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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88화 (88/204)

| 88화

88화. 묘하게 닮은

“프로스트.”

내 부름에 담요를 쥔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손에는 검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나는 내밀어진 물건을 받는 것 대신, 몸을 돌렸다.

“깜짝 놀랐잖아.”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추워 보이셔서…….”

프로스트가 당황해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걱정해준 건 고맙지만 다음에는 제대로 인기척 좀 내줘.”

“네, 네.”

“너무 주눅 들지도 말고.”

오늘도 온몸을 검은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 프로스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는 몸짓만으로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어깨에 힘을 빼며 그가 들고 있던 담요를 집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갈 거라서 별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천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눈동자가 젖은 듯하여 차마 내칠 순 없었다.

“고마워.”

“아닙니다.”

그저 담요를 어깨에 걸쳤을 뿐인데 금방 표정이 좋아진 것 같다.

나는 감춰진 프로스트의 표정이 어떨지 유추해보며 걸으려다가 바닥에 끌리는 담요에 미간을 찡그렸다.

‘……이거 의외로 어려운데?’

나는 드레스와 담요가 바닥에 닿지 않게 애쓰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드레스를 입고 쌓인 눈밭을 걷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거기에 묵직한 담요까지 더해지니 난이도가 더 올라간 것 같았다.

“걷기 힘드신가요?”

“담요가 커서 말이야. 그냥 벗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럼 추우시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넘어지는 것보단 낫겠지. 적어도 우스꽝스럽진 않잖아.”

나는 담요를 벗어 도로 프로스트에게 건넸다.

어차피 정원에서 성안까지 거리가 그렇게 있는 편도 아니었다.

조금 춥겠지만 담요는 돌려주고 가볍게 걸어가는 편이 나을 듯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프로스트는 담요를 받지 않았다.

“그럼 넘어지지만 않으면 되나요?”

“넘어지는 것보다 추운 게 낫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떠들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고.

나는 담요를 프로스트에게 마저 건네고는 드레스를 살짝 들었다.

이대로 얼른 들어갈 셈이었다.

어깨에 다시금 담요가 둘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에 대해 말할 새도 없이 몸이 들리지 않았다면.

“이번 한 번만 창문을 쓰겠습니다.”

“어?”

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헛숨을 뱉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전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몸이 솜털이라도 되는 양 가뿐하게 들어 올리는 사내에 기겁할 새도 없이 금세 집무실에 도착해버렸다.

“이게 무슨…….”

순식간에 일어난 일은 그만큼 한순간에 끝이 나버렸다.

나는 언제 붕 떴냐는 듯, 당연하게 바닥을 밟고 있는 발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방금 꿈이라도 꾼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몇 번 심호흡을 반복하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프로스트를 보며 눈에 힘을 바짝 줬다.

“프로스트, 방금 이게 무슨 짓이야.”

“그게, 추워 보이시는 데다가 무엇보다 걷기 힘들어 보이셔서…….”

“그래서?”

“비 전하께서 고생하시는 것보다 제가 움직이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담요를 걸치실 수도 있고요.”

잘못했다고 따끔하게 혼을 낼 생각이었는데, 축 처진 어깨가 처량했다.

프로스트가 나쁜 의도로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넘어가 줄 순 없었다.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건 정말로 아니야.”

“창문으로 드나든 건 죄송했습니다.”

“창문만?”

나는 눈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장난인가 싶었는데, 프로스트는 정말로 스스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창문으로 드나들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돌아가면 그만큼 빙 돌아가야 해서-”

“나는 지금 그걸 지적하는 게 아니야.”

“제가 또 잘못한 게 있습니까?”

“있지.”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거렸다.

하는 짓이며 생각이 어린아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프로스트는 성인이었다.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짚고 넘어가 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결혼한 몸이잖아.”

“네. 알고 있습니다. 비 전하께서는 전하와 결혼하셨죠.”

“원래 기혼자는 함부로 끌어안고 그러는 거 아니야.”

“네?”

“우리 둘 다 그럴 마음이 없다 해도 주변에서 오해할 수 있단 소리야.”

덩치는 산만 한데, 왜 이렇게 내 눈에는 작게만 보이는 걸까.

나는 움츠러든 프로스트를 보며 쓰게 웃었다.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친근하게 지내는 데에도 선이 있는 법이었다.

“역시, 저 같은 것과 친하게 지내면 사람들이 말을-”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나는 황급히 프로스트의 말을 잘랐다.

아무래도 내 말이 잘못 전달된 모양이었다.

“일단 그 복면부터 벗어봐.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내 명령에 프로스트가 주섬주섬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었다.

나는 표정 변화가 분명한 곱상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미 프로스트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정말이십니까?”

“다만 주의가 필요하다는 거야. 아무리 친하다 해도 사랑과 우정은 차이가 있는 거잖아?”

“사랑과 우정이요?”

“친구끼리도 포옹은 할 수 있지만, 기혼자는…….”

기나긴 설명을 하기에는 내 지식도 그리 깊지는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도덕적인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지 고심하며 말을 골랐다.

나도 대단한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상대는 지나치게 새하얀 도화지 같아서 차마 뭐 하나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잘못 이야기했다가는 깨끗한 도화지에 더러운 얼룩만 잔뜩 만들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한참 고심하고 있는데,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나는 녹슨 기계처럼 어색한 몸짓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블러쉬가 서 있었다.

“웬일이에요?”

대답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온 블러쉬가 나와 프로스트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는 답지 않게 거친 숨을 뱉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죠. 프로스트가 절 해칠 리 없잖아요.”

나는 프로스트가 무해하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블러쉬는 그런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어보더니, 이내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이어서 프로스트를 노려봤다.

“훈련장에 가 있어.”

“네.”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대답은 잘도 한다.

나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린 채 걸어가는 프로스트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그리 길지 않았다.

블러쉬가 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프로스트가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에요.”

“나쁜 뜻이 아니었다고요?”

“제가 추워 보여서 담요를 가져다줬고, 걷기 힘들어 보여서 옮겨다 준 거죠.”

“심포니아가 그런 걸 먼저 요구할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힘이 실린 목소리는 단언하고 있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게 나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어설픈 거짓말을 해봤자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알았다.

“프로스트가 내린 독단이긴 했죠. 불시에 일어난 행동이라 놀라긴 했고. 하지만 그뿐이었어요.”

“그뿐이요?”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무엇보다 절 해치려 하기보다는 위하는 마음에서였죠.”

“…….”

블러쉬의 눈썹이 위를 향했다.

아무래도 내 옹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지금껏 모르고 한 실수였으니, 제대로 일러주면 다음에는 하지 않을 거예요.”

“관대하시군요.”

블러쉬의 눈이 날카로워졌지만, 나는 이제 그가 험상궂은 얼굴을 해도 딱히 무섭지 않았다.

“이상하게 프로스트에게는 쉽게 화를 못 내겠더라고요.”

“그가 마음에 드신 겁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묘하게 닮았거든요.”

“닮았다고요?”

“네. 닮았죠.”

다름 아닌, 어릴 적의 저를.

나는 살짝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프로스트가 유독 마음에 쓰이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회성이 결여된 모습은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일부러 짜 맞춘 것도 아닌데, 버려진 아이들의 삶은 하나 같이 결이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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