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86화. 익숙한 풍경
오랫동안 대답을 기다렸는데 돌아오는 건 없었다.
나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녹색 눈동자들을 보며 살짝 콧잔등을 구겼고, 플렌은 그제야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원치 않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온다면, 아가씨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 건데?”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을 듯해서요.”
세월이 느껴지는 시선과 의중을 알 수 없는 말.
잘 지내는 것 같다가도 이럴 때면 새삼스레 종족이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된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어 잠시 숨을 골랐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을까요?”
“아니. 그보다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거라서.”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개인적으로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까요.”
플렌의 시선이 유리병에 닿았다.
병 안에는 여전히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쿠키가 있었다.
* * *
운이 좋을는지, 복도에서 딱 마주치고야 말았다.
나는 주책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추단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훈련장에 가는 길입니다. 심포니아는요?”
“예산 문제로 시비스와 상의할 게 있어서 잠깐 재무관실에 들렸다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그렇군요.”
가는 길이 같으면 좋으련만, 내 집무실과 훈련장은 방향이 정반대였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끝나면 남은 건 헤어지는 것뿐이었다.
“…….”
“…….”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움에 눈치만 보고 있는데, 먼저 블러쉬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죠.”
“이거 종이라서 안 무거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희 가는 방향이 다른걸요.”
“…….”
“배려는 감사하나-”
“수작 부리는 겁니다.”
말릴 새도 없이 들고 있던 서류를 빼앗겼다.
나는 한참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는 얼굴을 멍하니 올려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수작이요?”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요.”
“…….”
당황해 말을 잃은 날 두고 블러쉬는 등을 돌렸다.
나는 그의 너른 등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떼는 사내에 급히 발을 움직였다.
물론 그 순간, 내 뺨은 치민 열에 화끈거리고 있었다.
“……그런 말 하는 거 부끄럽지 않으세요?”
“뭐가 말입니다.”
“그게…….”
“말 안 해주시면 모릅니다만.”
거짓말. 다 알면서.
나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내 말을 다 듣고 있음에도 모른 척 앞만 보고 가는 사내가 원하는 바는 지나치게 분명해서 괜히 입안이 간질간질거렸다.
“수, 수작이나, 같이 있고 싶단 말……, 막 그런 거요.”
이것도 경험의 차이인 걸까.
나는 아직도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워 죽겠는데, 아무렇지 않게 툭툭 뱉는 블러쉬를 보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능숙한 사내를 보고 있으면,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과거에 있었을 다른 여자를 떠올리기 마련이었으니까.
“돌려 말하면 못 알아차리시는 듯해서 말입니다.”
“늘 직설적으로만 말씀하시면서.”
“저는 방금도 돌려 말했습니다.”
“어디가요?”
나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블러쉬는 돌려 말한 적이 딱히 많지 않았다.
항상 직설적이었고 감추는 게 없었다.
“서류를 대신 들겠다고 했죠.”
“그건 배려 아닌가요.”
“사심이 없으면 배려라 할 수 있겠지만, 있다면 수작이죠.”
사내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나는 마주친 시선에 황급히 두 손으로 달아오른 뺨을 가렸다.
“미리 말해두지만, 저는 허투루 시간 쓰는 걸 썩 안 좋아합니다.”
“네?”
“이번에는 돌려 말한 겁니다.”
“…….”
“쓸데없는 곳에 시간 쓰는 걸 싫어하는 사내가 어린아이도 들 수 있을 법한 서류 몇 장을 대신 들어다 주겠다 나선 이유를 생각해 보시라고요.”
“거, 거기까지 말해버리면 이미 돌려 말한 게 아니잖아요.”
문제와 해답을 동시에 건네주고는 정답을 구하라고 하는 건, 식은 수프를 입 안으로 떠먹여주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나는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며 멍하니 블러쉬를 올려다봤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하나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안타깝게도 조급한 건 제 쪽이라서요.”
“언제 조급하셨다고.”
“늘 조급하죠.”
블러쉬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답지 않게 느린 걸음은 쫓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여유로워 보이시는걸요.”
“그러려고 노력하는 거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놀라 도망가실 듯하여.”
“저 그렇게까지 겁쟁이는 아니에요.”
스스로 겁이 많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진 않았다.
나는 괜히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켜내며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게 문제인 거죠.”
“네?”
“잔뜩 움츠려있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전부 하시는 거요.”
“그, 그것도 문제가 되나요?”
“예쁘거든요.”
뭐가 예쁜데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삼켜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이미 숨이 벅차서 말문이 턱 막혀버렸으니까.
물론 앞서가는 사내는 그런 날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다음 말을 이을 뿐이었지만.
“다 감내하지도 못해서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하면서도 어떻게서든 꾸역꾸역 감정을 쏟아내는 게 기특하기도 하고.”
“…….”
“안달 난 얼굴을 보면 깨물어보고 싶단 생각도 들고.”
“…….”
“또, 새삼 인내심을 시험받는 기분도 들고.”
“…….”
이 사내는 부끄러운 걸 모르는 걸까.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덤덤했지만, 그래서 더 목이 탔다.
결국 나는 더 가지 못한 채 걸음을 멈췄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혹여나 블러쉬에게 들릴까,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려보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내 노력이 무색하게 내가 더 걷지 않자, 블러쉬도 멈췄다.
“역시,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아쉽군요.”
“…….”
“꽤 예쁜 얼굴을 하고 계실 듯한데.”
역시, 그는 이런 일에 익숙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유려하게 웃으며 날 돌아볼 수도, 그런 내게 쉽게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부축이 필요하실 듯하여.”
“…….”
“이것도 돌려 말하는 겁니다.”
손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치미는 게 열기인지, 질투인지 알지 못한 채 떨리는 손을 뻗었다.
우스운 건 달아오른 얼굴이 부끄러운 와중에도 코앞에서 살랑거리는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겠다는 점이었다.
나는 사내의 손을 좋아했다.
거칠고 모난 손은 예쁘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까끌거리기까지 해 잘못하다간 손에 붉은 기가 올라오곤 했지만 그럼에도 좋아했다.
그 누구보다 크고 단단한 손을 잡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치밀었으니까.
“아.”
손이 닿았다 생각한 순간, 그대로 잡혔다.
거친 살갗이 여린 살을 파고드는 느낌은 도무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깍지를 끼고, 손을 당겨 자신의 옆에 날 세우는 사내의 존재는 기꺼웠다.
“다음부턴 장갑을 끼고 다녀야겠군요.”
아, 그건 싫은데.
“싫으십니까?”
“……네?”
방금 내가 생각하는 걸 입 밖으로 냈나.
당황해 블러쉬를 올려다보니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릴 뿐이었다.
“제가 장갑을 낀다고 하니 표정이 금세 표정이 안 좋아지셔서.”
“……그걸 또 보고 계셨어요?”
“일종의 습관이죠.”
“습관이요?”
“보기 좋아서 눈길이 가는 것도 있겠지만요.”
이 남자가 진짜.
나는 차마 블러쉬를 보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은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와도 같았다.
툭 하고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에 나는 일렁이는 수면처럼 몇 번이고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정작 나를 흔든 사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해 보일 뿐이라 괘씸한 구석도 있었지만.
‘나도 경험을 쌓으면 저렇게 될 수 있으려나.’
나는 눈치껏 창에 비친 블러쉬를 구경하며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지웠다.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블러쉬를 떠올리는 만큼 다른 남자와 연애하는 내 모습 또한 이상하게 느껴질 따름이라서.
결국 내가 한 선택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뿐이었다.
처음의 낯섦이 무색하리만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 되었으니까.