖아.”
“책임을 따질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
“덕분에 황실과 티어드롭 사이의 관계는 꽤나 시끄러워지겠고 말이야.”
나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샤리에트는 나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이제 그녀가 꽤나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참이었다.
* * *
아버지가 깨어난 건, 사고가 일어나고 약 한 달 정도의 흘렀을 때였다.
다들 하나같이 티어드롭 공작의 부재에 의문을 표하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왔던 그때 말이다.
나는 기도하듯 아버지의 손을 쥔 채 눈가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았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샤, 샤리…….”
“네, 네!”
아버지가 부르는 이름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나는 선뜻 손을 내밀었다.
이제 막 깨어난 아버지의 손은 힘이 빠져 있었다.
나는 기꺼이 아버지의 손을 내게 끌어당겨 뺨을 댔다.
“정신 차리셔서 다행이에요. 저는 정말로 아버지가 어떻게 되시는 줄만 알고…….”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아버지가 내 눈가를 쓰다듬는 것을 그대로 둔 채, 아버지를 지그시 응시했다.
“괜찮아요.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랜 시간 잠들어있던 터라, 눈을 뜨는 것도 어려운지 눈꺼풀이 몇 번 떨리다가 이내 도로 감겼다.
아버지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는 거친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포니아.”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감겼던 아버지의 눈이 도로 떠졌다.
정신이 그나마 돌아오는지, 아버지의 눈은 이제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에는 날 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