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92화. 버려진 대용품의 입장
“네가 내 도움을 원치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단다.”
“저는 아버지께 폐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도요.”
“나는 물론, 샤리에트도 이미 동의한 일이야.”
“동의요?”
그 샤리에트가?
나는 조소가 나올 뻔한 걸 참아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 순간만큼 나는 순진무구한 샤리에트가 되어야만 했다.
“착한 아이란다. 네가 떠난 후부터 널 무척이나 그리워했던 아이였지.”
“그럴 리가요. 저희는 겨우 한 번 마주쳤을 뿐이었는걸요.”
“자매 같았던 거겠지. 너희 둘은 무척 닮았으니까.”
“닮았다고요?”
“아, 그러고 보니 너는 제대로 못 봤겠구나. 네가 떠난 후에 그 아인 많이 달라졌단다. 봄날의 꽃처럼 하루가 다르게 어여쁜 모습이 되었지.”
“그 아이는 아버지의 딸이니까요.”
정확히는 가짜 딸이지만.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찻잔을 쥐려다가 문득 찻물에 비친 내 모습에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의 샤리에트가 가짜라는 걸 확신한 후부터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아버렸으니까.
모두가 가짜라면, 진짜 샤리에트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녀는 정말로 죽었던 걸까.
그리고 만약 그녀가 죽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가 이런 말 한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안단다. 그런데 이렇게 널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구나.”
“무슨 생각이요?”
“그 아이를 보면 네가 떠오르더구나.”
“……저요?”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번에 널 보고 오니 그런 생각이 더 확고해졌지.”
당연히 나를 꼬여내기 위한 달콤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 사실에 속이 뒤틀렸다.
진심 어린 표정을 보면 볼수록 날 위한다는 사람이 그날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날 습격하고 이용할 생각을 했던 건지 묻고 싶어졌으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으로 애써 치미는 감정을 갈무리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컸던 것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워낙 오래 떨어져 지내 서로가 낯설었던 건지.”
이것도 내가 티어드롭을 나와서 달라진 걸까.
나는 예전 아버지였다면 하지 않았을 말을 들으며 잠시 숨을 참았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항상 샤리에트만 보고 있었다.
이제 와서 키운 정을 운운한다는 모습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게 가족이잖아요.”
가족이라는 단어를 뱉을 뿐인데, 어쩐지 모래 알갱이를 씹는 것처럼 입안이 서걱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짧게나마 심호흡을 삼켰다.
“그래. 그런 게 가족이지. 그리고 너 역시, 우리 가족이고.”
“아버지, 저는…….”
“저번에도 말했지만, 네 자리를 마련해놨단다.”
“…….”
“네가 마음만 돌려준다면,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네가 좋아하던 상단 일도 할 수 있고,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자매도 생기는 거야.”
아버지가 손을 뻗었지만 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젓는 것으로 내 뜻을 전했을 뿐이었다.
“죄송해요. 저는 그럴 수 없어요.”
“혹시, 엘프들 때문이니?”
“어느 정도는 맞고, 또 아니기도 해요.”
“그게 무슨 뜻이니?”
아버지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가며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실은 저, 모나차르트 대공에게 청혼받았어요.”
“누구? 모나차르트 대공?”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아버지의 얼굴이 구겨졌다.
항상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달고 사는 아버지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와 많이 엮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가 절 좋게 봐준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많고 많은 자들 중 왜 하필 그 야만……!”
아버지는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급히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성급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속지 마렴. 그 작자는 널 이용해 먹으려는 거다.”
“이용이요?”
“네 작품이잖니. 지금껏 모나차르트에서 벌어지는 일, 전부 말이야.”
“그건…….”
“솔직하게 말해주렴. 널 타박할 생각은 없으니.”
내가 녹색을 가장 좋아했던 건 그것이 아버지의 색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어 줄 때면 세상 모든 것들이 내 것인 양 부러울 것이 없었으니까.
“실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친구?”
“의외로 이야기가 잘 통했거든요.”
금방이라도 야만인 소리를 하고 싶은 얼굴이면서도 아버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애당초 야만인이라는 단어는 고귀한 귀족들이 입에 담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몇 번 나누고, 의탁하는 대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사이가 깊어진 거였죠.”
“설마, 너도 그 작자를…….”
“아뇨! 그럴 리가요! 저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휘휘 저었다.
그제야 아버지의 얼굴은 아까 전보다 화색이 돌았다.
“다만,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에요.”
“부담?”
“제가 떠난다고 한 후부터 그의 행동이 많이 달라졌거든요.”
“달라졌다면 어떤 식으로?”
“적극적으로 변했어요. 뭐든 내줄 것처럼 굴고, 또 실제로도 그렇죠.”
나는 슬쩍 드레스를 내보였다.
아버지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겠지만, 어쩐지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값싼 물건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널 잡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마도 그렇겠죠. 그런데, 저는 그를 마음에 둔 것도 아니고 이런 일에는 익숙지 않으니까요. 솔직히 많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에요.”
“부담스러울 게 뭐 있니. 그냥 거절하면 그만인 것을.”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아버지가 말을 잘랐다.
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그 후부터 시작이었다.
“저도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어요. 아버지가 계속 생각나지만 않았다면요.”
“내 생각이라고?”
“아버지의 꿈이요.”
그 말을 뱉는 순간, 아버지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스스로가 성자라도 되는 양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항상 티어드롭을 최고로 만들고 싶어하셨잖아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다.
내가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아버지는 무릎에 앉혀놓고 티어드롭의 미래를 운운하며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주곤 했으니까.
그렇게 아버지의 꿈이 나의 꿈처럼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저희가 바라던 꿈은 이곳에 있었어요.”
“…….”
“제가 드디어 방법을 찾은 거예요.”
나는 부러 처연하게 웃었다.
자신만만한 티어드롭 공작 영애가 아닌, 버려진 대용품의 입장에 선 채로.
“……그 방법이라는 게 뭐니?”
감출 수 없는 탐욕이 날 향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딸이었고, 언제나 그 이상을 해내던 아이였으니까.
편견처럼 굳어버린 시선은 굳이 백 마디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아버지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말씀드릴 수 없어요.”
“왜니?”
“저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거든요.”
“그게 뭐 대수라고. 너만이 할 수 있으면 네가 하면 되는 거잖니. 어차피 네 자리는 마련되어 있으니-”
“제겐 자격이 없잖아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자격이 있겠니. 넌 내 딸인데.”
“저희가 피가 섞인 건 아니잖아요.”
“피는-”
“저는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요. 저라면 더욱 그렇죠.”
“…….”
“아버지가 가르쳐주셨잖아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격이 있는 거라고.”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봤다.
“대용품이었잖아요, 저.”
“샤리에트.”
아버지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막았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 이름을 들은 후였다.
나는 울음을 삼키듯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아버지를 바라봤다.
“보세요. 아버지는 아직도 절 샤리에트라고 부르시잖아요.”
“…….”
“그리고 저는 아직도 샤리에트라는 이름이 제 것 같고, 심지어 아버지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죠.”
“…….”
“저는 제 주제를 알아요. 제게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고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잖아요.”
저, 아무것도 욕심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치미는 울음을 이겨내지 못한 양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