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93화. 내가 바라는 건
“샤리, 아니. 심포니아.”
아버지가 내게 손을 뻗었다.
얼굴을 가린 손을 끌어내리고 자신을 바라보게끔 했다.
나는 젖어 희뿌연 시야 속 보이는 아버지를 차마 보지 못한 채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불쌍한 척 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래전 내가 했던 표정을 짓고, 말을 뱉으며,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으면 그만이었다.
“처음부터 만나는 게 아니었어요. 한 번이 쉬울 뿐, 자꾸만 온갖 핑계를 대며 아버지를 만날 구실을 찾게 되잖아요.”
“딸과 아버지가 만나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그 아이에겐 아닐 테니까요.”
“그런 아이가 아니란다. 말하지 않았니. 그 아이도 분명 동의를-”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니고요?”
“…….”
“제게도 귀가 있고, 여기서도 소식은 들려요.”
나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도로 말을 이었다.
“저는 언젠가 그 아이가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 아이야말로 아버지의 진짜 딸이잖아요.”
“…….”
“하지만 지금은 너무…….”
나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애써 쓰게 웃었다.
내가 아는 것을 아버지가 모를 리 없었다.
“사실 그건 그 아이, 아니. 샤리에트의 잘못은 아니죠.”
“…….”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던 아이가 갑자기 대단한 성과를 보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잖아요. 그런 건 웬만한 천재들이라 해도 어려울 걸요.”
말로는 샤리에트를 옹호해주는 것처럼 굴었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샤리에트가 천재가 아님을, 그저 평범한 사람 중 하나임을 공고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많이 불안하고, 초조해하고 있을 거예요. 갑자기 주어진 많은 기대가 힘들 테고, 계속해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 많이 힘들었겠죠.”
“…….”
“그런 상황에서 제가 돌아가면, 가뜩이나 힘든 샤리에트가 더 힘들어질 거예요. 심지어 샤리에트는……, 아니. 아니에요. 제가 괜한 말을 꺼냈네요.”
일부러 다음 말을 머뭇거렸다.
어차피 아버지는 샤리에트가 내 계획을 따라 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 굳이 내 입으로 떠들 이유는 없었다.
나는 끝까지 착한 아이를 흉내 내면 그만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한참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너는 끝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구나.”
“…….”
“그런 눈 하지 않아도 된단다. 샤리에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정도는 나도 눈치챘으니까.”
“샤리에트의 잘못이 아니에요.”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않고 반박하자, 아버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샤리에트의 잘못이 아니라고?”
“제 잘못이죠. 어차피 떠날 거라면 깔끔하게 정리하고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너는 정말-”
“저는 과오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이 역시,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가르침이었잖아요.”
애써 울음을 삼키고 미소를 지어 보이자, 아버지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으며 손을 뻗었다.
“샤리에트에게 잘해주세요. 잘못했다 꾸짖지 마시고 다정히 대해주세요. 아직 그 아이에게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
“물론, 그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저희도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테고요. 지금의 저는 샤리에트에게 있어서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느껴질 뿐이니까요.”
“그런 건-”
“위로 안 해주셔도 돼요. 전 제 처지를 잘 알거든요. 그리고, 애당초 아버지를 이곳으로 부른 건 다른 목적이 있기도 해서였고요.”
나는 챙겨온 편지를 아버지의 손에 쥐여준 후, 곧장 옆에 있던 등불을 끌어왔다.
“이 자리에서 읽어보시고 바로 태우세요.”
“태워?”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선 안 되는 비밀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아버지께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하고요.”
나는 눈가를 적시며 처연히 웃었다.
물론 여전히 착한 딸의 가면을 쓴 채로.
“이건…….”
“아버지께서 왜 그런 끔찍한 일을 하셨는지 묻지 않을게요.”
“…….”
“믿고 싶지도 않았고, 또 화가 나기도 했지만 결국 전 아버지가 다치는 걸 가만히 볼 수 없었거든요.”
“심포니아, 나는 그저-”
“쉿.”
나는 검지를 입에 댄 채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아차 싶었는지 급히 하던 말을 삼켰다.
“비밀은 제가 끌어안고 갈 테니 아버지께서는 원하시던 길을 가세요. 아버지께서라면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해 주세요.”
“……뭘 말이니?”
“저는 항상 아버지의 편이라는 걸요.”
“…….”
나는 편지를 보며 힘 빠진 미소를 흘렸다.
내색하지 않을 뿐, 내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모습은 아버지의 눈에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 * *
“방금 전 공작 일행이 출발했어. 바로 움직여줘.”
“네.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페잔에게 명령한 후 대충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흘린 가짜 눈물이었지만, 한 번 눈물이 터지고 나니 쉽게 멈추지 않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내 눈물이 그치지 않자, 프로스트는 어쩔 줄 몰라며 발만 동동 굴렀다.
“나는 괜찮으니까 그런 표정 안 해도 돼. 이건 다 연기라고.”
“하지만…….”
프로스트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다가 퍼뜩 뭔가 생각난 건지 성급히 소매를 쥐었다.
찌이익-
말릴 새도 없이 단숨에 찢어나간 옷을 보며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나는 내밀어진 천 조각을 보며 눈만 끔벅거렸다.
“변변치 않지만 이거라도…….”
“…….”
“제가 손수건을 챙겨 다니지 않아서요. 다음부터는 꼭 챙겨두겠습니다.”
문제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근본적인 의문이 머릿속을 채웠지만, 수줍게 웃는 사내를 보니 한소리를 할 여력도 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애써 미소 지으며 천을 집어 들었다.
천은 필요 이상으로 말끔하게 찢어져 얼핏 보면 손수건처럼 보이긴 했다.
그저 방금 전 프로스트의 행동에 놀라 나오던 눈물이 멎어 더는 손수건이 필요 없게 되었을 뿐이지만.
어쨌든 생각해준 성의가 고맙긴 한 터라, 고인 눈물만 대충 닦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쩐 일이세요?”
“가만히 앉아있기엔 신경이 쓰여서요.”
“신경이 아니라 걱정이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죠.”
얼굴을 본 순간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저 온기와 냄새가 그리웠단 생각뿐이라, 나도 모르게 먼저 걸음이 앞서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블러쉬를 끌어안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블러쉬는 날 밀어내지 않았다.
나는 그걸 핑계 삼아 염치 불고하고 그에게 슬쩍 기댔다.
“조금만 봐주세요. 저 계속 연기하느라고 힘들었단 말이에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블러쉬의 엄지가 부드럽게 눈가를 쓸었다.
누가 눈치 빠른 사내 아니랄까 봐, 내가 울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편이 가장 효율적이거든요.”
“효율이요?”
“현재 티어드롭은 철저하게 한 사람 위주로 돌아가거든요.”
아버지는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만큼 사람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의 기준으로 웬만한 사람들은 전부 하찮아 보일 뿐이었으니까.
믿기보다는 부리는 쪽이 효율적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다시 말해, 티어드롭 공작이 흔들린다는 건 티어드롭의 위기가 되는 셈이죠.”
“그러면 아예 죽여버리는…….”
블러쉬는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내 눈치를 살폈다.
오히려 태연하게 웃는 건 내 쪽이었다.
“그편이 나을 수도 있겠죠. 킹을 끄집어낼 는 기회는 많지 않으니 아예 이 자리에서 끝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
“하지만 제 목적은 티어드롭의 몰락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여기서 아버지가 영영 죽어버리면 티어드롭은 샤리에트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항상 황후를 바라던 그녀를 떠올리면, 결국 티어드롭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는 뻔했다.
차기 황제 자리를 노리고 있는 시점에서 굳이 황가의 힘을 약하게 하면 했지, 더해주는 일을 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아버지의 죽음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